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난학, 일본인들에게 서양 생각과 물건의 가치를 일깨우다
오늘은 1774년 출판된 <해체신서(解體新書)>에 대해 말씀드리려 한다. 유럽 해부학책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어로 번역된 책이다. 이 책이 번역되면서부터 에도시대 일본인들은 한의학 외에 유럽 의학을 질병을 진단받고 치료받기 위한 선택지로서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해체신서>가 번역된 뒤로 반세기가량 지난 1823~1829년 사이에는 독일인 의사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1796~1866)가 나가사키와 에도를 오고 가며 의학을 비롯한 유럽의 최신 자연과학을 일본인들에게 가르쳤다.<해체신서>와 지볼트에 의해 난학(蘭學), 특히 난의학이 일본에 소개된 뒤, 일본인들은 일본과 중국에만 가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을 바꿔 유럽에도 가치 있는 것들이 있으며 심지어는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생각과 물건의 가치가 일본이나 중국 것보다 더 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8세기 일본에 ‘난학’... -
(8)‘조선통신사’ 실체 고민한 일본인…갈등 풀려다 양국 모두에 ‘미운털’
2017년 2월, 구마모토에 있었다. 한 해 전인 2016년 4월14일 발생한 지진에 따른 피해가 아직 수습되지 않은 구마모토 시내는 어수선했다. 1400년대 후반에 세워진 구마모토성도 2016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여러 차례 개증축된 성벽들 가운데, 1592~1598년 조선 침략 당시 선봉대를 이끈 가토 기요마사가 이 지역을 다스릴 때 건설한 부분만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 화제가 됐다. 가토 기요마사는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주로 인식되지만, 일본에서는 건설의 달인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무너진 구마모토 성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가토 기요마사 동상을 본 뒤, 구마모토 시내의 유명한 고서점인 ‘조분도카와시마서점(舒文堂河島書店)’에 들렀다. 고문헌이 일반적으로 온라인에서 거래되는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은 아직 오프라인에서의 고문헌 거래가 활발하다. 물론 일본에도 ‘니혼노후루혼야(日本の古本屋)’ 같은 고문헌 거래 사이트가 있어 ... -
(7)지배층보다 피지배층 역사에 주목…한국의 ‘민족주의’ 돌아보게 해
고문헌을 다루는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이제까지 세 번의 행운을 경험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조선에서 약탈해 간 <동국통감>을 에도시대 일본에서 새로 찍은 <신간 동국통감>의 판목(板木), 즉 책을 새긴 목판을 지금의 근무처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서고에서 발견한 것이 첫 번째다. 이 판목은 1919년 일본 교토에서 조선총독부로 기증된 뒤 행방이 묘연했었다. 임진왜란 후 부산 왜관을 통해 조선에서 유출된 <징비록>의 한문 본문을 세계에서 최초로 다른 언어로 번역한 책인 <통속 징비록>을 지난해 말 히로시마시립도서관에서 발견한 것이 두 번째다. 이 책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도심에 미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해서 도서관이 파괴된 뒤 사라진 것으로 생각돼왔다.세 번째 행운은 오늘 소개할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1928~2004) 선생의 <고문서 반납여행 - 전후 일본 사학사의 한 컷>(글항아리·201... -
(6)일제 패망·미군 점령…현대 일본이 겪는 ‘정체성 혼란’ 제대로 파헤쳐
오늘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혼동하는 분들도 많을 소설가 무라카미 류의 소설 세 편을 소개한다. 1994년 출판된 <5분 후의 세계(五分後の世界)·책표지 왼쪽>, 1996년 출판된 <휴가 바이러스 - 5분 후의 세계 2(ヒュウガ·ウイルス―五分後の世界 2)·가운데>, 2005년 출판된 <반도에서 나가라(半島を出よ)·오른쪽>다. 이들 소설은 1945년 8월15일 패전과 1952년 4월28일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탄생한 현대 일본이 지금껏 겪고 있는 정체성 혼란을 잘 그려내고 있다.무라카미 류가 태어난 1952년은 일본을 둘러싼 국제 관계가 큰 전환을 맞이한 해였다. 그해 1월18일에는 한국 이승만 대통령이 속칭 이승만 라인(Syngman Rhee line)을 설정하고 일본 어선을 나포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에 점령돼 있던 일본 시민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웃의 신생 독립국 대통령이 일본과의 합의 없이 일본 측에 불리한 정책을 시행... -
(5)한센인 수용이 일제의 만행이라면, 해방 후 그들을 학살한 것은 누구인가
