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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군사정권의 불의에 맞서 매서운 죽비를 날린 ‘대쪽 언론인’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 수록한 시편 ‘송건호’에서 이렇게 썼다. “시대는 착실한 세대주를/ 지조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대는 속절없는 독서인을/ 거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대는 조심스런 언론인을/ 역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시 속에 등장하는 ‘지조의 사람’이야말로 언론인 송건호(1927~2001)를 표상하는 키워드다. 물론 그는 “남다른 성실성과 필력”(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술도 못 마시면서 산(山)친구들과 떨어지기 싫어 술자리에 마지막까지 앉아 있던” 사람(소설가 이호철)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하지만 송건호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역시 ‘대쪽 언론인’이다. 동아투위 위원장을 지낸 도서출판 다섯수레 김태진 대표(77·전 민주언론협의회 의장)는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꼿꼿함 그 자체”라고 했다.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청와대에서 주요 언론사 편집국장들을 불러 식사를 하고 촌지를 돌린 적이 있다. 그때 유일하게 촌지를 거부했... -
‘목마와 숙녀’의 시인, 한국전쟁 터지자 종군기자로도 ‘맹활약’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요절 시인, 명동의 ‘댄디보이’ 박인환(1926~1956)은 당시 문인들이 대개 신문사 문화부에서 활동했던 것과 달리 1949년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로 입사했다. 그해 김경린, 김수영 시인 등과 함께 동인 ‘신시론’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했다. 그는 5편의 시를 수록하며 모더니즘 시인으로 각광 받았다. 박인환은 동인 ‘후반기’ 등을 조직해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 1950년대 모더니티를 대표한 시인이다.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 경향신문사가 대구에서 전선판 신문을 발행하면서 박인환은 종군 기자로도 활약했다. 당시 전쟁에 참여한 중공군 얘기를 간접 취재한 기사와 전투로 폐허가 된 서울 외곽을 르포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2월 초순까지 소위 중공군이 강제 속영하고 있었던 안양읍 2동리 김만영이란 촌노인에게서 들은 바 젊은 중공군의 솔직한 고백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놈은 사천성에서 강제로 끌려... -
(8) 원고지 채우며 아침 맞는 기자·1호 방송작가 ‘대중문화의 산역사’
“이상형이 어떻게 되나?” “할아버지나 아버지 같은 사람!”“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눈이 너무 높은 거야.” “…” 60년 가까이 나이차가 나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 ‘눈이 높다’고 손녀에게 돌직구를 날린 사람은 바로 올해로 아흔여섯이 된 대한민국 최초의 드라마 작가이자 작사가인 유호(본명 유해준) 선생, 내 할아버지다. 그의 유머러스한 성품 때문에 지금도 6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조부와 손녀 사이엔 늘 이런 식의 농담이 오고간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엔 진지한 표정으로 “집에 안 들어와도 된다”고 하셔서 배꼽을 잡았다. 나뿐 아니라 할아버지와 모든 가족 간의 대화는 내 기억으론 늘 이런 식이다.그는 1947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로 입사해 부장으로 퇴직하신 후, 본격적으로 방송작가의 길을 걸어오셨다(이하 할아버지의 호칭을 필요한 부분에선 유호 선생이라고 정리하는 것을 부디 독자와 할아버지께서 양해해 주시기 ... -
