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없다면 축구가 아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정윤수의 오프사이드] 문화가 없다면 축구가 아니다

나는 왜 리버풀을 응원하고 있는 걸까? 이태 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리버풀은 단지 응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열렬히 사랑할 만한 팀이다. 그 팀의 역사 그리고 리버풀의 근현대사를 웅크리고 살펴보면 누구라도 금세 좋아하게 된다. 그럼에도, 한 번 가보기는 했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리버풀을 왜 응원하고 있을까, 그 맞상대인 허더즈필드를 사랑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에 후반전에는 오로지 허더즈필드에만 집중했다. 이유없는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법! 그러나 그날, 대패했다. 전반전 휘슬이 울리자마자 케이타가 1골, 그 후로 마네가 2골, 살라가 2골. 모두 리버풀 선수들이다. 허더즈필드는 0-5로 졌다. 그래서 더욱더 허더즈필드를 사랑하게 되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사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토트넘을 응원하기는 쉽다. 박지성이 뛰었고 손흥민이 뛰고 있다. 첼시나 아스널도 많이들 응원한다.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 이탈리아의 유벤투스. 모두 빅스타가 뛰는 빅클럽으로 그들 각자의 역사와 문화를 일별해도 유럽의 근현대사가 싱크로율 100%로 복기되는 사회문화사의 증언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팀들끼리 맞붙으면 어떨까. 에이바르나 베네벤토 같은 팀 말고 1년 내내 맨유와 바르셀로나와 뮌헨과 유벤투스가 맞붙는 것이다. 그런 발상이 제기되어 세계 축구계를 놀라게 했다가 금세 좌초되었다. 미국 최대 은행 JP모건체이스가 설계하고 레알 마드리드의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 등이 주도한 ‘유럽슈퍼리그’는 축구와 연관된 거의 모든 사람들의 비판에 의하여 좌초되었다. 지난 23일, JP모건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잘못 판단했다. 우리는 이번 일로부터 배움을 얻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럽슈퍼리그는 착상 가능한 하나의 모델이다. 유럽축구계의 강력한 오피니언인 아르센 벵거 전 아스널 감독은 최상위 팀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구축할 것이라고 오래전부터 경고해왔고 실제로 페레스 회장은 2009년부터 설계해왔다. 그러는 중에 코로나사태가 2년 가까이 축구장을 엄습했고, 무관중 상태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빅클럽으로서는 슈퍼리그 카드를 적극 검토했는데, 좌초되었다.

그 결정적 이유를 압축하면 ‘그것은 축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코로나 상황에 따라 유럽 곳곳의 중소 구단은 거의 파산 위기에 몰려 있는데 슈퍼리그가 출범하면 글로벌 문화산업에서 탈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국 리그에서도 특정한 지역문화로 축소될 수 있다. 슈퍼리그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보상하겠다고 했지만 그것은 자생과 자율이 아니라 종속이 된다.

축구를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공공재로 인식해온 독일 분데스리가는 일찌감치 불참을 선언했고, 스페인 라리가 사무국은 “규모에 상관없이 자신의 클럽이 유럽 축구의 정상에 오르거나 최상위 레벨에서 경쟁하는 꿈”을 축구팬들에게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이 “축구의 자유로운 경쟁 및 공정함에 반하는 모든 계획을 규탄”한 것은 바람직한 결정이다.

한편 JP모건이 설계하고 페레스 회장이 독자노선을 걸었다고 해서 국제축구연맹이나 유럽축구연맹이 자동으로 ‘선의 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슈퍼리그를 향해 ‘이익 추구를 위해 축구의 가치를 훼손했다’고 비난했지만, 꽤 많은 사건들은 그들 또한 그러한 과정을 밟아 지금의 권위와 영향력을 구축했다는 것을 증언한다.

이번 시즌 허더즈필드는 2부 리그에서 뛰고 있다. 그것도 최하위다. 2019년에는 유니폼 논란도 있었다. 그 유니폼을 입으면 100여년 역사의 철강 도시가 아니라 베팅 업체로 보일 뿐이다. 그 도시를 다녀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광적인 축구팬들과 빅토리아시대 기차역이 너무 아름다웠고 그거 말고는 글쎄, 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코로나 이후 최종 목적지는 아니더라도 경유지로 충분히 삼을 만한 도시 아닌가. 현재 무관중인 상황에 2부 리그로 추락해서 그들을 응원할 방법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슈퍼리그 같은 계획으로 인해 완전히 축구문화사에서 지워져서는 안 된다. 게리 네빌이 말했듯이 “지역 노동자로부터 시작한 축구가 자본에 의해 무너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 세계의 모든 허더즈필드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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