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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해양중국은 애국주의 중화가 아닌 다국적 상인·이민노동자들이 만들어냈다
<조석도(潮汐圖)>린자오(林棹)홍콩의 오래된 거리 셩완(上環)에는 지금도 샥스핀이나 제비집 같은 물건을 거래하는 약재상과 건어물 가게가 많다. 예전 화인 무역상들이 남북의 물건을 교역하던 ‘남박홍/난베이항(南北行)’의 흔적이다. 여기서 북은 광둥성 북쪽의 중국을 의미하고, 남은 동남아시아를 칭하는 난양(南洋) 등을 의미한다. 장강이나 화이허(淮河)를 경계로 하는 대륙의 “남북방 개념”은 푸젠, 광둥, 광시, 하이난, 타이완의 항구들을 점으로 이으며 남진하고 서진하는 ‘남방해양중국’과는 무관하다.올해 중국 신예작가들의 등용문 ‘이상국(理想國) 문학상’은 광둥 출신 80허우 여성 작가 린자오에게 돌아갔다.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 <조석도>의 주인공은 19세기 중반 광저우, 마카우, 런던에 살았던 허구적 존재 ‘거인 개구리’이다. 돼지만큼 큰 이 개구리는 삼켜 먹는 방식으로 사물을 인지한다. 탄카(tanka)라 불리는 주강(珠江)의 보... -
농촌과 도시, 대립이 아닌 상생의 파트너가 될 수 있을까
<촌스럽지 않은 촌살이(土里不土氣)>글 큰뿔영양(長角羚, 자연학교에서 부르는 별칭)모기앵앵(蚊滋滋)·그림 모기앵앵중국 최초의 도시 청년 귀농기라 할 만한 <촌스럽지 않은 촌살이(土里)>에서 리(里)는 마을사람들이 땔감과 식량 등을 얻는 부근의 산을 뜻하는 일본말 사토야마(里山)에서 따온 제목이다. 도시도 야생도 아닌 문명과 자연이 어우러져 사는 공간을 의미한다. 생물학을 전공하고 노르웨이에서 서로 알게 된 베이징 출신의 ‘80허우’ 중국인 유학생 부부는 귀국해서 환경 NGO의 활동가가 됐다. 퇴직 후 근교로 귀촌해 자급자족 생활을 주제로 아이들에게 생태교육을 하는 ‘가이아 자연학교’를 열었다. 7년간의 시골살이를 예쁜 삽화, 사진과 함께 정리했다. 시골 생활에 필요한 기능, 주위의 동식물, 마을의 이웃들, 주위에서 얻기 쉬운 재료로 만든 ‘샤방’한 요리 레시피까지 알차게 담았다.중국에서 도시로 나왔다가 농촌으로 돌아간 ‘반향(... -
청동기부터 이어진 생업의 기술···경쟁을 넘어, 널리 삶을 이롭게 하다
<바이궁(百工)>줘징(左靖) 엮음“중국 업체와의 경쟁이요? 저도 답이 없죠.” 경남지역의 용접노동자 출신 작가 천현우씨의 <쇳밥일지> 북토크를 우연히 유튜브로 보고 청년 세대 혐중 감정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먹고사는 문제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어떻게 다시 대중 무역흑자로 돌아서냐고요?” 노동자인 동시에 개미투자자인 청년들이 즐겨 본다는 <삼프로TV>에 나오는 중국 전문가들도 구체적인 답을 청하면 말문이 막힌다. 고부가가치 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중국 제조 2025’는 코앞의 현실이고 애국주의 정서에 힘입은 자국 제품 선호를 뜻하는 궈차오(國潮)가 중국의 젊은 소비자들을 사로잡고 있다.가성비 좋은 노동력을 좇아 끊임없이 유동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덕을 본 것도 사실이고, 세계 최대의 국내 시장도 상수이다. 하지만 불... -
제갈량의 ‘공정’과 마속의 ‘억울함’ 사이
<조연삼국지(三國配角演義)>마보융(馬伯庸)윤석열 대통령은 후보자로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하던 날 “제 주변의 부패도 읍참마속 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그의 당선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2030세대는 과연 이 사자성어의 의미를 알아들었을까? <삼국지>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제갈량이 가정 전투에서 군령을 어기고 경솔한 작전을 펼쳐 북벌의 실패를 자초한 ‘최애’ 부하 마속을 눈물을 머금고 참수했다는 이야기를 모를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인터넷 작가로 출발해 역사 미스터리, SF, 판타지 등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뛰어난 입담을 선보여 귀재로 불리는 마보융은 <조연삼국지>라는 연작소설에서 이와는 또 다른 결말을 선보인다. 