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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작게 더 좁게…불편함 속에서 양보와 겸손이 몸에 밸 수 있도록
자본이 없는 곳에 손길을 내민 건축가 이일훈, 그는 건물을 여러 채로 나눠 얇게 만드는 ‘채 나눔’을 기본으로 삼았다대표작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대지에 비해 협소한 면적, 서로 양보하지 않을 수 없는 더 좁은 복도가 특징이다‘커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작을수록 나누어야 한다’던 그의 주장은 수도자 같았던 그의 삶과 닮았다건축의 역사에는 권력과 자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축사는 지배 계급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동기와 열정이 만들어낸 기념비적 건축물 중심으로 서술된다. 건축이 다른 어떤 물건보다 돈과 노동이 들기 때문이고, 법과 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산물인 것도 한 이유다.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이제 시대착오적이기는 하지만 문학, 음악, 미술 등에서는 대중음악, 장르문학처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구분하는 것이 통용되곤 한다. 그러나 건축은 고급건축과 대중건축의 구분선보다 합법건축과 불법건축, 건축과 건물을 가르는 기준이 더 ... -
(11)경험한 적 없어도 그리운 과거…21세기, 폐허에 탐닉하다
효율·기능·진보의 상징에서 잔해·덧없음의 현장이 된 버려진 공장들, 인기 장소로 부상스위스 출신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미국의 공장 건축을 찬양했다. 효율성과 기능만을 고려해 어떠한 장식도 없이 매끈한 외벽을 지닌 거대한 자동차 공장이야말로 현대성 자체라는 것이었다. 현대건축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서 <건축을 향하여>에서 그는 유럽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질타하며 미국의 공장 건물이 선사하는 순수한 기하학의 즐거움을 높이 평가했다. 100년이 꼬박 지난 지금 디트로이트 자동차산업의 몰락과 함께 이 공장들은 폐허로 변해 있다. 버려진 공장들은 최근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르코르뷔지에와는 전혀 다른 이유였다. 효율과 기능, 진보의 상징이 아니라 잔해, 폐허, 덧없음의 현장이었다. 요철 없이 미끈했던 유리와 외벽, 쉼 없이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며 자동차를 생산하던 때에 산업시설의 공간에 눈길을 던지는 이들은 없었다. 소... -
(10)이 매끈한 곡선 위에 서울의 역사는 들러붙을 수 없었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빚은 ‘건물+관광+도시재생+미술’ 이미지DDP는 서울이 그 열망의 대열에 합류한 결과물1997년 스페인 빌바오에 문을 연 구겐하임 미술관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스페인 북동부 바스크 지역의 거점인 빌바오는 공업 및 무역 도시였다. 철강 및 조선업이 쇠락하면서 침체되었던 도시의 활력은 구겐하임 미술관 개관과 함께 되살아났다. 전시장과 공연장이야 사람들을 유인하는 오랜 수단이었지만, 미국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빌바오만큼 도시의 인지도와 경제를 극적으로 바꾼 경우는 없었다. 개관 후 첫 3년 동안 400만명의 관광객과 6000억원이 넘는 수입을 도시에 안겨주었다.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바스크 지역의 움직임이나 유럽 조선업의 몰락을 소개하는 기사에서나 언급되곤 하던 빌바오를 이제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여러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된 구겐하임 빌바오의 매끈하고 번쩍이는 표면, 이전에 본 적 없는 파격적인 형태는 사람들의 관... -
(9)옛 흔적 남겨야만 ‘도시재생’일까?…쓰임에 집중한 공간 창조 시도
