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가 여기에 있다’는 구호 너머

남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커밍아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소수자임을 받아들여도 구질구질한 일상은 낯선 모습으로 서로에게 엉겨들기 때문이다. 가령 당신 자녀가 오랫동안 동성파트너와 동거한 사실을 알리면서 그와 이별하고 재산 분할로 곤란해할 때, 혹은 세상을 떠난 당신 가족을 헌신적으로 돌본 이가 동성파트너일 때 함께 산다는 것은 현실의 문제로 다가온다. 그렇게 성소수자의 시간이 일상에 개입한다. 하지만 정작 당신에게 익숙한 일상의 습속과 규준은 오랜 시간 성소수자에게 자격을 물으며 제한과 금지로 작동해왔다.

남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남웅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

십수년 전 보수 정치인과 기독교 집단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조직적인 행동을 가시화했다. 이들은 성소수자가 기획한 대중 이벤트에 훼방을 놓고 괴롭히며 참여한 사람들을 위축시켰다. 이들은 수만명씩 서명을 모아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인권 관련 정책을 막아서고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거리에서 혐오의 대상인 성소수자는 정책과 사회서비스에서 배제된다. 이러한 배경 위에 터져 나온 구호가 ‘성소수자가 여기에 있다’였다. 대놓고 조리돌림하는 긴급한 상황에 혐오를 반대하고 존재를 지우지 말라는 외침은 ‘존재만으로 투쟁’이라는 메시지로 도약한다. 하지만 그것은 저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며 일상을 꾸리는지는 쉽게 생략한다. 절박하지만 뭉툭한 구호 저편에는, 성소수자 차별은 반대하지만 그들을 어떤 관계로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수치가 70%에 육박하는 인식조사 결과가 공명한다.

추상적인 구호 속에 성소수자가 이웃이자 가족으로 존재한다는 감각은 요원하다. 여기에는 개인의 일상보다 죽이지 말라는 생존의 처절한 외침이, 구체적인 삶보다 개념적 인권의 당위가 우선한다. 존재의 갈급을 표출하는 구호는 그 안에 어떤 긴장이 있고 정치적 견해 차이가 있는지 쉽게 생략하며 담론을 구체화하고 확장해나가는 데 곤란한 환경 또한 드러낸 것이다.

성소수자는 그저 성소수자로만 살지 않는다. 노동자로, 청소년과 노인으로, 학생과 군인으로, 주민등록번호의 성별 코드로 분류되지 않는 몸으로, 이성애 가족 중심의 배타적인 사회보장제도와 관혼상제로부터 배제된 가족 구성 모델을 이루는 삶들은 당신의 당연한 일상에 불안정하게 포개어져 미끄러진다. 그 속에서 성소수자들은 저마다의 경험을 모아 필요한 권리를 도출하고 새로운 삶의 문법을 제안한다. 근래 법원에서 동성 부부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판결은 일상의 구체적인 요구가 이룬 성과다. 차별적인 제도를 바꾸고 사회에 환대와 연결을 요구하는 이들은 제 일상을 노출하는 용단을 감내한다. 존재의 해상도를 높이며 사회의 문을 두드리는 일상의 세부 항목들은, 이미 당신에게 스며들고 있다. 시기상조가 말 그대로 시기상조가 되어버린 지금, 어떤 변화를 요구하고 받아들일 것인지 함께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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