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를 넘는 법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공동체, 커뮤니티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인문학 공동체의 꿈은 자본주의의 기획을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나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는 비제도권 공동체가 강좌나 세미나, 스터디를 지속하려면 사람들이 와야 합니다. 이들이 돈을 내야 합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강좌나 세미나에는 사람이 오지 않습니다. 설혹 왔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바로 떠납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 공동체가 선 자리는 난폭한 자본주의의 최전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오는 사람의 수가 강좌나 세미나에 달린 것만도 아닙니다. 시장이 대개 그렇듯이 계절도 극심하게 타는 편입니다. 인문학 공동체에 봄은 보릿고개입니다. 벚꽃이 피면서 수강자 감소가 눈에 띄기 시작해 5월 이후에는 등록하는 분들이 확연하게 줄어듭니다. 연초에 비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의 수가 절반을 겨우 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계절에도 선전을 펼치는 공부 모임이 없지는 않습니다.

한 철학자가 강의하는 버트런드 러셀의 <서양철학사>와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읽기도 그렇습니다.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중세철학을 마치고 근대 이후의 철학으로 넘어갔는데, 보릿고개가 시작되기 전에 왔던 수강자들이 단 한 분도 빠짐없이 재등록했습니다. 여기에 새로 온 분들이 가세해 수강 인원이 지난 시즌의 1.5배가량으로 늘었습니다. 철학서를 1년 이상 길게 강독하면서, 중간에 수강자가 늘어나는 경우는 왕왕 있지만 재등록률이 100%인 강의는 매우 드뭅니다. 엊그제 그가 새로 시작한 한나 아렌트 강좌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등록했습니다.

그 학자의 강좌에 처음부터 사람이 많이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학 강의만 하던 그가 공동체에서 처음 강의한 것은 7년 전이었습니다. 첫 강의에 20여명이 등록했으나 첫 시간을 마치자 4명이 수강을 철회했습니다. 다음 시즌 강좌의 재등록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지요. 이후 몇 시즌이 지나자 그의 강좌를 찾는 이가 사라졌습니다. 몇 년 쉬다 2019년 다시 시작한 강의에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등록한 분이 소수임에도 개강을 강행한 어느 강좌에서는 시즌 중 단 한 사람도 출석하지 않아 헛걸음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 학자의 강좌에서 재등록률이 높아진 것은 지난해 초부터입니다. 참여자들의 질문을 대하는 그의 자세가 달라졌다는 말들이 들리는가 싶더니 머잖아 이것이 재등록률 상승으로 이어졌습니다. 코로나로 100% 온라인 강의를 하면서도 시즌마다 번개모임을 하며 강의와 관련한 토론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강의가 좋아진 것일까요?

흔히 명쾌하고 유창하고 재미난 강의를 좋은 강의라고 합니다. 하지만 철학 강의인 이상, 아무리 좋은 강의도 철학이라는 밥을 떠먹여 주지 않습니다. 밥을 퍼먹여 주는 강의를 좋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대체로 당의정이 듬뿍 발라진 이런 강의는 오히려 해로운 강의에 가깝습니다. 좋은 강의는 자신의 힘으로 철학이라는 음식을 먹고 즐기게 합니다. 철학을 하게 합니다.

인문학은 책 읽기에서 비롯됩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가 여기저기 강의만 찾아다니며 밥을 퍼먹여 주길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텍스트를 읽으며 텍스트에 손때를 묻혀야 합니다. 사유하고 토론하며 글을 써야 합니다. 그 학자는 참여하는 분에게 권합니다. 강의를 듣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직접 텍스트를 읽으라고요, 텍스트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체력도 기르라고요. 생각하고, 토론하고, 할 수 있으면 글도 쓰라고요. 덕분인지, 그의 강의를 듣는 동안 텍스트를 읽으며 공부하는 재미, 철학하는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좋은 강의는 선생 혼자 만들 수 없습니다. 가르치는 분과 배우는 분이 함께해야 합니다. 보릿고개에 심한 가뭄까지 겹친 중에도 그의 강좌에 사람이 많은 것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사유하기를 즐기려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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