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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역할은 죽는 것이다
“인류 모두에게 300년의 생명을 주소서!”카렐 차페크의 희곡 <마크로풀로스 사건>에서는 불로불사의 약을 두고 논의가 벌어진다. 법무사 비테크는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이 약을 모두에게 주자고 한다. 그는 인생이 너무 짧아서 기뻐할 틈도 사색할 틈도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300년을 살 수 있다면 처음 태어나 100년 동안 배우고 익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누구나 현명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면 “빵 한 조각을 위해 악착같이 달려드는” 데서 해방된 인간은 더 정신적인 일에 애쓰게 된다. 공포도 사라지고, 전쟁도 없어진다.<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영생의 존재 ‘스트럴드블럭’은 좀 다르다. 스트럴드블럭은 여든 살이 되면 평범한 다른 노인들처럼 늙는다. 오히려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보다 더 많은 결점을 보여준다. 독선적이고 탐욕스럽고 심술궂다. 아는 건 젊은 시절 배우고 본 것이 전부다. 아흔이 넘으면 식욕도 없으면... -
왜 자꾸 ‘처리수’라고 부르나
친구의 정의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다. 동료는 ‘같은 조직에서 함께 일한 사람’이다. 비슷한 느낌이 있기는 해도 두 말의 의미는 헷갈리지 않는다. 사용 대상이 달라서다. 일상에서 “코흘리개 시절부터 50년 동안 우정을 나눈 고향 ‘동료’입니다” 또는 “업무적으로 손발이 잘 맞는 직장 ‘친구’입니다” 같은 어색한 문장을 쓰는 사람은 없다.그런데 정치권에서는 최근 어떤 용어 선택과 관련해 어색하고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국민의힘 대변인 논평의 첫 문장은 ‘오늘은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방류가 시작된 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였다. 오염수가 아니라 ‘오염처리수’라는 용어를 썼다. 지난달 22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가 방류된 지 1년 정도 지났다”고 말했다. ‘처리수’가 등장했다. 오염처리수나 처리수는 최근 국민의힘에서 일상 용어가 됐다.하지만 야당에서는 후쿠시마 오염수라는 표현을 예나 지금이나 일관되게 사용한다... -
‘AGAIN 1988’의 조건
뜨거운 여름, 17일간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남긴 2024 파리 올림픽이 막을 내리며 2036년 올림픽 서울 유치에 대한 새로운 논의에 불을 붙였다.다시 서울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서는 48년 만이라는 역사성과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달라진 시대정신만큼이나 다른 차원의 준비가 필요하다. 경기를 치르는 과정에서 기후위기를 악화시키지 않아야 하며, 비용과 자원 투입은 합리적 효용성을 갖춰야 한다. 국내적으로는 오버투어리즘 등을 견딜 명분 등도 제시해야 한다.2020 도쿄 올림픽은 폐휴대전화 등에서 추출된 금속으로 메달을 제작하는 데 그쳤지만 파리는 경기장·건축물 건설까지 지양했다. 미완으로 끝났으나 ‘에어컨 없는 여름나기’도 시도했다. 하지만 올림픽의 탄소배출은 70% 이상이 선수단·관람객 등의 이동에서 발생한다. 이에 특정 도시가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경기를 치르는 식으로 올림픽이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때 서울로 사람들이 모여야 할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 -
주연 만들어낸 수많은 조연들
양궁은 세계 최강임을 입증했다. 여자 단체전 10연패, 3관왕 두 명. 3관왕 임시현은 “제대로 쉰 날이 없다”고 말했다. 금메달 5개 싹쓸이는 철저한 준비와 훈련, 치열하고 투명한 경쟁, 현대차그룹의 든든한 지원이 엮은 합작품이다.여자 펜싱 사브르 대표팀은 단체전에서 세계 1위 프랑스를 꺾고 은메달을 따냈다. 남자 사브르 대표팀은 단체전을 3연패했다. 단신의 한계, 노출된 전력을 많은 땀으로 극복한 결과다. 태권도는 금 2개, 동 1개로 도쿄 올림픽 ‘노골드’ 충격을 씻었다. 도전자 자세로 철저하게 준비했고 겸손하게 훈련한 덕분이다. 세계 5위, 4위, 1위, 2위 순으로 꺾고 우승한 세계 24위 김유진은 “고된 훈련을 견딘 나를 믿었다”고 말했다.탁구는 2012년 런던 대회 이후 12년 만에 올림픽 메달을 수확했다. 신유빈 등은 “언니, 동생, 지도자, 협회 모두 한마음으로 노력한 덕분”이라고 입을 모았다.독하게 훈련한 유도는 은 1, 동 1개를 따냈... -
이익의 연결, 진심의 연결
가수 강산에부터 배우 황정민까지 모두 184명이었다.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마지막에 나오는 ‘도움 주신 분들’의 숫자다. 다큐 속에서 고 김민기 학전 대표를 회고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김민기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을 보면서 등장인물을 메모해봤다. 김민기가 남긴 체취는 ‘아침이슬’이나 ‘지하철 1호선’에도 있지만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 사이에 더 짙게 배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엔딩의 이름을 보니, 새삼 그 수가 많았다.데이터저널리즘팀에서 종종 사람들 사이의 연결, 네트워크 분석을 하는 건 보통 ‘무리 짓기’의 부정적 측면을 조명하기 위해서다. 최근 내놓은 ‘해병대 수사외압, 결정적 순간들’ 인터랙티브 뉴스도 그렇다. 해병대 수사단장이었던 박정훈 대령이 사단장까지 책임을 묻는 채모 상병 순직 관련 수사 결과를 보고하자, 수많은 통화와 접촉이 시작된다. 대통령을 비롯한 39명의 인물이 열흘 남짓 동안 모두 7시간 가까운 통화를 200차례가... -
하제마을 팽나무와 생태감수성
