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고전의 가능성을 탐구하라

박태근 위즈덤하우스 편집본부장

마블 영화나 원작 만화 마블 코믹스가 고전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답변이 돌아올까. 마블 코믹스가 영미 출판계의 대표적인 고전 목록으로 꼽히는 펭귄 클래식에 포함된다면, 그리하여 특유의 검은색 하단 영역과 흰색 띠 위로 <어벤져스>의 영웅과 <엑스맨>의 초능력자들이 올라탄다면 어떤 분위기일까. 상상처럼 적었지만 이미 펼쳐진 일이다. 펭귄 클래식은 2022년 <블랙팬서>와 <캡틴 아메리카> 등을 시작으로 ‘펭귄 클래식 마블 컬렉션’을 펴내기 시작했고, 올해 앞서 언급한 작품들도 목록에 추가해 출시했다.

조금 더 가깝고 실감나는 상황을 그려보자. 세계문학전집에 마블 코믹스가 포함되고 한국문학전집에 김혜린·강경욱·신일숙·이현세·허영만 등이 더해진다면, 초반의 반가움과 어색함 사이에서 점차 벗어나 고전의 목록이 열리고 풍성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만화뿐 아니라 그간 고전의 범주에서 주목받지 못한 다양한 장르, 서사, 표현 방식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상황이 펼쳐질까. 고전이 꽉 닫혀야만 할 필연이 없듯 무조건 열리는 게 긍정적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터, 고전의 근거와 자격과 필요를 떠올려본다.

마블 코믹스의 사례는 물음과 마찬가지로 논의에도 도움이 되겠다. 펭귄 클래식 마블 컬렉션 편집자를 비롯한 유관 전문가들이 나눈 고전의 의미를 살펴보자. 다른 작품이나 문화에 영향을 미쳤고 여전히 파문을 일으키는 작품,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여러 세대에 걸쳐 그 매력이 지속되는 상황 등이 조건으로 꼽힌다. 더불어 고전의 지위는 다층적인 맥락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며 “1960년대 마블 코믹스는 밀턴의 <실낙원> 같은 전통적인 문학 고전과 비교”하기보다 “1930~194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영화와 비교”하는 게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당대의 화제와 영향력에 더해 오늘날 문화에까지 맞닿은 부분 그리고 “언어와 시각이 상호작용하는 장에서 펼쳐지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마블 코믹스의 셰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스를 잇는 고전의 흐름이 아니라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영화와 20세기 후반 팝 음악의 고전 목록과 가깝고 또 어울린다”는 말인데, 대체로 과거의 책으로만 한정해 고전의 목록을 구성해온 오랜 전통을 생각해보면, 이전과는 다른 고전 목록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목록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분야에서 오랜 기간 권위를 쌓고 영향력을 발휘한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에는 현대문학이 여전히 거의 없긴 하지만 한국문학 17권이 포함돼 있고 과학기술 분야도 11권이 담겨 있다. 카이스트와 포항공대의 권장도서 100선에는 예상처럼 과학기술 분야 도서가 서울대에 비해 두 배 이상 들어 있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도서도 다수라 대학생 입장에서 독서의 접근성과 가능성이 높아졌을 거라 예상한다. 여기에서도 마블 코믹스를 포함한 만화의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만화에서 새롭게 등장한 웹툰이 장르이자 문화 영역으로 자리 잡은 데다 시장 규모에서도 엄청난 성과를 내고 다양한 2차 저작물의 원천 텍스트로 활약하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요즘을 생각하면, 만화와 웹툰이 다양한 고전의 목록에 포함돼 세대와 시대를 넘나들고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꼭 고전이어야만 이런 일들이 가능한 건 아니지만 고전일 때 벌어지는 이야기는 분명 다를 터, 앞서 소개한 논의에서도 “단순히 중요한 작품이 아니라 ‘고전’으로 지정하는 것”의 특별함을 언급하는데, 알기만 하고 읽지도 않는다는 고전의 무용함을 한탄하기보다 고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게 모두에게 이로운 일 아닐까 싶다.

박태근 위즈덤하우스 편집본부장

박태근 위즈덤하우스 편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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