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의 에크리튀르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킹스 스피치>의 주연 콜린 퍼스.

<킹스 스피치>의 주연 콜린 퍼스.

영국의 찰스 왕세자는 매년 최고령 세자의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올해로 74세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만수무강 덕이다. 고지식한 왕실 전통으로 고통받은 사람은 여럿이다. 왕이 되고 싶어도 수십 년간 세자로 머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 반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왕이 되기도 한다. 찰스 왕세자의 조부인 조지 6세는 천성이 소심했고 심각한 언어 장애가 있었다. 추호도 왕이 될 생각이 없었던 그에게 운명은 왕관을 씌운다. 얄궂다. <킹스 스피치>는 말을 더듬는 치명적 결점을 극복해 국민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왕과 언어 치료사의 이야기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말더듬이 국왕의 초라한 위상은 선동적 연설로 독일인의 패배감을 정복욕으로 전화시킨 히틀러와 영국인들의 자긍심과 정의감을 고취시켜 파시즘의 광기를 막아낸 웅변가 처칠과 극대비된다. <킹스 스피치>는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되었지만 조지 6세의 언어 장애와 극복의 과정을 은유로 읽으면 정치가 어떤 언어의 형식과 내용을 담보했을 때 효과를 발휘하는지 웅변하는 영화가 된다.

정치는 힘을 다루는 기술이다. 정치인은 대중의 심리를 파악해 자신의 신념을 주입하고 설득해 세력을 확장한다. 조지 6세는 애초에 왕이 될 처지도 아니었고 욕심도 없었기에 국민을 이해할 필요도 설득할 책임도 없었다. 그에게 연설문은 왕실에서 써준 쪽대본이었다.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아 더듬는 음절 사이로 흩어지는 허튼 말이다. 그가 온전히 말을 할 때는 분노하는 순간이다. 억압되었던 자아가 비명을 지르듯 터져 나올 때면 감정이 완전한 문장에 담겨 전달되었다. 히틀러의 선동을 본 후 분노와 함께 책임감을 느낀 조지 6세는 영국 국민들에게 항전을 설득할 연설문 낭독을 시작으로 언어 장애를 고쳐나갔다.

한국 정치가들의 연설을 들으며 마음이 움직였던 기억이 없다. 세련된 정치 언어로 무장된 정치인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말을 잘하는 것이 설득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한국인은 번지르르하게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 말이 미끈하다는 것은 수사에 집중돼 실속이 없다는 경험이 반영된 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진정성이 약한 내용을 미사여구나 웅변 기술로 메우려는 시도는 숱하다. 약한 이미지를 보완하기 위해 억지스러운 중저음 발성으로 실소케 한 안철수 대표와 요령부득의 메시지로 전락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언술이 대표적이다.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최근 윤석열 후보의 정치 언술에서 겹치는 지점이 많다. 간투사 남용으로 연결이 약한 문장, 질문에 대한 두루뭉술한 대답 등 언어가 정제돼 있지 않고 설득력이 약하다. 더 정확히는 윤 후보에게서 설득 의지를 찾기 어렵다. 정치인은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얻을 수 있는 객관화’를 토대로 유권자를 설득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설득 의지가 없다는 점은 표심을 얻는 데 불리하다.

윤석열 후보의 언술에서 설득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가 충성했던 검사 조직의 언어 습관에서 찾을 수 있겠다. 롤랑 바르트가 언어의 층위를 구분하면서 개념화한 ‘에크리튀르’는 집단 특유의 언어 습관을 뜻한다. 사용하는 언어가 변하면 사고방식과 경험의 틀도 따라 변한다. 교사 집단의 언어가 있고, 종교인의 언어가 있다. 집단마다 개별적 에크리튀르를 선택하고 구성원은 그것을 체득한다.

검사의 언어에 설득이 자리할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오랜 시간 검사 생활을 해온 윤 후보의 정치 언어는 검사의 에크리튀르에 머물러 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검사 윤석열의 결기를 찬양한 국민들이 정치인 윤석열에게 바라는 것은, 그가 충성할 국가의 비전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지도자로서의 에크리튀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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