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영화 <왕자와 거지>(1977)의 한 장면.

영화 <왕자와 거지>(1977)의 한 장면.

갑자기 쌀쌀해졌다. 코로나로 피로한데 감기까지 걸리면 낭패다. 감기 또한 코로나처럼 바이러스에 기인함에도 차가운 날씨 탓을 한다. 따뜻한 공간을 찾아 사람들이 몰리니 바이러스에 감염될 확률이 높을 뿐이다. 추위와 감기는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인과성과 상관성을 혼동하는 만큼 소설, 영화 같은 허구 예술을 평가할 때 사실성과 개연성이 혼용되는 경우가 잦다. 허구는 재미난 거짓말이다. 거짓 이야기가 수용되기 위해서는 현실 세계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반영하고, 플롯상의 인과관계가 ‘그럴 법하게’ 연결돼야 한다. 전자가 사실성이고 후자가 개연성이다. 독자나 관객은 허구의 외피가 사실적이지 않을 때보다 플롯의 맥락이 논리적이지 않을 때 불만이 생긴다. <오징어 게임>은 사실적이지 않지만 죽음의 게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인물의 절박한 처지 설정으로 개연성을 단단하게 조이고 시작한다. 이후 드라마의 전개는 사실성에 연연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풍자소설의 대가 마크 트웨인은 장남이 디프테리아로 죽자 겨울에 아들을 데리고 나간 자신을 책망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인과성과 상관성을 혼동한 그였지만 사실성과 개연성의 원칙과 활용에 탁월했다.

<왕자와 거지>는 16세기를 배경으로 ‘변신’ 플롯을 흥미롭게 풀어낸 명작이다. 실존했던 에드워드 6세를 사료로 활용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에 구애 받지 않았다. 악명 높은 헨리 8세의 왕궁에서 왕자와 거지가 신분 바꾸기 놀이를 한다. 천사나 마법사를 등장시키지 않고서도 변신 이야기를 제공할 수 있었으니 착상의 순간 쾌재를 불렀으리라. 트웨인은 <왕자와 거지>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일 수도,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며 소설의 개연성을 역설한다. 문제는 참신한 발상을 독자들이 ‘그럴 법하다’고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도록 개연성의 토대를 쌓는 작업이다. 허구 예술의 제일 큰 난관이다. 트웨인은 수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이야기를 설계했다.

교회 탄압을 피해 은둔한 신부를 역사에서 빌렸다. 신부로부터 글을 배운 거지 소년은 책을 통해 궁정생활을 동경하던 중 왕자를 알현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다. 둘은 같은 날 태어났고 우연히도 비슷하게 생겼다. 이 설정은 신분차별에 대한 주제를 견인하는 단초로 기능한다. 역사적 사실과 기이한 우연을 적절하게 반죽해 개연성의 밀도를 높이는데 주력했다. <왕자와 거지>처럼 그럴듯한 가능성을 담보한 이야기는 개별 사건을 취급하는 역사와 달리 인간의 보편적 삶을 다룬다. 서사예술의 가치다.

<왕자와 거지>와 같은 ‘변신’ 플롯이 주종인 웹소설이 인기다. 전생으로 회귀하든, 다른 사람과 몸이 바뀌든 지금과 달리 멋진 존재로 탈바꿈하는 상상은 흡입력이 있다. 그만큼 현실이 갑갑한 것이다. 변신한 주인공은 가공할 능력을 발휘하며 꾀죄죄한 현실, 부끄러운 현생에서 탈주한다. 웹소설의 세계는 자연의 인과율에서 한참 벗어나 있으나 설득할 의지가 없다. 개연성이 없거나 허술해 전개를 따라가기 힘겹다고 불평하면 오히려 ‘개연충(개연성에 집착하는 버러지)’이라 공격받는다. 희한한 반응이다. 어차피 허구이니 재미없으면 안 보면 그만이다. 문제는 정치인들 언술 속의 개연성 유무다.

대선 후보 간 치열한 공방의 배경에는 후보들의 서사가 있다. 평균적 결함이 인간의 본질이니 어느 후보도 느긋할 수 없다. 윤석열 후보의 손바닥에 쓰여진 ‘왕’ 자가 논란이다. 경쟁자들의 추궁에 윤 후보 캠프에서 던진 해명이 안타깝다. 이웃 할머니가 써준 ‘왕’ 자이며 손을 대충 씻다 보니 지워지지 않았단다. 개연성이 마련되지 않아 ‘왕 자와 거짓’으로 풍자될 만큼 궁색하다.

수긍이 가지 않는 해명은 변명으로 들리고, 변명이 길어질수록 귀에서 멀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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