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

조운찬 문화부장

“백 선생님 만나러 한번 안 오시나요?”

통일문제연구소의 채원희 간사로부터 휴대폰 문자 기별을 받고서 곧바로 백기완 선생을 찾았다. 지난 19일 서울 대학로에 자리한 통일문제연구소에도 청량한 가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담장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의 단풍이 곱다. 덩굴 사이에 벽시(壁詩) ‘이 눈물로 이기는 그날까지’가 쓰여 있다. 지난해 말 선생이 평택 쌍용자동차 투쟁현장을 방문했을 때 쓴 시다.

[아침을 열며]백기완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

선생은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원고를 쓰고 있었다. 검은 마고자 차림으로 가부좌를 튼 모습은 팔순의 노인이 아니다. 그는 집회나 강연이 없으면 읽고 쓰는 게 몸에 배었다. 안부를 물으니 “신문 잘 보고 있다”며 덕담으로 화답한다. 이때부터는 선생이 대화를 끌고 간다. 쌍용차 농성, 공무원노조 결성 소식, 1970년대 유신과 긴급조치, 장준하 선생과의 인연 등을 들려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날은 대선을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예전 같으면 대선 캠프에서 인사도 오곤 했지만, 요즘은 현장 노동자 이외에 찾는 이가 없어 “조용히” 지내신단다. 선생은 군사독재 이후 첫 직접 선거로 치른 1987년 대선에 민중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다. 선생은 올해 선거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결코 당선되어서는 안될 사람은 말할 가치도 없다. 문제는 나머지 두 후보다. 대통령을 하겠다 하면 역사적 책무가 무엇인지 알고 오늘의 과업을 짊어지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하는데, 그게 안 보여. 그 사람들에게는 왜 대통령에 출마하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 이것이 무슨 선거인가. 모두들 대통령이 되겠다는 욕망을 관철시키겠다는 것으로밖에 안보인다고.”

선생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말뜸(화두)이 경제민주화이고, 이것의 핵심이 노동자 문제인데 이게 전면에 부각되고 있지 못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작금의 선거판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다”고도 했다.

선생은 대선 얘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대신 노란 원고 봉투를 건네며 화제를 돌렸다. “66년간 마음속에 간직한 얘기를 최근에 완성했다네. 오랫동안 내 가슴에 박혀 있던 아픔이면서 풀어내지 못했던 짐이었다고 할까. 이를 작품으로 쓴 것은 처음이네. 이 자리가 첫 발표장인 셈이지. 읽어보고 눈물이 나면 한 줄 적어도 좋고, 그렇지 않으면 찢어버리게.”

선생이 젊은날 들었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하얀 종이배>는 1945~1946년 해방공간을 살았던 농사꾼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다. 북위 38도 경계선에서 사는 서글이는 아버지와 남편을 모두 일제 징용에 빼앗긴 채 살아가는 농촌 아낙이다. 그에게는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차돌이가 유일한 희망이자 즐거움이다. 어느날 뙈기밭 하나에 의지하며 사는 산골 아낙에게도 해방은 찾아든다. 그러나 그가 맞이한 해방의 실체는 뙈기밭에 박힌 ‘38선’이라는 나무팻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아낙이 영문으로 쓰인 ‘38선’ 표지판의 의미를 알 리가 없다. 서글이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팻말을 호미로 부수다 미군들에게 발각돼 윤간을 당한 뒤 숨을 거둔다.

고아가 된 차돌이는 먼 친척 아저씨집에 맡겨져 생활한다. 아저씨의 집은 38선 이북에 있어 차돌이는 38선을 넘어 등하교를 해야 한다. 38선이 획정된 이후 남북통행이 금지된 터라 차돌이는 야음을 틈타 학교를 가야 한다. 하루 몇 시간씩 군인들의 경계를 피해 산길을 걷는 차돌이는 어느날 초병의 총을 맞고 벼랑에서 떨어진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부상으로 며칠 동안 학교를 쉬어야 했다. 그렇다고 학교를 포기할 수는 없다. 차돌이는 강가로 나가 자신이 결석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하얀 종이배에 적어 남쪽의 친구에게 띄운다. 이때 다시 나타난 군인은 그에게 총을 겨눈다.

A4용지 53쪽 분량의 <하얀 종이배>는 중편이나 짧은 장편소설에 해당한다. 그러나 장르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분단의 경계선에서 살아가는 모자의 이야기가 눈물겹다. 38선의 나무팻말을 호미로 박살낸 서글이와 감시를 피해 사선을 넘나들며 학교를 다닌 차돌이는 어쩌면 최초로 분단과 싸운 민초들이다. <하얀 종이배>는 해방 전후 가난과 핍박 속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농투성이들의 삶도 오롯이 담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가슴 시리지만 동화처럼 아름답다. 분단과 민족의 아픔을 이토록 애절하게 형상화한 작품이 또 있을까.

대선을 앞두고 예순여섯 해 동안 가슴에 품어두었던 이야기를 탈고한 선생의 뜻을 헤아려본다. 선거가 두 달도 채 안 남았지만, 대선 주자들의 공약 가운데 분단 극복을 위한 청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통령과 여당은 북방한계선(NLL)을 쟁점으로 내세워 반북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을 뿐이다. 대선 때마다 등장하는 남북 편가르기, 분단 이데올로기이다. <하얀 종이배>는 분단마저도 정치도구화하는 정치권에 일침을 놓는다. 또 민족문제가 바로 이 땅의 노동자, 농민 문제와 무관치 않음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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