명문학교 과외방·골목식당 등 100여년 역사와 풍경 고스란히 간직한 서울 돈의문박물관마을은완전히 새로 지어졌으나 영화세트장처럼 보여전시관 빼면 ‘기능’ 갖고 있는 곳 찾아볼 수 없어지난 10년 건축과 도시 분야의 정언 명령은 “기억하고 보존하라”였다. 개인의 기록에서 정부의 정책에 이르기까지 옛 자취를 없애지 않고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문화재에 가까운 유서 깊은 건축물뿐만 아니라 아파트, 빌라, 오래된 가게 같은 추억이 서려 있는 곳에서 공장, 산업시설 같은 시대를 증언하는 장소까지, 잊으면 안 되는 리스트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1970~8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단지들이 하나둘 재건축되자,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자발적으로 유년기의 배경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몇몇 건축가들은 다세대·다가구 주민들이 편의를 위해 임시방편으로 증축하고 고친 흔적들을 조사했다. 서울시를 비롯한 지방정부는 전면 재개발 대신 ‘재생’으로 정책의 물꼬를 ... -
(8)골목·자본의 만남 ‘쌈지길’…상업공간서 이뤄진 ‘보존·소통의 실험’
수십년간 서울을 비롯해 전국 도시의 땅은 쉴 새 없이 뒤엎어졌다. 도심재개발, 신도시 건설, 재개발과 재건축 등 이름은 달랐지만 각종 건설 사업은 결국 기존 흔적을 지우고 백지로 만든 뒤 건물을 올리는 것이었다. 간척지, 산, 논밭, 주거지 등 자연과 삶의 자취는 중장비 앞에서 사라져갔다. 거의 모두가 극적으로 달라진 모습을 발전의 증거라고 믿었다. 지방과 서울, 상계동과 을지로를 가리지 않고 수용권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재개발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때는 1987년 민주화 이후다. 1990년 30대 젊은 건축인들은 전면 철거 대신 소단위로 사업을 진행하고, 원거주자를 쫓아내지 않는 재개발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1991년 서울 가회동 일대가 한옥지구에서 해제되어 개발된다는 소문이 무성하자, 40대 건축가들이 지역주민들과 함께 보존과 전면 재개발 사이의 가능성을 찾기도 했다. 빈 서판을 만들 듯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개... -
(7)‘주거 혁명’ 이후 반세기…우린 여전히 ‘마포아파트 체제’에 산다
군사정변 이후 5개월 남짓 지난 1961년 11월1일 개막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최고 영예인 대통령상은 건축부에 돌아갔다. 수상자는 육군 이병으로 복무 중이던 강석원과 설영조였고, 작품은 ‘육군 훈련소 계획’이었다. 현역병이 설계한 훈련소가 당대 최고의 예술행사 중 하나였던 국전에서 가장 탁월한 성과로 선정된 것은 국가 권력기구 전체가 군인의 손에 들어간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결과였다. 건축이 국전에 참여한 1955년 이래 대통령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군사정권은 국전을 자신들이 펼칠 사업을 소개하는 자리로 적극 활용했다. KBS가 첫 전파를 송출하기도 전인 1961년 가을, 최대의 전시 국전은 군부가 펼칠 사업을 홍보하고 선전하기에 대단히 유용하고 중요한 장이었다.건축부의 다른 출품작인 강명구의 ‘마포에 건설 중인 주택영단 아파트’ 역시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1세대 현대 건축가 중 한 명인 강명구는 당시 대한주택영단 주택... -
(6)오늘 서울에서, 건축의 ‘아름다움’으로 자본을 이길 수 있을까
최적의 자본분배가 도시의 과제가 되며 많은 현대 건축물이 철거의 운명 못 피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건축가이자 이론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1450년에 출간한 <건축론> 6권에서 건축 작품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름다움”이라고 말했다.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문조차 여러 차례 도시에서 쫓겨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불안했기에, 공들여 지은 건축물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적마저도 탄복하게 만드는 탁월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최고의 방비책이라는 것이다. 이때 아름다움은 부분과 전체의 완벽한 조화, 무엇 하나 더하고 뺄 것 없는 상태를 말한다. 수많은 전쟁과 풍화를 견뎌낸 르네상스 건축물들은 이 전략의 유효성을 입증해준다. 그렇다면 현대 건축은 어떨까?21세기도 20년이 지난 지금, 20세기의 현대 건축은 늙기 시작한 지 오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현대 건축물이 철거되고 있고 몇몇 예외적인 건물만이 리... -
