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난학, 일본인들에게 서양 생각과 물건의 가치를 일깨우다

김시덕 | 문헌학자

마에노 료타쿠 등 번역 ‘해체신서’

독일 해부학자 요한 아담 쿨무스의 <해부도보>(1722)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온틀레드쿤디허 타펠렌(Ontleedkundige Tafelen)>. 1774년 일본에 최초로 번역·출판된 유럽 해부학 책인 <해체신서>는 이 책을 번역 원본으로 삼았다. 에도시대 난학을 공부하던 마에노 료타쿠 등이 <온트레드쿤디허 타펠렌> 속 삽화의 정확한 묘사에 감탄해 4년을 고군분투하며 번역했다.  위키커먼스

독일 해부학자 요한 아담 쿨무스의 <해부도보>(1722)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온틀레드쿤디허 타펠렌(Ontleedkundige Tafelen)>. 1774년 일본에 최초로 번역·출판된 유럽 해부학 책인 <해체신서>는 이 책을 번역 원본으로 삼았다. 에도시대 난학을 공부하던 마에노 료타쿠 등이 <온트레드쿤디허 타펠렌> 속 삽화의 정확한 묘사에 감탄해 4년을 고군분투하며 번역했다. 위키커먼스

오늘은 1774년 출판된 <해체신서(解體新書)>에 대해 말씀드리려 한다. 유럽 해부학책 가운데 처음으로 일본어로 번역된 책이다. 이 책이 번역되면서부터 에도시대 일본인들은 한의학 외에 유럽 의학을 질병을 진단받고 치료받기 위한 선택지로서 진지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해체신서>가 번역된 뒤로 반세기가량 지난 1823~1829년 사이에는 독일인 의사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1796~1866)가 나가사키와 에도를 오고 가며 의학을 비롯한 유럽의 최신 자연과학을 일본인들에게 가르쳤다.

<해체신서>와 지볼트에 의해 난학(蘭學), 특히 난의학이 일본에 소개된 뒤, 일본인들은 일본과 중국에만 가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을 바꿔 유럽에도 가치 있는 것들이 있으며 심지어는 유럽인들이 만들어낸 생각과 물건의 가치가 일본이나 중국 것보다 더 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8세기 일본에 ‘난학’이라 불리는 유럽 연구 풍조가 나타났다. 난학이란 화란(和蘭), 즉 네덜란드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네덜란드의 학술뿐 아니라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독일·영국·이탈리아 등 여러 유럽 국가의 학술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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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백수십년 동안 일본과 서구권 학자들은 <해체신서>의 번역 출판과 지볼트의 활동에서 난학이 탄생했고, 난학으로부터 일본의 이른바 ‘성공적인’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간주해 왔다. 그리고 난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한국에도 소개돼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보다 앞서서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 열강이 된 바탕에는 난학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분들을 최근 자주 접하고 있다. 나도 난학 특히 난방(蘭方) 의학, 즉 유럽식 의학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본이 처음 접한 유럽 학문은 난학이 아니라 이베리아반도의 에스파냐·포르투갈 학문이다. 이베리아반도 국가들과 일본의 국교가 단절된 뒤 새로이 소개된 유럽 학문인 난방 의학은 한방 의학을 배척하고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 한방 의학과 공존했다. 그리고 네덜란드뿐 아니라 러시아도 에도시대 일본에 큰 영향을 준 유럽 국가였다. 이렇게 난학의 가능성과 한계를 모두 살펴야, 에도시대와 그 후의 일본 사회에 미친 난학의 진정한 영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은 오늘의 주인공인 <해체신서>에 대해 알아보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해당 항목을 참고해 소개하자면, 독일인 해부학자인 요한 아담 쿨무스(Johann Adam Kulmus·1689~1745)가 1722년에 쓴 <해부도보(Anatomische Tabellen)>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온틀레드쿤디허 타펠렌(Ontleedkundige Tafelen)>이 <해체신서>의 번역 원본에 해당한다.

해부학책 <해체신서>를 번역한 에도시대 난학자 마에노 료타쿠, 스기타 겐파쿠(왼쪽부터)와 19세기초 러시아로부터 우두법을 배워 최초로 일본에 소개한 나카가와 고로지(오른쪽).  위키커먼스

해부학책 <해체신서>를 번역한 에도시대 난학자 마에노 료타쿠, 스기타 겐파쿠(왼쪽부터)와 19세기초 러시아로부터 우두법을 배워 최초로 일본에 소개한 나카가와 고로지(오른쪽). 위키커먼스

에도에서 난학 공부한 세 사람
1771년 사형수 시신 해부 참가
네덜란드어판 인체 묘사에 감탄
통역관·막부 의사 등 도움받아
4년 고군분투 끝에 번역 완료
“처방 일곱 여덟은 옛 의서에도”
한의학 배척 않고 난학과 공존