마속이 친구로 여기던 정적의 음모에 빠져 패장의 누명을 쓰게 됐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가 훗날 복수에 성공한다는 이야기다. 역사서 <삼국지>에는 그가 도망쳤다거나 옥사했... -
20세기 초 청두 거리 600여개의 찻집들, 당대의 ‘SNS 혁명’이 시작된 곳
<그 길가 구석 찻집(那間街角的茶舖)> 왕디(王笛)마라훠궈나 판다로 연상되는 쓰촨성 청두(成都)는 사실 중국을 대표하는 ‘슬로시티’이다. 촉(蜀)의 수도이기도 했던 이 지역은 천혜의 요새이면서 비옥한 청두평원 덕에 2000년간 장강 상류의 문화와 상업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내륙 깊숙한 곳이라 하류의 동남 연안 도시들로부터 서방문물 전파는 다소 늦었지만, 거리의 찻집을 중심으로 1949년 공산 중국이 수립되기 전 50년간 중국 전통의 독특한 도시공동체와 공공공간 문화를 창조했다.길목과 사원, 공원마다 존재하던 600여개가 넘는 찻집은 걸인부터 문인과 부유한 상인들을 포함한 다양한 배경과 계급을 가진 이들이 모여 드는 장소였다. 중일전쟁 발발 전에는 매일 성내 인구의 4분의 1인 10만명이 이곳을 찾았다. 후방의 중심이 돼 각지의 피란민이 몰려온 후에는 이 숫자가 12만명에 이르렀다. 단칸방살이 외지 출신 노동자들에게는 이른 아침... -
훠궈·마라탕 같은 ‘매운맛’ 중국은 불과 30여년···중국 식문화의 ‘보수성과 개방성’
<중국의 고추 식문화 역사(中國食辣史)>차오위(曹雨)<중국의 고추 식문화 역사>라는 ‘대륙책’의 대만 출간이 최근 작은 소동을 불러일으켰다. 출판사가 에디터의 ‘모두 바꾸기’ 기능을 이용해 ‘대륙’이란 표현을 ‘중국’이라 치환하고 인쇄했는데, “콜럼버스가 발견한 신중국”이라는 문장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화권에서 대륙이란 표현이 곧 중국을 의미하는 관행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어떤 기호의 의미와 물자의 용도 치환은 중국인들이 처음 고추를 받아들였던 명나라 시절에도 벌어졌던 일이다. 17세기 항저우의 부유한 상인들은 빨간색 고추를 자신의 정원에서 이국풍 관상식물로 키웠다. 고추를 향신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 창장(長江·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간 대륙의 반대편 서쪽 산간지역 구이저우(... -
‘법치’를 유난히 사랑하는 위정자들에게 던지는 법치의 본 뜻
<법치의 디테일(法治的細節)>뤄샹(羅翔)중국 정법(政法)대학의 형법 연구자 뤄샹 교수는 박사과정 시절부터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사법시험 준비학원의 일타 강사이기도 하다. 그의 형법 기초 온라인 강의가 2020년 중국의 유튜브 비리비리에서 갑자기 인기를 끌며 스타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국민적 관심을 끄는 사법적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그의 평론은 가볍게 수천만뷰를 기록한다. 언론과 정치가 온통 ‘법조인판’인 한국에선 신기할 것도 없지만, “변호사와 양의(西醫)는 적게 볼수록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중국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갑작스런 인기의 이유를 묻자 190㎝가 넘는 장신에 용모도 준수하고 말재주도 빼어난 그가 허리를 숙이며 겸손하게 답한다. “중국의 시민들이 공정과 정의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것 아닐까요?”<법치의 디테일>은 작년에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법률에세이이다. 그의 전작 <형법학강의>처럼 보통... -