(7) 문화부장 김동리 - 해방 정국 좌·우 넘나들어…언론계 떠난 뒤 ‘문단의 거목’으로
초대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염상섭이 추대된 데는 소설가 김동리(1913~1995)의 공이 컸다. 경향신문이 창간된 1946년 김동리(당시 33세)와 염상섭(당시 49세)은 서울 돈암동 한동네에 살면서 어느 봄날 우연히 첫인사를 나눴다. 한 달쯤 지나 김동리는 “일제강점기부터 형같이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던 정지용(당시 46세)을 만났다. 정지용은 ‘교회에서 신문을 내게 돼 내가 일을 봐줘야 하게 생겼다. 편집국장을 물색해보자’고 김동리에게 의논했다. 김동리는 염상섭을 추천했고, 정지용은 구미가 당기는 표정으로 “당장 염상섭의 집으로 가자”고 제안했다고 김동리는 자전 수필에서 회고했다. 그 해 가을 염상섭 편집국장, 정지용 주필의 경향신문이 발간됐다. 편집국장 일이 잘 풀리자 정지용은 감사의 뜻으로 쇠고기를 사서 김동리의 집에 찾아가 밤새 술을 마셨다. 극히 가난했던 김동리의 부인은 쇠고기를 아예 요리할 줄 몰랐고, 내놓을 안주는 수제비 한 그릇뿐이었다. 이런 살림을 보고 ... -
(6) 박정희가 친분 이용해 경향신문 경영 맡기려 했지만 휘둘리지 않다
“그 신문사 일 어떻게 되었어요?”“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 줄을 쓰는 것밖엔 없나 봅니다.”“보고를 받아 다 알고 있어요. 교회라는 거룩한 탈을 쓰고 그 짓들인데 그 사람들 법으로 혼들을 내주시죠. 그렇듯 당하고만 가만히 계실 거예요?”“그럼 어쩝니까? 예수가 오른쪽 뺨을 치면 왼뺨을 내 대라고 가르치셨는데야!”“그래서야 어디 세상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까?”“그게 천주학의 어려운 점이지요!”“천주학이라!”50여년 전 박정희 대통령과 구상 시인 간에 있었던 대화이다. 시인은 이를 자전 연작시집 에 가감 없이 담아 놓았다. 그가 평생 가슴에 묻고자 했던 비화를 이렇게 시로나마 일부 드러낸 까닭은 무엇일까? 나의 아버지 구상 시인은 명예를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좀 강박적이라 느껴질 만큼 평생 애써 지키며 살았다. 경향신문과의 인연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 -
(5) 논설위원 주요한 - 경향 폐간 부른 ‘여적 필화’ 당사자…시인·언론인·정치인 ‘족적’
주요한은 1900년 평양에서 목사인 아버지의 8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소설가 주요섭이 그의 동생이다. 주요한은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 1925년 중국 상하이(上海) 후장대를 졸업했다. 수필가 피천득도 주요한의 주선으로 같은 대학을 나왔다. 그가 1919년 발표한 ‘불놀이’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자유시로 알려져 있지만 김억의 ‘봄은 간다’(1918)나 한용운의 ‘심’(1918)이 먼저라는 견해도 있다. 주요한은 언론인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1959년 ‘여적 필화사건’ 당시 그는 민의원이었다. 이듬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월 열린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재선됐고, 장면의 제2공화국 정권에 입각해 부흥부 장관과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다.주요한은 장면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장면을 회고하는 글에서 “1952년 여름 서울 환도 후 나는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일 보고 있었는데, 그 당시 야인인 장 박사(장면)는 역시 경향신문사 고문이란 이름으로 신문사의... -
(4) 초대 논설주간 정지용
