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안네의 밀고자

최민영 논설위원
1940년 학교에서 공부 중인 ‘안네의 일기’ 주인공 안네 프랑크. 안네 프랑크 박물관

1940년 학교에서 공부 중인 ‘안네의 일기’ 주인공 안네 프랑크. 안네 프랑크 박물관

누가 은신처의 안네 프랑크 가족을 밀고했을까. 전직 미국 연방수사국(FBI) 요원이 중심이 된 전문 조사팀이 6년간의 조사 끝에 같은 유대인 출신의 공증인 아르놀트 판덴베르크가 밀고자라고 밝혔다. 유대인 조직의 일원으로 동족들의 비밀주소 목록 접근권을 가진 그가 정보를 나치에 넘겼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암스테르담의 한 건물에서 2년간 숨어지낸 과정을 기록해 나치의 잔혹성을 폭로한 <안네의 일기>. 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가던 일가족은 누군가의 밀고로 강제수용소로 잡혀가 아버지 오토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해방을 코앞에 둔 1945년 초였다.

그동안 거론된 용의자는 30여명으로, 가족과 가까운 인물일 것으로 짐작은 돼 왔다. 그런데도 판덴베르크가 밀고자로 거론되지 않은 배경이 있었다. 사실 오토는 1964년 판덴베르크가 밀고자라는 제보를 받았다. 하지만 <안네의 일기>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마당에, 동족에 의해 밀고돼 가족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반유대주의 정서가 확산될까봐 묻어둔 것으로 보인다. 입증할 추가 증거가 없는 점도 부담이었다. 가족을 잃게 만든 동족을 두둔하게 된 셈이다.

밀고는 은밀한 사정을 알 만큼 신뢰관계가 있어야 가능하다. 권력은 금전이나 신분의 상승 등 보상으로 밀고를 유도한다. 박탈을 매개로 한 강압도 있다. 판덴베르크에게는 가족의 생명이었다. 자기 가족의 강제수용소행을 막으려 프랑크 일가를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밀고는 전쟁과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냉전 초기 반미활동조사위원회의 이른바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도 밀고는 만연했다.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전설적 안무가 제롬 로빈스는 동성애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위협에 굴복해 동료들 이름을 댄 뒤 밀고자 멍에를 썼다.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엘리아 카잔 감독도 동료를 팔아넘긴 뒤 후회했다.

판덴베르크는 1950년 암으로 숨졌다. 로빈스는 예술계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카잔의 뛰어난 작품성은 빛이 바랬다. 안네의 밀고자를 추적한 영화감독은 말한다. “진짜 질문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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