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제자를 두고 “알고 보니 너는 똥 같은 존재였어!”라고 한다면 이들 사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 게다가 그 스승이 공자였다면? 저간의 사정은 이러했다.
공자 당시는 지금의 학교같이 교육을 위해 별도로 마련한 공간이란 것이 없었다. 스승과 제자는 주로 스승의 집이나 주변에서 일상을 공유하면서 학문과 지혜를 나누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공자는 제자 하나가 낮잠에 빠져 있음을 발견했다. 재여라는 제자였다. 문득 헤아려보니 그가 낮잠을 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절로 탄식이 나왔다.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똥 섞인 진흙으로 쌓은 담은 마름질할 수 없다!” 재여를 서슴없이 썩은 나무와 똥 취급을 했던 것이다. 다만 재여 면전에서 한 말은 아니었다. 낮잠에 젖어 있는 그를 보며 혼자 되뇐 말이었다. 탄식은 자연스레 공자 자신으로 향했다. “재여를 어찌 책망할 수 있겠는가?” 잘못은 재여가 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자책이었다.
게으른 제자를 바로잡지 못했으니 결국 스승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사람에 대한 말을 듣고는 곧이곧대로 믿었는데 이제 나는 그의 행실을 지켜보게 되었다.” 공자는 재여를 보기 전 재여에 대한 괜찮은 평판을 듣고는 아무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평소 말과 실제는 일치해야 한다고 여겼던 그다운 행동이었다. 그런데 막상 접해보니 자기가 들은 평판과 재여의 행실은 딴판이었다.
이는 재여더러 너는 왜 평판과 다르냐고 따져 물을 성격이 아니었다. 제자이기 전에도 재여는 그렇게 일상을 보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말만 듣고 실제도 그러하리라고 덥석 믿어 속은 공자의 우직함이었다. 하여 공자는 재여를 책망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이에 자기 신념을 바꿨다고 고백했다.
말은 이렇게 사람을 똥으로 만들기도 한다. 저 옛날부터 ‘찰언(察言)’이라고 하여 전해 들은 말을 잘 살피라는 권계가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말은 전해지다 보면 흰색이 검은색이 되고 개가 원숭이로 됐다가 사람으로 바뀌는 건 일도 아니었다(<여씨춘추>). 말의 힘은 이처럼 없는 사실도 만들어내고 있는 사실을 왜곡하며 악용되기 일쑤였다.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했던 역사가 어김없이 반복될 듯한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