경향신문 70년은 ‘여적’ 70년이다. 1946년 10월6일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2만건 이상 게재된 여적의 첫 회 집필자는 경향신문 초대 논설주간 정지용 시인(1902~1950?)이었다.“여적이 뛰어난 장인의 화룡점정이라면 이만한 생색이 다시 없겠지만, 잔 받침에 흘러내린 술방울이라면 부질없는 일이요, 하다못해 펑펑 흘린 수만 섬의 눈물이 거쳐간 뒤에, 뼈에 맺힌 설움에 절어 나온 짜내는 눈물방울이라면 쓸모도 있겠고, 생각대로 곧바로 행동하며 강직하게 거리끼지 않고 직언을 하여 입가에 침을 튀겨가며 곧은 말을 하는 침방울 같을진대, 이 또한 때로는 청량제도 될 것이다. 산모의 유두에서 떨어지는 뽀얗고 기름지고 부드러운 젖방울은 또 어떨까. 젖방울이라니 정신의 젖방울, 마음의 유방도 그 아니 좋으냐.”‘여적’이 ‘붓 끝에 남아 있는 먹물’이라는 점에 착안해 술방울, 눈물, 침방울, 젖방울로 이어지는 액체의 이미지가 이어진다. 정지용은 칼럼 ‘여적’이 세상의 슬... -
(3) 좌·우 이념 넘어 ‘균형 있는 언론’ 틀 잡은 경향의 첫 얼굴
1946년 10월6일 경향신문 창간은 당대를 주름잡던 문인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집국장 염상섭, 주필 정지용, 문화부장 김동리, 문화부 기자 박영준 등이 가톨릭 신부인 양기섭 사장과의 협의 아래 신문을 만들었다. 초대 편집국장 염상섭(1897~1963)은 1947년 가을까지 재직하며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경향신문의 공명정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창간 당시 50세였던 그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두루 경험한 원숙한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기에 가능했다.당시 서울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좌·우파 분열과 더불어 정치테러가 빈발했다. 염상섭은 1946년 11월28일자와 29일자에 나눠 실은 ‘폭력행위를 절멸하자’라는 사설에서 ‘테러는 정치활동을 저해하고 정치인에게 함구령을 하(下)한 형태이며 민중을 정치면에서 철벽으로 격리하여 놓은 결과를 재래(齎來)하였다 하겠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미 대표작 <삼대>(19... -
(2) 나의 소공동 시절 최일남 작가
70년 생일잔치에, 과객 축에도 들지 못할 나를 ‘경향 사람들’에 끼워줘 고맙다. 경향신문에는 1962년 봄에 들어갔다가 1963년 봄에 나왔다. 송건호 선생 주선으로 서울 소공동 사옥에서 딱 1년을 보냈는데 입사 당시의 직함은 문화부 차장이었다. 타사(민국일보)의 문화부장을 데려오는 마당에 안 됐지만, 반년 후에는 꼭 부장 발령을 내겠다는 약속을 들은 끝이다. 민국일보 논설위원에서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보다 먼저 자리를 옮긴 송 선생은 그걸 “조직체 일반의 자존 의식”으로 설명했다.그 이전의 언론계 입문이 애초에 난데없어서도 당자인 나는 기분이 언짢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노는 방죽만 다를 뿐, 하는 일이 같고 경험 또한 일천했던 터라서. 당시 이진섭 경향신문 문화부장은 여러 통신사 신문사 기자로 시작하여, 시나리오와 방송 드라마 작가로 이미 유명세를 탄 분이었다. 워낙 다재다능하여 문화의 어떤 테두리에 한정시키기 어려울 만큼 활동 영역이 넓었다. 샹송을 잘 불렀... -
(1) 28세 때 논설위원 입사 이어령
경향신문은 창간 70주년을 맞아 ‘특별한 재회’를 마련했다. ‘경향’의 한지붕 아래서 신문을 제작하며 고락을 함께한 경향사람들과의 지면을 통한 만남이다. 이들은 경향신문 70년의 토대이자 밑동이 된 언론인들이다. 20대 논설위원이었던 이어령은 단평 칼럼 ‘여적’을 통해 세상과의 창을 열었고, 현역 최고령 문인으로 건재한 작가 최일남은 예리한 문체로 시대를 담아내며 활자를 누볐다. 초대 편집국장인 횡보 염상섭을 비롯해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시인 구상, 소설가 김동리 등 한국 문단의 중심에 섰던 작가 출신의 기자들과 데스크, ‘한국 언론의 사표’로 불린 언론인 송건호가 경향신문 70년을 만든 사람들이다. 내가 경향신문에 처음 출근한 것은 1962년이다. 당시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이 ‘여적(餘滴)’의 새 필자로 나를 영입했다. 직책은 논설위원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대표적 야당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향한 날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가 가장 두려워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