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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웨이브

웨이브 오리지널 <사상검증구역:더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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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검증구역:더 커뮤니티>와 공공선택이론

4.10 총선이 범야권의 압승으로 막을 내렸다. 윤석열 정부가 밀어부친 고자산·대기업 감세와 재정지출축소, 무분별한 규제완화는 일단 제동이 걸리게 됐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기조는 ‘Anything but 문(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모두 반대)’에 가까웠다. 흔히 좌파와 우파로 구분되는 정치철학은 민주주의에서는 선거를 통해 결정된다.

‘권력을 이용해 자원을 분배하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 웨이브 오리지널 <사상검증구역:더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는 정치를 이렇게 정의한다. 그 권력을 행사하는 자가 리더다. 좋은 리더란 무엇이며, 시민들은 어떤 리더를 원할까. 정치 서바이벌 예능을 표방하는 <더 커뮤니티>는 이같은 질문을 던진다.

‘좋은’ 리더를 뽑아라

<더 커뮤니티>는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 등에서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진 13명의 남녀가 9일동안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과정을 관찰한다. 성향은 정치(좌파/우파), 젠더(페미니즘/이퀄리즘), 계급(서민/부유), 개방성(개방적/전통적)으로 나뉜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코드가 드러나면 중도 탈락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합종연횡이 필요하다.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상금을 가져간다. 13명 중에는 공동체를 뒤흔드는 익명의 불순분자가 있다.

구성원들은 불순분자에 대응하고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리더를 뽑는다. 모든 사람이 생존해 함께 상금을 챙겨나갈 것이냐, 아니면 살아남은 사람들이 능력껏 상금을 차지하도록 할 것이냐.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생존전략이 달라질 수 있다. 선출된 리더의 권한은 막강하다. 수익활동을 위한 노동할당과 공금축적을 위한 세율을 결정할 수 있다. 공금을 사용할 권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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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커뮤니티>에는 선출해야하는 하나의 공공역할이 더 있다. 기자다. 기자는 다른 구성원들을 대표해 커뮤니티센터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른바 ‘알권리’다. 단 무조건 공개할 의무는 없다. 기자는 정보의 공개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중요정보에 독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막강한 권한이다. 그가 독점한 정보는 때로 공동체에 큰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기자는 평화적이고, 정직하고 사심이 없는 인물을 뽑아야 한다. 지배권력(리더)과 유착이 되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과연 기자는 공동체의 이익만을 위해서 일할까. 기자로 선출된 닉네임 ‘낭자’는 혼자 독백한다. “뭘 믿고 나에게 기자를 맏긴거야. 나를 믿을 수 있어?”

공동체가 기자에게 물어보기를 요구한 첫 질문은 ‘오늘 불순분자가 열람한 코드의 대상이 누구인가요?’다. 불순분자가 특정인의 코드를 알고 있다면 그는 퇴출될 수 있다. 구성원들을 대표해 커뮤티니센터를 다녀온 기자. 하지만 무엇때문이지 입을 꾹 다문다. 그러고는 말한다. “엠바고를 걸겠습니다”. 엠바고란 일정기간 동안 보도를 유예하는 행위다.

그가 ‘엠바고’를 건 이유는

기자는 왜 첫질문부터 ‘엠바고’를 건 것일까. 그리고 그 엠바고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당일 불순분자가 조회한 코드의 대상자는 기자 자신이었다. 불순분자가 자신을 제거 1순위로 올려놨다는 말이다. 불순분자가 마음먹기에 따라 낭자는 언제든 탈락할 수 있다. 엠바고 선언으로 시간을 번 기자는 불순분자 찾기에 나선다. 동맹을 맺기 위해서다. 기자는 불순분자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여론을 조성해 주고, 불순분자는 확보한 기자의 코드를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둘다 퇴출되지 않는 ‘윈-윈’ 타협이 이뤄진 셈이다.

국민 개개인이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대한 정보를 자유롭게 얻을 수 있는 권리를 ‘알권리’라고 한다. 사회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언론에 상당한 알권리를 보장한다. 언론이 자신의 취재 중 얻은 정보를 개인의 영위를 위해서 써서는 안되는 이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언론은 때로 자신과 조직의 이익에 민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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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브 오리지널 <사상검증구역:더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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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선택이론’은 공공조직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정책결정을 한다고 밝힌다. 국가나 조직은 절대 이타적이지 않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이렇게 표출되는 것이 ‘조직논리’다. 국가나 조직은 인격이 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개인의 총합에 불과하다. 공무원이 된다고 갑자기 공공의 이익을 앞세우는 천사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 개인이 모여 만들어진 집단이 정부다. 그러니 정부도 당연히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가나 관료가 ‘공익’ 혹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정치경제적 결정을 내린다는 후생경제학의 관념과 배치된다.

공공선택이론은 조직이 이익집단의 로비나 뇌물에 취약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임스 뷰캐년 교수는 198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는 “정치가나 관료들도 때론 기업가처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한다”고 주장했다.

포퓰리즘도 공공선택이론으로 설명된다. 정치인은 공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거 승리를 위해 공약을 이용한다.

공공선택이론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함의는

권력 사유화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이 언론이다. 이것이 ‘김영란법’이 적용되는 이유다. 하지만 언론이 본분을 망각한 채 오히려 권력과 타협하거나 협조하면 ‘거악’이 탄생할 수 있다. 닉네임 슈퍼맨은 말한다.

“기자가 굉장히 큰 권력이고 리더도 굉장히 큰 권력인데 (한 사람이) 기자랑 리더랑 같이하면 권언유착이 되요. 리더는 기자를 하지 않는다는 룰을 정해서 분립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한국 사회가 갈 수록 극단적으로 갈리는 가운데 언론의 정파성도 종종 도마에 오른다. 그같은 정파성은 한국사회의 공동이익을 위한 것일까, 언론사의 사적 이해를 위한 것일까. 한국 언론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일까. <더 커뮤니티>는 한국언론에도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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