엑스재팬과 한국헌법

사회부 | 이범준 기자

일본 록밴드 엑스재팬의 리더 요시키는 1999년 아키히토 일왕 즉위 10주년 국민제전에 출연했다. 봉축곡으로 피아노 협주곡 애니버서리(Anniversary)를 만들었다. 일왕 거처인 고쿄(皇居) 광장에 2만5000여명이 모였다. 연미복 차림의 요시키가 등장하자 젊은 여성들의 탄성이 터졌다. 아키히토의 다양한 모습이 연주와 함께 TV로 전국에 전해졌다. 한신대지진 피해자를 위로하고 아이를 끌어안는 등의 화면이었다. 20세기 마지막 해를 앞둔 거대한 쇼였다.

[기자칼럼]엑스재팬과 한국헌법

국민제전 전날인 11월11일 요시키에게 공개 질문장이 날아들었다. 발신인은 도쿄대 교수인 문예비평가 고모리 요이치, 철학자 다카하시 데쓰야 등이다. 요시키가 더 많은 사람을 동원하려는 주최 측의 정치적 의도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이러한 행사가 일본국헌법의 핵심인 상징천황제를 변질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주장에는 반론이 적지 않았다. 요시키에 대한 질문이 과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상징천황은 1945년 일본 패전 이후 1947년 시행된 일본국헌법 1조에서 나온다. 이전까지의 일본제국헌법 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였다. 이 조항으로 절대권력을 확보한 쇼와 일왕은 전쟁을 일으켜 2000만명을 희생시켰다. 그런데도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상징천황으로 살아남았다. 새로 만들어진 일본국헌법 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을 지닌 일본 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가 됐다. 전쟁에 책임이 있는 천황제도를 살려내려는 일본이 맥아더 사령부(GHQ)를 설득한 결과다.

그리고 일본이 GHQ 헌법안을 결정적으로 뒤집은 부분이 ‘국민’이다. GHQ 초안의 주어는 영어로 피플(people), 일어로 인민(人民)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국민을 주어로 만들었다. 일본에 남은 조선인의 기본권을 박탈하기 위해서였다. 일본국헌법 시행 전날인 1947년 5월2일 쇼와 일왕이 조선 호적자를 외국인으로 간주하는 마지막 칙령을 발표했다. 기본권 주체를 국민으로 한정한 헌법을 만들려 GHQ를 속이기까지 했다. 같은 단어를 다르게 번역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으로 한정한 두 번째 헌법이 이듬해 한반도에서 탄생한다. 대한민국헌법이다.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박사는 말했다. “인민이라는 말은 구 대한제국 절대군주제하에서도 사용되던 말이고 미국헌법에 있어서도 인민(people, person)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citizen)과는 구별되고 있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인민을 의미하므로 국가 우월의 냄새를 풍기어 국가라 할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사람을 표현하기에는 반드시 적절하지 못하다.”

기본권을 국민에 한정한 것은 처음부터 부당했고 마지막 개헌인 1987년에도 고치지 못했다. 결국 1988년 설립된 헌법재판소는 국민에 외국인이 포함된다고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현행 헌법에서 국민은 외국인을 포함한다. 통상적인 언어 의미를 완전히 벗어나는 이런 비정상을 해소하는 방법은 헌법을 고치는 것뿐이다. 그래서 기본권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수정하라고 2014년 19대 국회 헌법개정자문위원회도 밝혔다. 손을 대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조항이 쌓여가고 있다.

헌법은 헌재의 해석과 국회의 입법으로 보완되는 것을 안다. 후진국 헌법일수록 조항이 길고 문장이 아름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낡은 헌법은 헌재에 과도한 권한을 갖게 하고 헌법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다. 헌법이 다수 국민과 사람을 벗어나 소수 헌법재판관과 국회의원의 손에 들어간다. 요시키는 상징천황제를 무력화할 힘이 없었지만 헌재와 국회는 기본권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헌법을 새로 써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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