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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잔인한 거다
희망은 잔인한 거다. 어째선가. 희망의 이름으로 현재의 고통을 유보하고 미래로 전가하기 때문이다. 그럼 현재 진행 중인 고통은 어쩌란 말인가. 서현이의 짧고 불행한 삶을 생각해도 그렇다. 지난 10월 ‘소풍을 가고 싶다’고 의붓엄마한테 말했다가 폭행을 당해 갈비뼈 16개가 부러지며 숨진 여덟 살 이서현양 말이다. 이 사건은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시민단체들은 진상조사와 제도개선위원회를 만들었다. 국회에선 아동학대 처벌을 강화하는 특례법 제정이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죽은 서현이는 돌아올 수 없다. 내가 희망은 잔인한 거라고 말한 이유다. 서현이는 파란 꿈 한번 펼쳐보지 못한 채 떠나 그저 계기로, 교훈으로 남았다. 사람들은 다시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며 미래의 희망을 말한다. 불쌍한 아이의 운명은 잊혀져 간다. 이 어찌 잔인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에게 희망은 치유할 수 없는 질병, 불치병이다. 팔레스타인 시인 마무드 다르위시(1941~20... -
애국심은 위험하다
애국심은 거룩한 것이다. 그런데 영국 문필가 새뮤얼 존슨(1709~1784)은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라고 악담을 했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인용되는 이 말은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 이 말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앞뒤 맥락이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인즉 존슨이 이 말을 했다고 세상에 알린 사람은 그의 전기를 쓴 동시대인 제임스 보스웰이었다. 보스웰은 존슨이 비난한 건 전반적 애국심이 아니라 가짜 애국심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편 사전 편찬자이기도 했던 존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자신이 만든 영어사전에 ‘애국자’에 대해 “가짜 주화를 가려내듯 외관만 그럴듯한 가짜 애국자를 가려야 한다”고 썼다. 애국자를 자처하면서 당파적 분란만 일으키는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존슨이 뭘 말하려 했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된다.애국심에 관해서라면 박근혜 대통령의 애국심을 의심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아버지의 서거 소식을 듣고도 ... -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내전’
한국 정치가 내전적 상황이거나, 적어도 정신적 내전상태로 가고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난달 말 관람한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 사진전(세종문화회관)이 잠재된 ‘내전의 추억’을 깨우는 계기가 됐다. 추억이라 한 건 우리에겐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의 원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전에는 그 유명한 ‘쓰러지는 병사’도 걸려 있었다. 카파가 1936년 첫 종군한 스페인 내전 때 코르도바 전선에서 찍은 것으로, 한 공화파 병사가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했다. 그는 무엇을 위해 공화파 진영에서 싸우다 이런 최후를 맞게 됐을까. 요즘 대선불복론을 갖고 말이 많지만, 스페인 내전에도 비슷한 성격이 있었다. 총선에서 좌파 인민전선(공화파)이 승리하자 군부 등 우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촉발됐다는 점에서다. 단순화하면 이 내전은 ‘폭정이냐 민주주의냐’를 놓고 벌인 싸움이었다. 우파 세력은 지주·자본가·가톨릭 교회 등 인민전선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기득권층이었... -
송전탑 밑에서
욕하면서 닮는다고, 미국 전 대통령 부시 유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면서도 왕왕 이분법에 빠지는 나를 본다. “세상은 선과 악으로 나눠지며 나는 언제나 선이다.” 이게 이분법적이고 독선적인 부시식 세계관이다. 이분법적 세계관은 위험하다.이분법에 익숙한 시각을 교정하는 데 유익한 기사를 9월14일자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읽었다. 이 잡지는 ‘종의 다양성’ 특집에서 “경제성장이 종의 소멸을 막는 데 기여한다”는 결론을 냈다. 성장과 보전이 늘 충돌하는 가치란 통념을 깬 것이다. 가령 한반도의 남한은 지난 수십년 동안 고속성장한 나라인데, 숲이 잘 보전된 편이다. 반면 북한은 숲이 1년에 2%씩 지난 20년 사이 3분의 1이나 사라졌다. 인간의 성장에 수반하는 과학적, 기술적 진보는 다른 종들에게 혜택을 준다. 40년 전에는 미국 하천의 3분의 2가 수영이나 낚시에 적합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3분의 1로 줄었다. 인간을 위한 하천 정화 작업 덕을 다른 종들도 본 것이다. 한 사회... -
국민적 저항, 누구 몫인가
두 주 전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적 저항’이란 말을 썼는데 용례가 독특했다. 그는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만난 이튿날 국무회의에서 “야당에서 장외투쟁을 고집하면서 민생을 외면한다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저도 야당 대표로 활동했고 어려운 당을 일으켜세운 적도 있지만 당의 목적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말인즉슨 민주당에 준엄한 경고를 발한 것이다.대통령의 이 발언은 시간이 좀 지났더라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어수선한 현 정국을 파악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우선 ‘국민적 저항’이란 말의 쓰임새가 생뚱맞다. 국민적 저항은 권력을 전제로 한다. 즉 권력·정권에 대한 저항이다. 야당도 또 다른 권력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전날 3자회담에서 국정원 개혁 등 야당이 요구한 7개 사항을 죄다 묵살했다. 힘센 야당이라면, 또는 야당의 힘을 인정한다면 그럴 수 없었을 거다. 천막투쟁 벌이... -
