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속도 내는 ‘시행령 통치’, 입법권 형해화하는 행정독주다

정부가 13일 국무회의에서 외부 검증을 받아야 하는 보조금 사업 기준을 총액 3억원 이상에서 1억원 이상으로 낮추는 ‘보조금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정부가 일부 단체의 부정행위를 구실로 보조금 규모를 축소해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위축시키려 한다는 논란이 국회에서 불거졌지만, 모법이 아닌 시행령을 고쳐 밀어붙이는 것이다. 집권 2년차에 접어든 윤석열 정부가 ‘시행령 통치’로 빠져들고 있다.

대통령실이 지난 5일 KBS 수신료를 전기요금에서 분리징수하도록 방송통신위원회 등에 권고하자, 방통위는 14일 전체회의에서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보고 안건으로 상정하기로 했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방송법 개정은 어렵다고 보고, 올 하반기 시행령 개정을 마무리짓기 위해 서두르는 것이다. 정부는 또 집회·시위법 시행령을 고쳐 심야·새벽 시간의 집회·시위 제재를 강화하겠다고 예고했다. TV수신료 분리징수는 대통령실 홈페이지의 국민참여토론에서 97%가 찬성했다며 밀어붙였고, 집시법 개정은 다음달 3일까지 국민참여토론에 부쳤다. 국민참여토론은 중복투표가 가능해 제대로 된 여론을 반영할 수 없다는 비판에도 개의치 않는다. 대통령실이 요식절차로 의견을 수렴한 뒤, 시행령을 고치는 식으로 국회 입법 논의를 비켜가는 셈이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시행령 통치를 해왔다. 정부조직법 개정이 아닌 시행령을 고쳐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과 행정안전부 경찰국 설치를 강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국회의 입법권을 형해화·무력화한다는 지적에는 아예 귀를 닫은 행정 독주였다. 법무부는 검찰청법 시행령을 개정해 검찰의 수사 범위를 대폭 확대했지만, 지난 3월 헌법재판소에 제동이 걸렸다. 상위법 취지와 범위를 넘어선 무리한 시행령 질주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입법권은 국회에 있지만 시행령과 규칙을 만드는 것은 행정부의 권한이다. 역대 정부들도 중점 정책의 추진을 위해 시행령을 활용했다. 하지만 야당이 발목 잡는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시행령을 남발한다면 삼권분립 취지를 훼손할 수 있다. 특히 국민 기본권이나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면 시행령 개정으로 밀어붙여선 안 된다. TV수신료 징수 방식은 방송 공공성에 직결되고, 집회·시위의 자유는 헌법상 권리다. 윤석열 정부는 야당과의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는 정치와 국정으로 복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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