에도시대 일본의 정치적 수도였던 에도(오늘날의 도쿄)에서 난학을 공부하던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1723~1803),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1733~1817),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1739~1786) 등은 오늘날의 도쿄 아라카와(荒川)구 미나미센주(南千住)에 있던 고즈캇파라 처형장(小塚原刑場)에서 1771년 여성 사형수 시신 해부에 참가했다. 이들은 네덜란드어판 <온틀레드쿤디허 타펠렌>에 실린 삽화가 실제 인체 내부를 정확하게 묘사한 데에 감탄하고, 이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네덜란드어 사전도 없었고, 네덜란드어를 잘하는 통역관들은 이들의 거점인 에도가 아닌 규슈의 나가사키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거의 4년을 고군분투한 끝에 1774년 번역을 완료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책을 일본어가 아닌 한문으로 번역해 일본 사회에서 권위를 획득하려 했고, 스기타 겐파쿠는 임종 직전인 1815년 이 책의 탄생비화를 담은 <난학사시(蘭學事始)>를 남김으로써 자신들 작업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의 저명한 네덜란드어 통역관인 요시오 고규(吉雄耕牛·1724~1800)는 <해체신서>가 갖는 의의를 책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의학사를 연구하는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의 김성수 선생이 2014년 한길사에서 번역 출판한 <해체신서> 한국어판(사진)에서 요시오 고규의 글을 인용한다. 요시오 고규는 우선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유럽인들의 학문은 세상에서 가장 정교하고 치밀하며, 그들은 전 세계를 다니며 무역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기술에 정통하다. 그 사람들이 마음과 힘을 쓰고 지혜와 기교를 다하여 이룩한 분야에 동서고금을 통해 그들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없다. 그런 까닭에 위로는 천문과 의술에서부터 아래로 기계와 의복에 이르기까지 정묘하고 치밀하여,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스레 기발한 생각을 낳지 않는 적이 없다. 이에 배에 진기한 화물을 싣고 세계의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해와 달이 비추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 가운데 그들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네덜란드인이 변신(蘭化)”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네덜란드 학문 연구에 몰두한 마에노 료타쿠가 자신을 찾아와 교류를 청했고, 네덜란드인들이 도쿠가와 쇼군에게 문안인사를 하기 위해 에도에 올 때 동행한 자신을 마에노 료타쿠와 스기타 겐파쿠가 찾아와 <해체신서>의 서문을 청했다고 한다. 네덜란드학에 열성인 이들 팀이 번역한 <해체신서> 일본어판을 본 요시오 고규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우리나라에 저들이 온 지가 수백년이다. 당시의 학자도 셀 수 없이 많았지만, 학자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통역자들도 글을 짓는 데 서툴렀다. 이러한 까닭에 일찍이 조리 있게 이 학문을 세상에 펼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저 두 사람이 호걸스러운 자질과 학문에 대한 독실한 의지로써 마음과 몸, 지혜와 기교를 다하여 이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진실로 뜻이 있는 세상의 의사가 이 책으로 인하여 사람의 몸이 나서 자라는 것과 사람의 뼈가 있는 곳을 알고서는 의술을 펼칠 것이니, 위로는 왕후에서부터 아래로는 뭇사람에 이르기까지 생기(生氣)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요절하지 않고 그 천수를 누릴 것이다.”

요시오 고규의 말처럼 <해체신서>는 그 후 일본의 의학계, 나아가 일본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체신서>가 유럽 의학서 번역의 물꼬를 튼 이후 상당한 수의 의학서가 숱한 학자들의 고심 끝에 번역 출판되면서, 한의학과는 전혀 다른 자연관을 가진 네덜란드 의학 즉 난의학을 받아들인 의사들이 나타났다.

한방 의사들은 당연히 이러한 사조에 저항하고 난의 의사들을 비판했다. 18세기 중반 활동한 저명한 의사 나가토미 도쿠쇼안(永富獨嘯庵·1732~1766)은 “난의학에서 말하는 기이하고 독특하다는 처방 가운데 열의 일곱 여덟은 한방의 옛 의학서적에 이미 실려 있는 것이다. 신기하다고 해서 난의학에 구애받으면 안된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유럽의 의학서, 의학교육, 약물 등을 원활하게 전달받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기존 한의학이 처방하고 시술해 온 모든 분야를 난의학이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 의료제도 연구자인 우미하라 료(海原亮)는 에도시대의 난의학이란 결국 <해체신서>로 대표되는 ‘해부’, 그리고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한 ‘우두법’의 두 가지를 가리킨다고 지적한다(<에도시대의 의사수업(江戶時代の醫師修業)>, 요시카와코분칸, 209쪽).