중화주의를 극복한 대만의 화교 작가, 문화 다원성의 방향을 제시하다
장귀싱(張貴興)<네펜데스, 벌레잡이 통풀(猴杯)>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한국영화 <브로커>가 배우 송강호에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는 보도를 보고 소박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일본인 거장의 연출작이고 각본도 그의 것인데, 그냥 한국영화라 불러도 좋은 것일까? <미나리>나 <파친코>의 성공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에게 이 영화를 제작한 ‘해외교포’ 문화인들이 같은 질문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한국지식인들이 이에 대해 진지하게 답변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대만 출신 하버드대학교 현대중국문학 연구자 왕더웨이(王德威)는 기존의 중국문학과 디아스포라 서사 중심의 화교문학의 구분을 뛰어넘는 화어(華語)권 사이노폰(Sinophone) 개념을 제시한다. 구식민지의 종주국 언어에 기반한 영어권 앵글로폰이나 프랑스어권 프랑코폰에서 착안한 것이다. 국민국가의 틀로 가둘 수 없는 혼종된 언어 정체성과 문화를 표현해야 하고... -
학력자본 세습하는 중국의 '선거사회'...지금 우리라고 다를까
허화이홍<선거사회(選擧社會)>40일 넘게 전 주민의 자택격리가 진행 중인 상하이를 가까스로 탈출한 유럽인 청년이 질문을 던진다. “왜 중국 시민들은 이런 부당한 정책에 저항하지 않는 거죠?”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국인 지인이 분노를 표한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한 고위공무원 가족이 양성 판정 후에도 격리시설에 안 가고 줄줄이 확진되는 통에, 보름 넘게 단지 내 산책도 못하고 있어요.” 중국은 여전히 소수의 통치세력인 관과 대다수의 민으로 나뉘는 계급사회일까? 베이징대학의 정치철학자 허화이훙(何懷宏) 교수는 많은 학자들이 중국 전통사회를 단순히 봉건전제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래서 서주(西周) 시대에서 춘추 시기까지는 ‘세습사회’, 한나라에서 청 말까지를 ‘선거사회’라고 분석한 두 권의 책을 펴냈다. 여기서 선거(選擧)는 투표(election)가 아니라 선택(selection)을 의미한다. 중국은 추천에 의한 찰거와 필기시험인 과거제를... -
시대를 사랑하면서 거부했던 사상가 루쉰
첸리췬(錢理群) 편저<첸리췬의 새로운 루쉰작품선집 魯迅作品選讀, 錢理群新編>“중국인들은 평화로운 시기엔 루쉰을 읽지 않습니다. 진실(無眞相), 컨센서스(無共識), 분명한 것들(不確定)을 찾을 수 없는 지금과 같은 환란의 시기에 그를 찾죠.” 이미 팔순을 넘긴 첸리췬(錢理群) 선생이 작년 연말, 새 <루쉰선집(魯迅作品選讀)>과, 평론집(錢理群講魯迅)을 출간했다. 2015년부터 양로원에서 생활한 그는 2019년 부인과 사별했다. 팬데믹이 시작되고 한동안 사람들을 접촉할 수 없어 외로움에 시달렸지만, 루쉰 탄생 140주년이었던 작년부터는 책의 출간과 함께 비리비리(중국판 유튜브)에도 강연을 올리고 있다. 인생을 달관하고 보니 창의력이 샘솟는다는 지금은 양로원 생활에 대한 글을 집필하고 있다.마오쩌둥에 의해 문학가·사상가·혁명가로 박제됐던 루쉰은 중국 인민에게 신처럼 추앙받았지만 대륙의 지식인에게 오히려 오랜 기간 외면받았다. 1980년대부터 루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