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공부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작년과 재작년, 대안연구공동체에서는 몇몇 대학과 대학원의 강의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코로나19로 갈 곳을 찾지 못한 학자들의 온라인 강의였습니다. 특히 한 학자는 서울대 대학원과 고려대 대학원, 성균관대 대학원 등의 강의를 공동체에서 진행했습니다. 이 학자는 칠판이나 화이트보드에 글씨를 쓰면서 강의를 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서울대, 고려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판서를 하면서 실시간 온라인 강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대학의 무신경과 안이함 탓으로 적어도 온라인 강의 시스템에서는 작고 가난한 인문학 공동체가 국내 최고의 대학을 앞섰던 겁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하며 토론을 포함한 어떤 형태의 수업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강의 시스템을 세팅하며 제도권 대학의 강의를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었습니다. 예상했지만 서울대, 고려대 대학원의 강의라고 해서 여기서의 강의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다르다면 학점과 시험이 있는 것, 학교에 따라 학생들의 질문이 조금 더 활발하고 날카로운 것 정도였습니다.

오히려 못한 점도 있었습니다. 한 학기, 16주 안에 강의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공부해야 할 책을 한 학기 만에 마치려니 그 학자 강의 특유의 풍성함이 크게 줄었습니다. 철학 강의를 하면서도 문학과 역사, 종교, 신화, 음악, 미술, 영화 등등을 종횡무진하는 것이 그의 장기입니다. 하지만 이 장기는 학기제라는 대학의 한계 때문에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그가 공동체에서 진행하는 강의는 웬만하면 50강 이상에 이릅니다. <Less than Nothing>, 국내에는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2권으로 나누어 번역된 슬라보이 지제크의 책은 무려 4년 159강에 걸쳐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대학 신입생이 입학 후 4년 동안 학기마다 빠짐없이 수강해도 120강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 대학원에 진학해 논문 학기가 될 때까지 매 학기마다 빠짐없이 출석해야 모두 들을 수 있는 강의를 이어간 것이지요.

그 강의에 참여하는 이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수를 포함한 학자와 작가, 예술가, 혹은 석·박사 과정의 연구자가 유독 많다는 겁니다.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는 그의 강의에서 해당 주제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연구나 작품 제작에 도움이 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일까요? 강의에 참여하는 이들의 상당수가 3~4년 이상 장기 수강을 하는 것도 그 강의의 특징입니다. 2016년 이후 7년째 그의 강의를 찾고 있는 어느 작가와 60대 은퇴자는 이 중에서도 터줏대감에 속합니다.

길게 이어가는 강의는 일종의 대안대학을 자임하며 대학에서는 안 하거나 못하는 것을 하자고 했던 공동체 개설 당시의 다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학에서 안 하거나 못하는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학문 사이의 칸막이 혹은 장벽을 없애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철학을 공부한 학자가 문학이나 예술 공부 모임을 전혀 다른 방법과 시각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주제나 기간의 제한 없이 관심사가 있으면 마음껏 연구하고 강의하게 하는 것도 다짐 중 하나였습니다. 덕분에 공동체에는 3~4년, 길게는 10년 이상 이어가는 공부 모임도 생겨났습니다.

물론 대학에서의 공부와 인문학 공동체에서의 공부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한정된 기간 대학에 다니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청년들은 할 일도, 공부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가능하면 핵심을 압축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공동체에서 하는 어른의 공부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과 관련된 것입니다. 삶에 중요한 관심사라면 기간에 관계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의 중요한 주제도 삶입니다. 적어도 인문학에 관한 한 대학보다 인문학 공동체가 유리한 점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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