(5)포스트모던 철골, 민중을 상징하라
군사정권이 말하는 ‘민족’과 다른 ‘민중’을 어떻게 건물로 드러낼까 한겨레신문사 사옥 설계의 시작점건축은 권력 친화적이다. 엄청난 자본과 노동력이 필요한 건축의 숙명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건축의 역사는 지배 권력층과 종교 집단 건축물의 연대기와 엇비슷하다. 20세기 한국도 마찬가지다. 정부청사, 미술관, 박물관, 극장은 물론이고 아파트, 공장 등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최대의 클라이언트였다. 건축을 국가의 개발 정책과 떼어 놓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1960년대부터 길게 이어진 군사정권 및 고도성장 시기에 권력을 통해 건축은 (또는 건축을 통해 권력은) 쉼 없이 ‘국민’을 호명했다. 그 국민은 한국이 유구한 역사를 지녔음을 인식하고, 국난 극복과 민족 중흥의 소명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깨달아,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는 ‘국민’이었다.한편 군사독재를 끝내기 위한 1980년대의 여러 ‘운동’은 국민의 자리에 다른 주체를 세우... -
(4)권력의 상징일까, 추모 장소일까…저마다 다르게 읽혀질 ‘존재의 의미’
5·16쿠데타와 12·12사태 중심지인 육군본부 터에 지어진 ‘전쟁기념관’ 서구 고전주의를 모티브로 삼고 좌우대칭·축의 설정을 강조한 형태 한동안 건축은 말을 해야 했다. 바깥에 있는 이념이나 대상을 재현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진단, 건물은 우선 기능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접근은, 건축이 민족과 국가를 대변해야 한다는 요구 앞에서 힘을 잃었다. 개발과 독재가 뒤엉킨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일련의 국가 프로젝트들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 정체성을 반복해서 되뇌어야 했다. 건축계에서는 이를 한국성 또는 전통 논쟁이라 부르곤 한다. 동시에, 서울의 확장에 따라 여의도나 강남처럼 새롭게 개발된 시가지 상업지구에서는 최신 유행과 간판을 앞세운 상업 건축물이 빈 땅을 채워갔다. 말하자면 건축은 국가와 자본의 복화술사가 되어갔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한국 사회의 변환기를 맞아 건축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 -
(3)옛것 그대로 쏙…조율 없는 파격, 쿨하게 툭 ‘K감성’ 포인트가 되다
한옥은 한옥대로 현대는 현대대로…‘본모습 변형 없이 공존’시켜 보려는 고민‘맞배지붕을 한 4칸짜리 한옥’ 콘크리트에 끼워넣은 전주시청사에 고스란히 드러나설계자 김기웅의 ‘포스트모더니즘 실험’ 파격 시도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후계자는 없어최근 ‘한옥의 형태’ 리조트 외벽에 박힌 모습 등 한국적 느낌 내는 장치로 도처에 등장한옥은 지난 세기 건축가와 역사가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한옥과 양옥은 함께 태어나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한옥은 한국적인 것과 전통을 담고 있는 물건 중 가장 큰 크기로 전국의 도시에 숱하게 남아 있었다. 건축가들은 새로이 조성된 부지에서 한옥이라는 가상의 상대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속이나 도시 외곽에 세워지기 일쑤였던 미술관, 박물관, 공연장 등도 예외 없이 기와지붕과 씨름을 벌였다. 건물의 성공 여부는 한옥의 이미지를 단박에 불러낼 수 있는지에 달렸다. 이와 정반대로 좁은 골목길에서 한옥은 극복의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