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싼…김규항·이나영 '위안부' 지면 논쟁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가 경향신문 2월 2일자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더러운 여자는 없다>에 대한 반론을 보내왔다. 이 교수 반론과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글을 싣는다.

■이나영 교수의 반론 <지겹다, 위선적 ‘진보’ 지식인의 자기변명>

지난 2월2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김규항의 글, ‘더러운 여자는 없다’는 내용 면에서 오류투성이다. 배봉기 피해자와 기지촌 여성들의 소송을 예로 들면서 남성중심적 민족주의, 가부장적 순결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가 싶더니, 뜬금없이 박유하의 글 중 일부를 뚝 떼어 인용하고는 책 선전으로 마무리한다.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민족주의와 젠더에 관한 수많은 페미니스트 저작들에 무지하거나, 박유하를 옹호하면서 서명한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이거나. 심지어 비난을 피하기 위해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우리’라는 장치를 글 곳곳에 깔아 두었다. 비겁하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할 말이 많으나 지면이 한정돼 몇 가지 내용만 우선 지적하고자 한자. 첫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배경에는 여성운동의 역사가 있다. 사라진 동년배들의 보이지 않는 울음소리에 공명한 윤정옥 선생님의 오랜 고투와 이를 식민지와 분단국가, 여성 문제로 외연화하고자 한 이효재 선생님의 지원, 엄혹한 유신시절부터 기생관광 및 성매매 문제와 싸워 온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 노력이 뒷받침돼 마침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결성됐다.

둘째, 그러기에 배봉기씨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공명되지 않은 이유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들을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갖춘 ‘우리’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은 한동안 정조에 관한 죄였으며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낙인은 죽음을 불사할 정도였다. 김학순씨의 용감한 공개증언 이후에도 작은 사무실에 놓인 전화기에는 당사자를 모욕하고 활동가를 협박하는 한국 남자들의 목소리로 넘쳐났었다. ‘우리’의 굴절된 인식은 끈질긴 여성운동과 1994년에서야 제정된 성폭력특별법으로 조금씩 교정되기 시작했다.

셋째, 경험은 자명한 것이 아니다. 주체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구성된다. 그러기에 경험을 다르게 의미화할 수 있는 ‘우리’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다. 그간 많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은 식민지 조선이나 개발독재시대 여성들이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조건에 주목하고, 그들의 다양한 삶의 경험을 새롭게 해석해 대항적 역사담론으로 끌어올리고자 노력하면서, ‘우리’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고자 했다.

