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 칼럼

‘수박’의 정치학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너 수박이지?”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1971년 대선 때 대학생들은 군사정권의 부정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참관인단을 만들어 활동했다. 참관인단으로 많은 부정선거를 목격한 나는 신민당을 방문해 부정선거를 여론화하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를 보이콧하라고 요구했다가 정당법·선거법 위반으로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로 보내졌다. 며칠 뒤 검찰청으로 불려가 만난 검사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내게 수박 타령을 했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하는 내게 그는 다시 물었다. “너, 빨갱이잖아?” 수박과 빨갱이가 무슨 관계인가? 당황해하는 내게 그가 설명해줬다. 전통적으로 검찰 등 공안기관들은 ‘공안사범’을 세 가지 과일로 분류해 왔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사과다. 사과는 겉은 빨갛지만 속은 희다는 점에서 좌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파인 사람이다. 두 번째는 토마토다. 겉도 속도 붉다는 점에서 일관된 좌파를 말한다. 세 번째가 수박이다. 수박은 겉은 푸른데 속은 붉다는 점에서 겉은 우파인 ‘자유주의자’ 같지만 사실은 좌파인 경우로 공안당국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다. 분단이 가져온 기이한 ‘과일의 정치학’이다.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수박의 정치학’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당론이나 ‘주류’ 다수파와 의견을 달리하는 소수파와 당내 비판세력은 민주당에 위장취업해 있는 ‘국민의힘의 프락치’인 수박이란 비판이다. 이는 오랫동안 사용해온 수박과는 정반대로 ‘위장한 보수’라는 의미다. 이렇게 된 것은 빨간색이 좌파를 상징하는 역사와 달리 국민의힘의 뿌리인 한나라당이 ‘차떼기·노무현 탄핵주도당’이란 부정적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2012년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당 색깔도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꿨고, 민주당도 당 색깔을 푸른색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겨난 수박론은 최근 이재명 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 가결과 관련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급기야 의원들을 ‘수박의 정도’로 분류한 ‘수박 당도 감별 사이트’까지 등장했다. 이 감별에서 당도 0으로 ‘최고의 친명’으로 평가된 정청래 수석최고위원은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며 체포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을 도려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군사독재가 저지른 ‘1971년의 만행’을 민주당이 재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1971년 민주당의 전신인 신민당이 제출한 내무부 장관 해임건의안이 여당인 공화당 일부 의원들의 찬성투표로 가결됐다. 격노한 박정희는 이를 주도한 것으로 의심되는 여당 중진 김성곤 의원 등을 중앙정보부로 끌고 가 콧수염을 뽑는 고문 등을 하고 정계에서 쫓아냈다. ‘정통 민주정당’을 자부해온 민주당이 유신세력처럼 막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대표가 스스로 불체포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체포동의안 부결을 당론으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의원이 ‘국민의 대표’로서 소속 정당의 의사와 상관없이 양심에 따라 투표하는 것을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데, 무기명 비밀투표에 대한 가결 투표자를 색출해 도려내겠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극렬 친명세력의 팬덤조직인 개딸(개혁의 딸)들로 구성된 ‘더불어민주당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비명계 의원들을 잡아다가 고문해 찬성투표를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도려내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체포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 덕분에 민주당이 ‘방탄 정당’이란 비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고, 법원이 이 대표의 구속영장 발부를 거부해 이 대표가 법원을 통해 어느 정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체포동의안에 찬성한 비명의원들이야말로 고름이 아니라 당의 발전에 기여한 ‘소금’이 아닌가? 이 지면에 쓴 ‘좌표찍기와 자유주의적 전체주의’(2022년 3월29일자)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다양성과 관용인데 민주당은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다양성을 말살하는 전체주의로 나가고 있다.

당을 전체주의로 이끌어가고 있는 ‘개딸’과 친명 강경파들이야말로 당을 망치고 국민의힘을 도와주는 ‘국민의힘 프락치’인 ‘진짜 수박들’ 아닌가? 아니 수박에 대한 개딸 식의 용법은 분단상황에서 오랫동안 사용돼 온 역사적 개념인 ‘수박에 대한 모독’이다. 민주당의 진짜 문제는 겉으론 민주당이란 ‘자유주의 우파’ 정당, 정확히 말해 ‘중도우파’ 정당에 속해 있지만 속은 ‘좌파’ 내지 ‘진짜 진보’인 ‘진정한 수박’ 의원이 없는 것이 아닌가? 수박, 만만세다! 수박이여 영원하라!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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