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상피제(相避制)

박래용 논설위원

소설 <춘향전>에서 장원급제한 이몽룡은 자신이 자랐던 남원에 암행어사로 부임한다. 그곳에서 몽룡은 탐관오리인 변 사또를 통쾌하게 징벌하고 애인 춘향이와 감격의 재회를 나눈다. 사춘기 청춘남녀의 사랑에 권선징악의 교훈을 담은 인기 고전이지만 주인공 이 도령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픽션이다.

[여적]상피제(相避制)

조선시대에는 상피제(相避制)가 엄격히 적용되어 출신지에 공직자를 파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더구나 종6품에 해당하는 암행어사에 초짜 급제자(종9품)를 내려보낼 리 없고, 암행어사 파견지도 부정을 차단하기 위해 제비뽑기로 정했다. <춘향전>의 배경인 조선 후기에 전국의 군현은 400여개였으므로 이 중 스무곳만 암행어사를 보낸다 하더라도 20분의 1의 확률이니 이몽룡이 남원으로 암행어사 출두하기는 애시당초 어려운 구조였다.

상피제는 지방관을 파견할 때 연고가 있는 곳에는 보내지 않는 제도로 송나라의 회피제(回避制)를 참고해 만들었다. 고려시대부터 실시되었으나 문벌귀족의 권력 개입으로 흐지부지되다 조선조에 이르러 엄격하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공무원의 연고지 배치는 장·단점이 있다. 연고지로 가면 지역 사정을 잘 알아 효율적인 업무가 가능한 반면 토호세력과 ‘연고’로 얽혀 공직자로서 본분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거꾸로 상피제 원칙에 따라 연고가 없는 곳으로 가면 토착세력에 휘말리지 않고 엄정하게 법집행을 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지역 실정에 어둡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과거 정권에는 뚜렷한 방침 없이 장관이나 청장의 철학에 따라 인사때 해당지역 출신을 배제하는 향피제(鄕避制)를 적용하기도 하고, 연고지 우선 배치를 권장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제 검찰·경찰·국세청 직원들의 연고지 근무 관행에 대해 “지금처럼 연고지인 고향으로 내려가면 토착비리 척결이란 개혁 과제를 손도 대지 못하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며 개선책 마련을 지시했다는 소식이다. 다른 부처가 아닌 사정기관의 경우 ‘끼리끼리’ 문화에 얽매이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볼 만하다는 생각이다. 비단 옷을 입고 의기양양하게 고향에 돌아오는 맛은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선공후사란 대의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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