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하루 두 끼 식사로 만족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공부해 온 어느 분의 고요한 눈빛을 본 뒤였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원문을 3년에 걸쳐 모두 읽은 뒤, <춘추좌전> 읽기 모임을 시작한 분이었지요. <사기> 원문의 글자 수가 약 56만자, <춘추좌전>은 그 절반 정도이나 훨씬 더 난해한 책입니다. <춘추좌전>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도 <사기>를 능가합니다. 몇 달도 쉽지 않은데, 몇년씩이나 걸리는 독서를 이어가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는 오후불식(午後不食), 하루 두 끼 식사를 말했습니다. 소식으로 절제하며 매일 새벽 깨어나 공부하는 것을 습관화하다 보니 긴 공부를 어렵잖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겉으로나마 그를 따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량이 폭증하고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는 시대에 수천년 전의 고전을 몇년에 걸쳐 읽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공동체에서 책 한 권을 공부하느라 3, 4년이 걸리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강독이 그랬습니다. 국내에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두 권으로 번역된 슬라보이 지제크의 책은 무려 160강에 걸쳐 읽었습니다.
이마저 희랍어 성서 읽기 모임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신약성서>를 희랍어로 읽는 모임이 시작된 것은 2011년 8월1일. 시작한 지 11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베드로후서’와 ‘유다서’가 남아 있습니다. 간헐적으로 희랍어 기초문법과 히브리어 공부도 병행했지만 책 한 권을 읽는데 강산이 바뀐 셈입니다. 영문판 프로이트 전집 읽기, 프랑스어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 독일어로 <신구약 성경전서> 읽기 등 비슷한 모임은 또 있습니다.
‘지식 2배 증가 곡선’이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식이 2배로 늘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나타낸 곡선입니다. 이 곡선에 따르면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간의 지식이 2배 증가하는 데 걸린 시간은 100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정보 혁명을 거치며 그 기간이 50년, 25년으로 단축되었고 현재는 1년 정도, 2030년 이후엔 3일로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지식 폭증에 가장 큰 변화를 요구받는 분야는 교육입니다.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그동안 공부한 지식들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으니까요. 실제로 스마트폰으로 검색만 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에서 지식 위주 교육의 한계는 분명합니다. 대안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느 한 분야를 깊이 공부하기보다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공부해 변화하는 세상에 적용하고 응용하라, 초지능 초연결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네트워크다…. 그러면서 자주 제시되는 성공 사례는 대학을 그만두고 대기업을 일군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거부가 된 일론 머스크나 마크 저크버그 등입니다.
지식정보화, 패러다임 시프트, 초지능, 초연결 같은 단어들이 일상화한 지 30~40년, 그사이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설립한 지 10년 만에 자산가치가 10억달러를 넘는 유니콘 기업이 속출하는가 하면 그 10배가 넘는 데카콘 기업도 등장합니다.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분들도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것 못지않게 요동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뒤지지 않기 위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정신없이 질주하는 것만큼이나 멈춰서서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누군가 억만장자가 되는 사이, 누군가는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억만장자를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이 험한 시대를 살면서 고요하고 맑은 눈빛을 지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이 든 어른의 공부에서는 이것이 더 중요할 때도 많습니다. 넘치는 식탐으로 걸핏하면 과식하는 제가 주제넘게 소식에 달려든 것도 이들의 깊은 눈빛을 닮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