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과 레퍼토리

정재왈 예술경영가·연세대 객원교수

노래방이 유행이던 시절 레퍼토리는 참 어려운 문제였다. 부를 차례를 기다리면서 비닐로 단단히 코팅된 노래책을 한참 뒤적거려도 마땅한 곡이 떠오르지 않았다. 절망의 순간, 겨우 생각나는 곡이 노사연의 <만남>이나 윤수일의 <아파트>였다. 내 또래가 알다시피 이 노래는 ‘우리들의 레퍼토리’였으므로 내 것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재왈 예술경영가·연세대 객원교수

정재왈 예술경영가·연세대 객원교수

일반적으로 레퍼토리는 잘 부르거나 보여줄 수 있는 이 같은 개인기를 말한다. 한데 이것이 공연예술 같은 전문 분야에서 쓰일 때는 의미가 좀 더 구체화된다. 예술단체나 극장 등이 상시 공연할 수 있도록 준비된 고유한 공연 작품 목록, 이걸 레퍼토리라고 한다. 명문 예술단체나 극장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기이자 무기로 이걸 갖고 있다.

요즘엔 잘 안 쓰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한데, 우리의 언어습관 중에 ‘18번(十八番)’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의 전통극 ‘가부키’에서 유래한 말로 예술단체나 극장의 레퍼토리 개념을 설명할 때 가장 부합하는 용어다. 역사가 400년 이상 된 가부키는 몇몇 가문이 전승하고 있는 가업(家業)형 연예 비즈니스산업이다. 이 분야의 17세기 인물인 이치카와 단주로는 자신의 가문이 가장 잘하는 가부키 단막극을 18개로 구성하여 흥행을 이끌었는데, 여기에서 18번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사실 우리 전통예술에서도 이런 레퍼토리의 선구자가 있었다.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이자 작가인 신재효는 <춘향가>와 <심청가> 등 판소리 6마당을 체계화하여 판소리 사설문학과 공연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요즘도 <가루지기타령>(변강쇠가)을 제외한 5마당은 수시로 공연되고 있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한국을 넘어 세계의 유산이 됐다. 일찍이 신재효가 완성한 레퍼토리가 없었다면 이런 결과도 없었을지 모른다.

전통무용에서도 레퍼토리 역사의 걸출한 인물이 있다. 근대 명고수이자 춤꾼으로 이름을 떨친 한성준이다. 나중 전설적인 무용가로 칭송받는 최승희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한성준은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에 산재한 우리의 무용을 발굴하고 체계화하여 한국 전통무용의 틀을 완성했다. 오늘날 무형문화재로 전승되는 <승무>와 <살풀이> <태평무> 등이 학교 교육과 현장 공연의 고전 텍스트가 된 데에는 전적으로 그의 선구적인 노력 덕분이다. 일본의 18번이 가업 전승의 소산이라면, 판소리와 우리의 전통무용은 민족 문화 전체를 본 선각자의 헌신적인 레퍼토리화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 공연예술 레퍼토리에 관한 전통과 역사는 이처럼 대단한데 요즘의 실태는 어떤가. 노래방에서 장기로 무장한 사람이 무대를 주도하듯, 예술단체와 극장의 얼굴은 각자 보유하고 있는 작품 즉 레퍼토리다. 개별 작품이 단체와 극장을 대표하는 장기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숙성기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가능성이 있으면 끊임없이 고치고 보완하여 끝내 ‘작품’으로 빚어내야 레퍼토리가 구축된다. 외국의 저명한 공연장과 극단, 무용단, 오페라단, 발레단은 이런 식으로 만든 레퍼토리를 시스템화하여 매일 작품을 바꿔 공연해도 끄떡없이 굴러간다. 물론 탄탄한 제작 환경이 뒷받침돼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에는 수많은 민간 공연단체와 적잖은 국공립 예술단체가 있다. 기획과 제작 등 작품 생산이 주목적인 ‘제작형 극장’도 많지는 않지만 몇 곳이 된다. 한데 각각의 단체와 극장을 대표할 만한 레퍼토리를 갖추어 이를 상시 공연으로 가동할 만한 ‘레퍼토리 시스템’을 갖춘 곳은 과연 있을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매번 신작은 많이 나오는데 오래 사랑받은 명작은 드물다.

그동안 일정한 기간 내 다양한 프로그램을 자신의 콘셉트에 맞게 선보이는 공연장의 시즌제는 보편화했다. 극장경영이 좀 더 진화하기 위해서는 레퍼토리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특히 제작극장은 이것이야말로 사활이 달린 당면과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영글지 못한 신작 생산만으로 시대를 대표할 레퍼토리(콘텐츠) 확보는 연목구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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