에스파냐·포르투갈학 먼저 전파
러시아도 큰 영향 미친 유럽국
난학 일반에 스며든 건 19세기
의학서·자연과학서 번역으로
에도시대 근대화 시작 간주는
현실성 떨어지는 과도한 평가
선입견 뛰어넘어 난학 살펴야

또한 유럽 의학을 전후하여 일본에 소개된 자연과학, 지리학 등을 가리키는 난학이 기존 중국학이나 일본의 전통적인 지식 체계와는 전혀 다른 학문으로서 일본 상층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이 소개된다고 해서 순식간에 사회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Robert C. Allen)이 말하듯이, 17세기 시작된 과학혁명은 “종교와 자연에 관한 상류층의 생각을 새로이 변화시켰”지만 “마법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계속되었”고, “대중문화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뉴턴의 <프린키피아>보다 사회의 변화였다. 가장 강력한 변화는 도시화와 상업의 발전이었다. 이로써 읽고 쓰는 능력과 계산력이 더욱 중요해져 대중의 지식이 발전했다”(<세계 경제사(Global Economic History: A Very Short Introduction)>, 이강국 번역, 교유서가, 48~49쪽).

유럽에서도 이랬을진대 <해체신서>를 비롯한 몇 권의 유럽 의학서와 자연과학서가 일본어로 번역됐다고 해서 에도시대 일본이 그로부터 급격하게 근대를 향해 질주했다는 식의 이미지를 갖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다. 일본에서 난학의 원리가 사회 일반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19세기 전기, 특히 1840년대부터로 보이며, 이때가 되면 최소한 우두법은 한의학보다 난의학이 낫다는 생각이 일반에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 지적할 부분은 우두법이 일본에 소개된 과정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영국인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1749~1823)의 우두법이 마카오·인도네시아 등을 거쳐 1840년대에 나가사키로 전래된 것을 최초의 우두법 소개라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실은 나카가와 고로지(中川五郞治·1768~1848)라는 일본 북쪽 아오모리 출신자가 러시아에서 우두법을 배워온 것이 최초다.

1807년 러시아 해군의 흐보스토프·다비도프가 쿠릴열도 남부의 일본인 근거지를 공격했을 때 나카가와는 납치돼 시베리아에 억류됐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812년 풀려날 때 나카가와는 러시아인 의사로부터 우두법을 배우고 러시아어로 된 우두법 책을 가지고 왔다. 이리하여 전래된 러시아식 우두법의 효용이 멀리 남쪽 교토·오사카 등지까지 전해지면서, 네덜란드를 통해 우두법을 수입해야겠다는 기운이 이들 지역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19세기가 되면 일본에는 난학으로 상징되는 서유럽 학문뿐 아니라, 러시아라고 하는 또 하나의 유럽 국가에서 행해지고 있는 학문의 존재와 그 유용성이 알려지게 된다.

마에노 료타쿠, 스기타 겐파쿠 등과 함께 <해체신서>를 번역한 막부 소속 의사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1751~1809)는 일본 사회에서 흔히 난학자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1782년 태평양에서 표류하다가 알래스카에 표착한 뒤 러시아인들에게 구조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1792년 일본으로 귀국한 선장 다이코쿠야 고다유(大黑屋光太夫·1751~1828)의 러시아 체험기를 정리하여 1794년 <북사문략>이라는 책을 집필하는 등 그는 일본 역사상 초기에 활동한 러시아학 연구자로서의 위상도 지니고 있다. 가쓰라가와 호슈뿐 아니라 2016년 7월8일자 경향신문 ‘바바 사주로, 에도시대 일본이 낳은 천재’에서 소개한 바 있는 바바 사주로(馬場佐十郞·1787~1822) 등도 난학자이자 동시에 러시아학 연구자이기도 했다.

18~19세기 몇몇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난학자·러시아학자라는 양면적 성격을 무시하고 이들을 모두 난학자, 즉 서유럽학 연구자로만 이해하는 것은, 러시아에 대한 서구권 및 일본의 선입견, 그리고 냉전 시절 소련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편견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선입견과 편견을 뛰어넘어 냉정하게 에도시대 난학, 특히 난의학을 파악해야 16세기 중반 이베리아반도의 에스파냐·포르투갈 출신자들과 만나면서 중화주의(中華主義)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뒤 메이지 유신 이후 비(非)서구권 지역에서 유일하게 제국주의 열강 반열에 올랐다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한 지난 수백년간 일본의 역사적 경험을 진정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필자 김시덕

[김시덕의 명저로 읽는 일본의 쟁점](9)난학, 일본인들에게 서양 생각과 물건의 가치를 일깨우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문헌학자이자 인문저술가이다. 2010년 일본에서 간행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가사마쇼인)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2011년 2인 공저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가사마쇼인)은 일본 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됐다. 10여종의 단행본, 공저, 번역서 등을 출간했다.


< 시리즈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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