오늘은 재일교포 한센병 환자(이 글에서는 앞으로 ‘한센인’이라고 표기한다)의 역사와 현황을 다룬 김귀분(金貴粉) 선생의 <재일조선인과 한센병(在日朝鮮人とハンセン病)>(크레인, 2019)을 소개한다. 홋카이도 하코다테에서 태어난 김귀분 선생은 현재 일본 국립한센병자료관에서 학예원으로 근무 중이다. 국립한센병자료관은 한국의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자리한 국립소록도병원의 한센병박물관에 해당하는 국립기관이다.김귀분은 패전 후 일본에서, 재일동포 한센인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뤘다순천교도소 소록도지소에는 ‘일제의 인권유린 현장’이라는 안내문이 책은 패전 후 일본에서 오랫동안 차별받아온 재일교포, 그중에서도 사회 일반에서 차별받는 존재인 한센인이라는 더욱 예민한 존재를 다루고 있다. 특히 더욱 차별받은 것이 여성 재일교포 한센인이겠으나, 이 책에서는 이 문제까지 파고들어가지는 않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한센병은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더욱 빈번하게 발생... -
(4)밀무역으로 미군 쇄국통치 무력화…오키나와 ‘지하경제’ 주무른 여인
오늘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제국 일본이 패한 뒤 미국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된 오키나와에 홀연히 나타나 밀무역 두목으로 이름을 날린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태평양전쟁 때 최남단 방어선 수십만명 희생…타이완 주민 학살·제주 4·3 등 ‘섬 주민 비극’ 닮은꼴1940~1950년대 오키나와는 일본군과 미군 간의 전쟁에 휘말렸고, 일본군 장병들이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바람에 10만~20만명의 섬 주민이 사망했다. 1947년 대륙의 국민당군이 3만여명의 타이완섬 주민을 학살한 2·28사건, 1947~1948년 좌익과 우익의 충돌로 수만명의 제주도 주민이 학살당한 4·3사건과 함께, 1940년대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제국주의시대가 냉전시대로 바뀌는 과정에서 동중국해 섬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한편 일본으로부터 오키나와를 분리해 직접 지배하기 시작한 미군도, 오키나와 주민들에 대해 냉담하기는 일본군과 마찬가지였다. 오키나... -
(3)“일본의 나폴레옹 나타나 막부 타도해야”…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모태’
1968년, 프랑스에서 5월 혁명 또는 68운동이라는 노동자·학생의 대투쟁이 발생했을 때, 일본에서도 이와 동시적으로 시민과 학생의 반정부 활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5월 혁명 당시의 주체들이 생각하고 주장한 것이 얼마나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비판할 여지가 있다. 또 그들이 주체가 돼 만들어낸 세상이 과연 그 앞 세대의 세상보다 더 좋아졌는지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5월 혁명의 가장 중요한 점은, 제1세계 시민들이 동시대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함께해 연대했다는 데에 있다.한편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은 이러한 동시대적 연대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었다. 1968년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 제1세계를 휩쓴 5월 혁명에 가장 근접한 움직임은 전태일 선생이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결성한 일이었다. 이렇듯 한국은 당시 제1세계의 흐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전태일과 청계천 피복 노동자들을 통해 가느다랗게 이어져... -
(2)나가사키에서 팔려나간 일본·조선인들…그리고 끝나지 않은 ‘거대한 비극’
오늘 소개할 책은 포르투갈·에스파냐 사람들이 온 지구의 바다를 석권하던 시기에 전 세계로 팔려나간 일본인·중국인·조선인 노예들의 실상을 밝힌 오카 미호코와 루시오 데 소자의 공저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 아시아, 신대륙, 유럽>(주오코론신샤, 2017·사진)이다. 책의 공저자 가운데 하나인 루시오 데 소자는 같은 테마를 <근세 일본의 포르투갈 노예 무역 - 상인, 예수회와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노예>(BRILL, 2018)로 출간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출신자들이 다루던 무역 물품 가운데 노예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이 시기의 노예 무역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는 일본인 노예 세 사람이 멕시코시티의 재판소에서 자신들 일생을 증언한 문서를 발굴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15세기 초, 이베리아 세력은 동아프리카의 모잠비크에서 인도의 고아, 동남아시아의... -
(1)길에서 탄광에서…지배집단에 짓밟힌 이들의 피맺힌 절규 “단결하라”
근대 일본 정부의 홋카이도 개척에 동원돼 길을 닦다 죽어간 죄수들…그들의 아픈 역사를 추적한 책‘죄수도로’라 불린 지옥 같은 곳에서 굶어죽거나 탈출하다 살해돼 ‘쇠사슬 무덤’에 잠든 사람들 일본 백정계급의 신분 해방 운동에 호응해 일어난 조선의 ‘형평사 운동’…연대의 뿌리는 깊다 탄광 노동자 추모비에 새겨진 ‘악수하는 손’은 말한다…지배층의 압박에 맞설 무기는 ‘단결’뿐이라고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국토건설단을 조직, 전국 곳곳의 도로·철도 공사 현장으로 내몬 박정희 세력 제주 ‘5·16도로’는 ‘죄수도로’의 판박이…일본은 ‘그들’을 추모하는데 우리는 왜 지우려고만 할까이 연재에서는 일본의 명저(名著)를 골라, 그 책에 담긴 일본의 중요 사건과 쟁점을 소개하려 한다. 연재 첫 회에 다룰 책은 고이케 기코(小池喜孝)의 <쇠사슬 무덤 - 자유민권과 죄수노동의 기록(鎖塚 - 自由民權と囚人勞動の記錄)>(岩波書店, 2018)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