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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서구 시각서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선택적 거울’로 왜곡
■ 푸른 드레스를 입은 백작부인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이것은 예술이 던지는 궁극의 질문이다. 궁극의 아름다움에 도달하기 위한 예술가들이 행한 무수한 노력의 흔적이 예술사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1780~1867)의 ‘오송빌 백작부인의 초상화’는 이런 질문에 대한 화가의 응답이다. 그림 속 여인은 프랑스 낭만주의 문인인 스탈 부인의 외손녀이며, 본인도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의 전기를 썼던 전기 작가로 유명한 여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앵그르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초상화 자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녀의 업적에는 관심이 덜 갈 정도다. 이 그림은 우리를 두 번 놀라게 한다. 우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아름다움 때문에 한 번, 뜻하지 않은 반전 때문에 또 한 번.이 그림은 한 여인의 초상화를 넘어 신고전주의 예술의 본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인의 자세, 비... -
(27)흥분한 말 위에서도 흔들림 없는…그런 완벽한 존재는 ‘불가능’하다
■ 다시 영웅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다다비드라는 화가는 몰라도 ‘완전 정복’이라는 참고서와 표지에 나온 그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일개 참고서에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1769-1821)까지 등장하는 것은 학벌이 신분 상승의 도구인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이 그림의 원작자는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대표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다. 프랑스혁명(1789)을 목전에 둔 시점에 등장한 신고전주의(Neo-Classicisme)는 인간의 영웅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던 미술 사조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사랑의 꿈에 도취되어 흐느적거리던 로코코 미술을 비판하면서, 신고전주의 미술은 공적인 가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이제 회화는 간지러운 꿈의 유희가 아니라 의미 있는 예술이 되고자 했다. 의미 있는 예술이란 세대를 넘어서 전해지는 교훈이 담긴 작품이기에, 당연히 그... -
(26)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 비범함 “그냥 좋다”고 말할 수밖에
■ 한낱 꿈일지라도제 이름을 몇 번이나 불러도 아이는 돌아보지 않는다. 온 신경이 딴 곳에 가 있기 때문이다. 잘 갖추어 입은 옷, 발그레하게 상기된 뺨에 작고도 날렵한 18세기적인 코, 꼭 다문 입술을 하고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팽이다. 팽이는 중력의 법칙을 이겨내고 발레리나같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아이는 이 작은 기적, 작은 행복에 빠져 있고, 우리는 이 아이에 빠져든다. 차분하게 잘 정돈된 빛, 세련된 중간 색조는 이곳이 우아한 감각의 세계, 18세기의 공간이라고 말한다.얼마나 팽이가 돌아갈 수 있을까? 1분도 채 돌지 못할 것이다. 다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샤르댕이 그린 돌아가는 팽이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인셉션>(Inception)에서 환상적으로 재해석되었다. 돌아가는 팽이는 현실과 꿈의 세계를 가르는 지표가 되었다. 팽이가 어느 순간 멈추어 쓰러진다면 그것은 현실일 테고, 만... -
(25)영원하지 않아도, 가질 수 없어도…멈추지 않는 사랑의 꿈
■ 경박하고도 위대한 시대, 18세기“오! 다들 크게 입을 벌리고 웃었고, 사람들은 얼마나 유쾌했던가! 그 시대에는! 청춘은 한 다발의 화환이었지…시민은 꽃 같았고, 후작은 보석 같았어.”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의 외할아버지인 질 노르망은 18세기에 대한 긴 찬가를 늘어놓는다. 그는 혁명운동에 나선 외손자 마리우스를 비웃으며, 쓸데없이 정치에 휩싸이느니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18세기를 살아보지 않은 자는 진정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자격이 없었다. 이는 18세기에 살았던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겠지만, 로코코 회화가 보여주는 세상은 질 노르망의 견해와 일치한다. 18세기 로코코 화단은 바토, 부셰, 프라고나르, 그뢰즈, 샤르댕같이 부드럽고 감미로운 이름으로 채워진다. 진정 18세기는 질 노르망의 주장처럼 상류층 사람들에게는 열렬한 사랑만이 인생의 목적이었던, “경박하고도 위대... -
(24)악기 연주하고 편지 읊조리는 여성, 사랑을 들켜버렸다
■ 세속적 사랑의 노래18번째 생일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삼촌 찰리가 나타나면서 주인공 소녀 인디아의 삶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눈빛의 삼촌을 두고 인디아와 엄마는 이상한 신경전을 벌인다. 어느 날 인디아는 엄마와 삼촌이 나란히 피아노에 앉아 연주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연주는 농염한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암시였고, 그걸 본 그녀도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마침내 피아노 앞에 앉게 된 인디아와 찰리. 그들은 격정적인 연주를 시작한다. 연주 중반에 들어설 때쯤, 관객은 이것이 단순한 연주가 아니라 남녀의 뜨거운 사랑임을 저절로 알게 된다. 거친 호흡과 함께 끝나는 이 장면은 박찬욱 감독의 첫 헐리우드 진출작 <스토커>(2012)의 명장면 중 하나였다.악기의 연주가 에로틱한 사랑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점은 미술에서 역시 익숙한 주제다. 어느 미술관이나 17세기 그림이 걸려 있는 곳이라면 사랑... -
(23)완전하지 못해도 ‘인간’이면 충분…‘아름다움의 기준’을 바꾸다