무서운 게 역사다
역사는 왜 배우나. 리처드 패어스(1902~1958)란 영국 역사가가 색다른 말을 했다. “25살 미만의 청소년은 역사를 공부해서는 안된다.” 요즘 역사교육 강화다 수능 필수화다 해서 가뜩이나 부담이 큰 학생들이 솔깃해할 얘기 같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좋은 역사(good history)는 돈이나 과학처럼 유익하지는 않지만, 나쁜 역사(bad history)는 세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무기보다 더 무서운 해독을 끼친다.” 다른 게 아니라 어린 정신에 주입되는 잘못된 역사교육의 해독을 고발한 것이다. 이런 패어스를 좀 삐딱한 좌파 역사학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는 보수주의 사가다. 그는 ‘나쁜 역사’에 대해 경고했다. 여기서 역사는 사건 그 자체로서의 객관적 역사가 아니라, 책으로 기술된 주관적 역사다. 따라서 ‘나쁜 역사’란 왜곡된 역사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 이로 인해 왜곡된 역사의식, 역사관이다. 이 역사왜곡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일까. 그건 역사가 증명하고 ... -
한여름 밤의 꿈같은 이야기
이런 나라가 무슨 소용인가. 유치환이 시 ‘생명의 서’에서 한 것처럼 ‘독한 회의’를 하고 있던 차에 며칠 전 TV에서 본 화성 뉴스가 각별하게 느껴졌다. ‘마스 원’이란 네덜란드 회사가 화성 정착민을 모집하고 있는데 넉 달 사이 지원자가 120여 나라에서 10만명이 넘었다는 거다. 2023년 첫 정착민 4명을 우주선에 실어 보낸다고 한다.성사 가능성도 미지수지만, 이 화성 여행은 편도라서 지구로 돌아올 기약은 없다. 또 그곳 삶은 엄청나게 악조건이다. 산소가 부족하고 일교차는 90도나 되며 방사능은 예측불가능하다. 중력은 지구의 38%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주복을 입고 생명유지 장치가 된 돔형 모듈에 갇혀 살아야 한다. 이런 ‘화성이민’ 모집에 반응이 뜨겁다는 게 놀랍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화성 정착민 소식을 접하며 스쳐지나간 생각은 지내기야 많이 불편하겠지만 거긴 국가란 게 없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지구야 멈춰라 내리고 싶다’란 식의 낙서로 자유 ... -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1974년 5월 오종상씨(당시 34세)는 경기 평택에서 버스 옆자리에 앉은 여고생에게 말 한번 잘못했다가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오씨는 학생에게 “정부가 분식을 장려한다면서 고위층은 국수 몇 가닥에 계란과 고기가 태반인 분식을 한다. 그러니 국민이 시책에 순응하겠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북과 합쳐서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한 혐의도 받았다. 여고생은 학교 선생님에게 이 말을 전했고 선생님은 오씨를 신고했다. 그는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일주일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정부를 비판하기 때문에 공산주의’라고 몰렸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불러주는 대로 썼더니 ‘자생적 공산주의’란 칭호를 씌웠다. 죄명은 반공법과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다. 오씨는 출소 뒤에도 고문 후유증으로 정상적으로 살지 못했다. 2010년에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오씨는 올 3월 라디오에서 “당시 학생들은 정부를 비판하면 다 공산주의나 빨갱이로 교육받았어요”라고 했다. 요즘... -
열둘을 세면 우리 모두 침묵하자
훌륭한 시는 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다른 말로 감정이입을 시키는 힘이 있다. 요즘 내 귓전을 맴도는 시가 있으니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침묵 속에서’다. 시는 감정이입의 폭이 소설보다 넓다. 즉 제멋대로 해석할 여지가 더 크다. 이 시가 좋은 까닭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억장이 무너질 때,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때, 전라도 사투리로 ‘중치가 막힐’ 때, 저 무수한 소란과 웅성거림에 몹시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할 말을 잃고 침묵하게 된다. 이런 내 감정이 시 ‘침묵 속에서’에 제대로 투사된다.네루다는 노래했다. “이제 열둘을 세면/ 우리 모두 침묵하자// 잠깐 동안만 지구 위에 서서/ 어떤 언어로도 말하지 말자/ 우리 단 일 초만이라도 멈추어/ 손도 움직이지 말자// 그렇게 하면 아주 색다른 순간이 될 것이다/ 바쁜 움직임도 엔진소리도 정지한 가운데/ 갑자기 밀려온 이 이상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리라…”이런 구절도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 -
그런 대통합은 없다
정치 지도자치고 통합을 꿈꾸지 않는 이 있을까. 이승만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 박정희는 국민 총화(總和)란 말을 즐겨 썼다. 총화는 ‘전체의 화합’으로 통합과 비슷한 뜻이다. 그 뿌리가 일제란 설도 있지만 그는 자나 깨나 국민의 총화와 단결을 주술처럼 외웠다. 박근혜 대통령도 통합에 관심이 많다. 엊그제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민간위원 18명 인선을 발표했다. 지각 인선인 데다 규모 축소, 위원 면면으로 보아 대통령의 대통합 의지가 후퇴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위원 절반이 대선 때 새누리당 캠프에 몸담거나 박 후보 지지를 선언한 인물들이다. 이런 인적 구성을 갖고 지역·세대·계층·이념 갈등을 해소할 수 있을까.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전례가 있다. MB정부는 2009년 말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를 만들어 위원 48명을 임명하고 매년 40여억원의 예산을 썼다. 그러나 이 기구가 뭘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들에게 MB 집권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