전북 군산 수라갯벌 인근 하제마을은 주민들이 모두 쫓겨나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다. 미군기지 탄약고와 가깝다는 이유로 660가구, 약 2000명의 주민이 강제 이주당하고, 주민들이 살던 집은 모두 철거되면서 마을은 텅 빈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매달 네번째 토요일만은 평소와 달리 활기찬 분위기가 된다. 수십, 수백명의 지역 주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마을에 남아 있는 600년 수령의 ‘팽나무’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기 때문이다.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온 경남 창원의 500년 된 팽나무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 팽나무가 꿋꿋이 마을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군산시 보호수이자 전라북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된 덕분이었다. 이 팽나무는 시민 수천명의 서명에 힘입어 문화재가 됐고, 현재는 이 나무를 천연기념물로 등재하기 위한 심사도 진행 중이다.과거에는 수라갯벌과 하제마을을 지키고 싶은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마음이 이 나무를 지키는 원동력과... -
유상임 내정자님, 궁금합니다
지난주 새로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내정자가 발표됐다. 유상임 서울대 공대 교수다. 사실 과기정통부는 이른바 ‘핫한’ 정부 부처는 아니다. 국회 인사청문회 뒤 누가 장관으로 최종 임명되더라도 국민은 잘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많다. 이유가 있다. 과기정통부가 벌이는 사업 대부분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먼 미래를 내다보며 추진되는 ‘심심한’ 일이어서다. 현세대가 아니라 자녀 세대가 혜택을 볼 사업도 많다. 당장의 내 일상과 과기정통부가 하는 일의 간격은 작지 않다.그런데 과기정통부 업무 가운데 인공지능(AI)은 좀 다르다. 최근 ‘챗GPT’의 등장으로 AI는 일상 속으로 확 들어와 온갖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당장 내년에 어떤 능력을 지닌 AI가 개발될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사람처럼, 어쩌면 사람보다 더 수준 높은 생각과 말을 구사할 AI가 머지않아 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AI와 관련한 과기정통부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AI가 일상을 편리하게 만들 수... -
‘보디가드’ 정치
10년도 더 된 일이다. 첫 정치부 출근을 앞두고 막막해할 때 선배가 말했다. “사람의 가장 저열한 욕망부터 가장 고귀한 욕망까지 볼 수 있는 곳이야.” 멋진 인수인계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어렵다. 아무래도 타인의 근원적 욕망 같은 건 잘 안 보인다. 서로의 욕망을 자극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일을 꾀하는 동네라는 것 정도를 겨우 알겠다.결국 눈에 보이는 말과 행동을 파고들 수밖에 없다. 정치 기사에는 종종 ‘명분 삼는다’는 표현이 나온다. ‘진짜’ 욕망은 감춘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명분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다. 명분을 고민하고 깎아나가는 과정에서 정치인이 품을 수 있는 고귀한 욕망, 희생을 감수하고 지켜낼 무엇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정치인들이 자기 발에 스스로 채울 족쇄를 정성껏 담금질하는 장면을 떠올려보고 있다.22대 국회에선 유독 누군가를 지키는 데서 정치 행위의 명분을 찾는 이들이 많아 보인다. 주권자들 모르게 단체로 “‘○○○을 지켜라’에 들어갈 이름은?... -
모빌리티 시대 교통의 편익
요금 할인, 무제한 정기권, 100원 균일가, 고령층 무료….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이 최근 경쟁을 벌이듯 다양한 교통 정책을 고안하고 있다. 새로운 철도나 도로를 뚫지 않고 주민들의 이동 만족도를 높이는 방식들이다. 과거 사람과 물자의 빠른 이동에 초점을 맞췄던 교통의 개념 역시 달라졌다. 수송 수단의 ‘교통’(transport)에서 이동 자체에 의미가 큰 ‘모빌리티’(mobility)라는 단어를 쓰게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많은 인원을 빠르게 수송하기 위한 교통은 정부가 구축해야 하는 대규모 기반시설이었다. 반면 모빌리티는 정보기술(IT)의 발달로 이동을 위한 수단과 경로, 시간 등을 개인이 선택하는 서비스에 가깝다. 속도뿐 아니라 목적, 상황에 맞춘 이동이 중요하다.교통에 대한 행정의 관심과 시민 호응은 인구감소·고령화와도 맞물려 있다. 수요·공급만 따져서는 이동권을 지킬 수 없는 지역들과 주민들이 급증했다. 코로나19 이후 확산된 재택근무는 출퇴근길에 ‘버리는 시간... -
체육 교과명, ‘체육’이 맞다
지난달 보건복지부가 ‘2023 아동종합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아동 5명 중 1명이 과체중 또는 비만 상태라는 결과가 충격적이다. 체중이 대체로 늘면서 전 연령대에 걸쳐 과체중·비만 비율이 20%를 넘었다. 3~8세 비만율은 12.3%로 이전 2018년 조사와 비슷했지만, 9~17세 비만율은 14.3%로 5년 전(3.4%)보다 4.2배 증가했다. 수면시간은 하루 평균 20분 줄고 앉아 있는 시간은 주당 약 2시간 늘었다. 아동 42.9%는 방과 후 친구들과 놀고 싶다고 응답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세계보건기구(WHO)는 아동·청소년에게 매일 60분 이상 ‘보통 혹은 격렬한 강도 신체활동’을 권고하지만 한국에서는 꿈같은 이야기다. 한국 청소년의 신체활동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입시 중심 교육, 체육에 소홀한 교육부의 자세, 코로나19로 인한 신체활동 제한, 과도한 스마트폰 몰입, 부모의 과보호 등이 원인이다. 아동 비만은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