넷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기지촌 여성인권 단체들의 연대체인 기지촌인권연대(2012년)가 만들어지자, 피해 당사자들이 두 손 마주 잡고 만나는 역사가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당신들 잘못이 아니다, 국가의 책임이다”라며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들 간 상호 공감과 지지가 없었다면, ‘양갈보’라 손가락질 받던 이들이 공적 공간에 얼굴을 드러내고 수요시위 등에 참석해 연대발언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다섯째, 그러므로 ‘미군 위안부’들의 소송은 당사자가 사회적 편견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 용감한 첫걸음이자,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아스팔트길에 서서 사실 인정과 법적 배상을 외치며 찾고자 했던 역사적 정의와 맞닿아 있다. 사회적 유령에서 피해자이자 생존자로, 마침내 남성중심적 역사에 도전하는 증인이자 운동가로 스스로를 정체화해 왔던 여성들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이들의 힘겨운 투쟁을 통해 무지하고 비열하며, 비굴했던 ‘우리’는 비로소 그 ‘싸구려 정의’감이나마 가지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차가운 겨울날 평화로에 앉아 1시간만 수요시위에 참가해 보시라. 그게 어렵다면 조용한 낮, 소녀상 옆자리 빈 의자에 가만히 앉아 보시라. 두 손 불끈 쥐고 발꿈치를 땅에 닫지 못한 소녀의 뒤에, 가슴에 희망 나비 한 마리 품고 스러져가는 할머니 그림자를 응시해 보시라. 식민지 위안소의 생존자가 할머니가 되어서야, 아니 죽어서야 비로소 최소한의 공감능력을 가진 청중을 만난 심정을 느껴 보시라. 만일 울림이 있어, 단단한 가슴을 싸고 있는 껍질이 소리 내어 깨지는 순간이 오면, 터져 나오는 울음에 오장육부를 마음껏 적셔 보시라. 책상에 앉아 손가락으로 익힌 ‘우리’의 재주가 얼마나 얄팍한 것이며 기만적인 것인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필자는 미군 기지촌, 일본군 ‘위안부’, 반(反)성매매 관련 활동가이자 연구자이다. 김규항씨가 피상적으로 접했을 ‘미군 위안부’의 국가대상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후원자이자 법정 증인이기도 하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의 경향신문 2월 2일자 <[혁명은 안단테로]더러운 여자는 없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한 건 1991년 김학순 할머니(1924~1997)의 증언부터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의 첫 증언자는 김 할머니가 아니라 오키나와에 살던 배봉기 할머니(1914~1991)다. 배 할머니는 김 할머니보다 16년 먼저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언론에 밝힌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7살 때 식모로 팔려간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조선 각지와 만주 등을 떠돌던 그는 29살이 되던 1943년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다. 누워만 있어도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위안부 모집 업자의 꾐에 위안부가 된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말마저 잊은 채 살아가던 그가 증언을 결심한 이유는 일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였다(1972년 오키나와를 되찾은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조선인들에게 신고를 거쳐 특별 영주권을 준다).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자’인 그가 한국에서 잊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독재정권이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 했다는 것, 증언이 조총련계를 통해서였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위안부 운동이 본격화한 후에도, 파국적 한·일 위안부 협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현재까지도 그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는 데는 다른 정서적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배 할머니를 취재한 기사(한겨레 2015년 8월7일자)에 따르면 그는 위안부였음을 털어놓을 때 “유군가 마케타노가 구야시이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라고 거듭 말하곤 했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져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조국 해방’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고, 민족의식이 없었으며, 자신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다양한 사연과 삶의 배경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중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위안부상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좀 더 집중한다. ‘순결한 조선처녀’라 여겨지면 존중심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아예 눈감아 버린다.

위안부를 대상화하는 그런 위선적 태도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 사회에서 폭넓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위안부는 모두 강제로 끌려간 소녀였다’는 우리의 강변은 ‘위안부는 모두 자발적 매춘부였다’는 일본 우익의 강변과 쌍을 이루어왔다.

배봉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미군을 상대로 같은 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일본놈들의 만행’이 아니라, 가부장제 국가에서 언제나 여성에게 존재하는 폭력 구조의 일부다. 폭력 구조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도 남성 수용자를 위한 위안부가 존재했을 만큼 일반적이며 뿌리 깊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그러한 본질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2014년 6월 미군 위안부 122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이 위안부가 된 경로 역시 다양했다. 인신매매로 끌려온 소녀도 있고 가족에 의해 팔려온 사람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온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애국교육’을 하고 미군의 건강을 위해 성병관리를 하고 도망치면 경찰을 통해 잡아오기까지 했던 한국 정부는 그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 우리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와 그들을 동등하게 지지하거나 연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순결한 처녀들이 아니라 ‘양갈보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저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연대 요청을 거부하고 위안부 소녀상에 온전히 자신을 일치시키는 걸 비판하거나 사실 여부를 따지려 드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소녀상으로 단일화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알량한 역사의식과 지배체제로부터 주입된 민족의식과 전근대적 여성관을 위안부 소녀상을 내세워 은폐하려 드는 건 말이다.

“여성이 성을 파는 것은 자유의사에 의한 ‘자발적’인 일 같아 보여도,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여성이 국가와 남성에게 봉사하게 되어 있는 가부장제 구조 속의 일이다. 위안소가 ‘인정된’ 장소였고 ‘합법적’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법’이 국가와 군이 만든, 남성을 위한 ‘법’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자원’한 처녀들이었건,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들’이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는 박유하의 말이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을 더러운 여자들로 모욕하는 건 누구인가. 더러운 여자는 없다. 더러운 게 있다면 여성을 깨끗한 여자와 더러운 여자로 구분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폭력, 그에 기반을 둔 우리의 싸구려 정의일 것이다. (박유하의 책 <제국의 위안부>는 전문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http://parkyuh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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