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가 R&D(연구·개발) 예산을 33년 만에 삭감한 초유의 사태에 과학기술계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카이스트 등 9개 대학 학생회가 삭감을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낸 데 이어 지난 5일엔 과학기술 분야 10개 단체들이 ‘국가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연대회의)’를 결성해 조직적인 반발에 나섰다. 실험실에서 연구에 매진해 온 과학자들이 정부 방침에 집단으로 반기를 든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연대회의 이어확 대표는 14일 과학자들이 뭉친 이유에 대해 “이렇게 가다간 한국이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라고 했다. 정부와 국회는 이들의 절박한 외침을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내년 예산안에서 주요 R&D 예산을 올해 대비 13.9% 삭감했다. 특히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예산은 20% 넘게 줄었다. 벌써부터 출연연의 계약직 연구원들에겐 “올해까지만 근무하고 나가달라”는 통지가 날아든다고 한다. 출연연과 대학 등에 있는 청년 연구자 수천명이 일자리를 잃을 판이다. 연구자들이 중도에 그만두면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연구의 연속성이 끊긴다. 박사급 인재 육성의 국내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인재 해외유출 사태로 번질 수 있다. 과학계에서는 ‘단군 이래 최대 기초과학 프로젝트’인 한국형 중이온 가속기가 내년에 6개월 이상 멈춰서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슈퍼컴퓨터가 멈추는 희대의 사태가 현실화될 것으로 본다.
기초연구는 성과가 느리고 사업화하기도 힘들지만, 이 부문의 축적 없이 한국이 과학기술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없다. 주요국들은 핵심 연구성과를 함부로 유출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번에 기초연구 예산을 깎는 대신 국제협력 예산을 올해 대비 3.5배나 늘렸다고 한다. 사전 준비 없이 예산만 늘려봐야 선진국 1류 연구자가 아닌 2·3류 연구자들에게 예산만 퍼줄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우려한다. 이대로라면 장기 대형 연구과제는 사라지고 ‘단기 성과위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위기감도 크다. 혁신이 ‘미래 먹거리’와 직결되는 제조업 중심국가에서 관련 예산을 삭감했으니 ‘한국이 망하게 생겼다’는 탄식이 나오는 것이다. 정치가 과학을 질식시키고 있다.
이번 R&D 예산 삭감은 윤석열 대통령의 ‘연구·개발 카르텔’ 한마디에 졸속 추진됐다. 심각한 부작용이 뻔한 예산 삭감이 현실화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재검토’ 목소리를 내야 한다. 대통령 서슬이 무서워 회피하다간 미래가 망가진다. 여야도 국회 예산심의 과정에서 비상한 경각심을 갖고 미래 먹거리를 지킬 해법을 찾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