“그 나이에 전공 바꾸면 공부를 하지도 못하고, 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아.” 이 말은 서른 넘어 전공을 바꿔 러시아에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한 내가 들었던 쓸데없는 슬픈 조언(?)이었다. 러시아어도 새로 배워야 했으니, 공부를 마칠 때면 나는 아무 쓸모없는 늙다리 석사가 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슴에 꽂히는 아픈 말이었지만, 나는 꼭 ‘무엇’이 되기보다, 그냥 ‘나 자신’이 되고 싶었다. 다만 그 길을 좀 늦게 발견한 것뿐이었다. 아무 희망이나 기대도 없이, 또 어떤 도움도 없이 미술사 공부를 무모하게 해나가던 그 시절, 그 겨울 추위 속에서도 나를 버티게 해준 것 중 하나가 ‘렘브란트’였다. 방학 때마다 찾아가서 만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미술관에 있던 ‘의자에 앉아 있는 나이든 여인’과 ‘돌아온 탕아’는 늘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조용한 침묵 속에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 많은 말이 맴돌지만,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그녀는 차라리 침묵을 선택한 듯했다. ... -
(22)자기 삶을 만들고 자기 삶을 사랑한, 낙천적인 시민들
■ 황금기의 황금 웃음뮤지엄에서 만나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 하를럼(Haarlem)은 행복한 도시처럼 보인다. 미국 뉴욕의 ‘할렘’에 이름을 빌려준 하를럼은 암스테르담의 별장지로 계획된 도시였다. 이 도시의 낙천적인 얼굴을 그린 화가가 프란스 할스(Frans Hals·1582~1666)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자경대들, 구호단체의 진지한 운영자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전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증한 시크한 표정의 상인, 격의 없이 웃음을 주고받는 부부, 매력적인 집시 소녀,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술꾼,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아이를 그의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의 자신감 넘치는 초상화도 그의 작업실에서 그려졌다. 할스의 그림 속 인물들은 자기 삶을 만들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시민들이다.네덜란드의 황금기는군주 통치 없이 국민 자발 참여로나라가 강소국으로 부상했고국민들이 웃던 시대... -
(21)세속 권력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관찰자가 그려낸 ‘인간의 가치’
여기 세 사람이 있다. 왕, 광대 그리고 성직자. 17세기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1599~1660)가 그린 이 인물들은 당시 신분이 얼마나 중요한 평가 기준인 사회였는지 보여준다. 성직자는 제1계급, 왕과 귀족이 제2계급, 광대는 피라미드의 최하층 천한 계급이었다. 벨라스케스는 궁정화가로서 크게 굴곡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궁정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 이상의 작품을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인간이 지닌 가치 자체였다. 츠베탄 토도로프는 “회화는 그려진 것에 대한 예찬”이라는 말로 미학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연결시켰는데, 그런 점에서 벨라스케스가 시대의 관습과 편견을 넘어섰다는 점을 먼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역사에 박제된 게 아닌, 우리와 함께 지금 숨 쉬고 있는 영원한 동시대인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이 탄생한 지 300여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시각이 전혀 낡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 -
(20)초대형견 머리에 손 얹은 미래의 왕…‘권력을 숭배하라’는 선전 이미지
■ 미술은 미디어다미술품은 특권적인 ‘미디어’이미지 정치로 활용한 찰스 1세마셜 매클루언은 미디어가 그 자체로 ‘메시지’이자 ‘마사지’라고 정의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형식이 메시지의 내용을 규정한다는 의미다. 둘째, 미디어가 “인간의 몸에 직접 작용해서 새로운 무의식을 형성”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미디어가 오랫동안 대중 계몽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 쌓았던 공신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내용에 대한 판단보다 전달하는 미디어에 대한 신뢰가 앞서는 현상이 나타난다. 특히 시각 중심의 미디어들은 감각적으로 흡수되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미디어보다 더 깊은 무의식을 형성한다. 어떤 정보든 어설프게나마 영상물로 제작되면 신뢰도는 급격히 높아진다. 또 미디어의 제작 접근성이 떨어질수록 신뢰도 역시 급격히 상승한다. 이것이 미디어 직접 제작에 미숙한 노년 세대들이 유튜브 가짜뉴스에 빠져드는 이유다. 미술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 -
(19)‘평화·화합’ 메시지 담아내며 유럽의 외교밀사로 환대받다
신화·현실 융합시키는 재능 지녀17세기 여러 군주들, 그에게 열광그림 통해 자연스럽게 외교 참여스페인의 필리페 4세, 프랑스 왕비 마리 드 메디치, 영국의 찰스 1세 등 17세기 절대왕정의 군주들이 루벤스(Pieter Paul Rubens·1577~1640)를 원했지만 그는 정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벨기에의 앤트워프에 머물렀다. 그들이 그에게 열광했던 이유는 현실과 신화를 융합시키는 놀라운 재능 때문이었다. 여러 군주들의 환대를 받았던 그는 자연스럽게 외교밀사가 되었고, 그의 그림은 군주들이 보내는 외교 메시지 역할을 했다. 다소 외골수였던 여느 예술가들과 달리 그는 세련된 궁정 매너에 익숙했고, 국제적인 교양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당시 약소국이었던 플랑드르 출신 루벤스가 주변 강대국의 드센 군주들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이런 성격과 재능, 그리고 스토아철학적인 태도 덕분이었다.■ 화가, 외교밀사가 되다루벤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