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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이 바친 제물
이재명이 선언한 대로 민주당은 보수정당이 맞다. 그의 민주당은 시장·성장 중시, 감세와 같은 보수 노선을 따른다. 이재명 이전에도 민주당은 보수였다. 노동자 계층을 지지기반으로 둔 적도, 분배 정의, 불평등·기후위기 해소, 재벌개혁, 소수자 차별 금지를 우선한 적도 없다.한국은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진 나라가 아니다. 민주주의 40년에도 견고한 보수 헤게모니는 겨우 생존하던 정의당의 퇴출로 이미 입증됐다. 한국 정치는 보수정당 경쟁체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민주당=진보, 국민의힘=보수’로 짝짓는 걸 즐긴다. 명색이 선진국인데 다원성 없는 ‘결손 민주주의’를 인정하자니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지 정치가 진보와 보수 두 바퀴로 굴러간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두 바퀴론은 주관적 인식일 뿐이지만, 우리의 언어습관, 정치 담론이 만들어낸 현실이기도 하다. 정치에서는 종종 객관적 사실 못지않게 주관적 인식이 중요할 때가 있다. 다수가 민주당을 진보라고 여기는 한 민... -
반동의 물결 앞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2개월 만에 두 번의 도전을 받았다. 한 번은 무장군인을 동원한 폭력적 방법에 의해, 또 한 번은 극단세력이 정치의 중심에 서는 비폭력적 방법에 의해. 폭력은 그 가시성으로 인해 시민들로부터 즉각 거부된다. ‘응원봉 시위’ ‘남태령 대첩’이 말해주듯, 민주주의 심화 의지를 불태우게 하는 역효과를 낸다. 한국 민주주의는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았다. 비폭력적 도전으로부터도 살아남을까? 민주주의에 대한 진짜 위협은 내란이 아니라, 극단세력이 정치 중심으로 진입한 사건이다. 폭력엔 즉각 맞선 시민들도 극단주의 확산엔 속수무책이다. 내란 전까지 극우는 사회로부터 배제된 자, 고립된 존재였다. 그들과 사고방식을 공유하는 윤석열이 통치할 때조차 사회의 외톨이였다. 반동의 물결은 어디에서 갑자기 밀어닥친 것일까? 그것이, 잠자던 거인이 깨어나듯 깜짝 등장할 수는 없다. 지층 아래 거대한 에너지로 갇혀 있다가 지층을 뚫고 분출하듯 나타날 수도 없다. 그들은 그저 아스팔트 ... -
민주주의를 지켜야 국민의힘이 산다
전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저절로 오는 건 아니다. 역사는, 하나의 전쟁이 끝나도 다른 전쟁이 시작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평화가 올지는 전쟁을 끝내는 방식에 달렸다. 내란 문제도 그렇다. 내란 사태로 형성된 전환의 골짜기를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 대화정치로 갈지, 또 다른 전쟁정치로 갈지 결정된다.내란으로 뒤통수를 맞은 국민의힘은 윤석열과의 인연을 끊고, 당을 바로 세우는 혁신의 길을 갈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윤석열 저항을 받아들이는 대신 집권세력의 책임감으로 순조로운 사법적 절차 이행에 협조하고, 야당과 정치일정을 합의, 과도기를 안정적으로 넘길 수 있었다. 전쟁을 끝내는 좋은 방법은 평화협정을 맺고 다시 전쟁하지 않는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다.그러나 국민의힘은 윤석열과의 결합 강도를 높여갔다. 그러고는 윤석열-당-극단세력으로 저항의 축을 형성해 대결정치를 시작했다. 위기가 닥치면, 평소 거리를 두던 극단세력에 의존하는 관성을 따른 것이다.국민의힘에 견딜 수 ... -
국민의힘이 기가 살아 있는 이유
먼저 윤석열 탈당을 요구한다. 내란과 윤석열 실정에 책임 있는 세력을 배제, 당내 윤석열 흔적을 지운다. 이렇게 당을 윤석열로부터 분리한 다음 당을 혁신해 살길을 찾는다. 내란충격에 대처하는 합리적 접근법이다. 박근혜 탄핵 때도 그렇게 해서 당을 위기에서 구하고 집권까지 했다.국민의힘은 반대로 하고 있다. 의리 때문일까? 입당 3년짜리 사고뭉치와 당의 미래를 맞바꾸는 것은 아무래도 계산이 맞지 않는다. 윤석열과 분리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자포자기한 걸까? 당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권성동은 “여전히 국민의힘이 여당”이라며 굳이 자신들이 윤석열의 당임을 내세운다. 한덕수에게 국회가 통과시킨 법을 거부하라 요구하고, 당정협의도 하며 뒤늦게 망한 정권의 주인 노릇에 열심이다. 정면돌파하려는 걸까? 당 간판과 얼굴만 바꿔 책임회피하는 얕은수를 쓰는 대신, 윤석열과 함께 돌을 맞기로 했다면, 책임전가 아닌 책임분담을 하겠다면 환영할 일이다. 시민들은 책임을 분명하게 물을 기... -
트럼프 귀환에 준비되지 않은 윤석열 외교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도 하기 전 세계를 흔드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니 한국 외교에 관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왜 윤석열 대통령은 실용외교니 국익외교니 하는 자기 공약을 버리고,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대결이라는 조 바이든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따라 가치외교의 깃발을 올렸을까? 가치외교는 오직 미국을 믿고 따르면 미국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란 무속적 소망을 담은 외교다.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바탕으로 한 미국의 지구적 리더십은 오바마 정부 때 이미 꺾이기 시작했다. 전임 부시 네오콘 정부의 과대 팽창으로 미국 내 피로감이 확산되고, 2008년 미국 금융위기로 미국의 위상이 훼손된 결과다. 흔히 트럼프가 국제질서를 끝장낸 사람처럼 알려졌지만, 미국 조지타운대 찰스 쿱찬 교수는, 트럼프는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라고 본다.트럼프가 국제기구를 비난하고 다자주의를 무시하며 동맹을 무임승차자라고 공격하는 행태는 분명 오바마·바이든과 다르다. 그러나 국제 개입을 줄이고, 중국 문... -
‘윤석열’ ‘트럼프’ ‘김정은’이라는 벌을 받고 있다
미국 시민이 대통령 선거에서 카멀라 해리스와 도널드 트럼프 가운데 트럼프를 선택한 이튿날 윤석열은 국정 전환과 아내 사이에서 아내를 선택했다. 그 전에는 김정은이 러시아에 파병하는 쪽을 선택했다. 각각 다른 땅에서 다른 이유로 이루어진 선택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잘못된 선택이다.미국 시민은 트럼프에게 미국이 만든 국제질서를 흔들고 세계를 혼돈에 빠뜨릴 기회를 주었다. 지구온난화를 부정하는 그는 파리협정을 또 탈퇴한다고 한다. 취임 즉시 시행하겠다는 미등록이민자 추방은 인도주의적 재앙을 예고한다. 이주자는 그가 퍼뜨린 인종주의의 먹잇감이 될 것이며, 소수자 혐오는 확산할 것이다.어떻게 미국인들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세계의 안녕을 위협할 성범죄자, 중범죄자이자 음모론자, 나르시시스트, 포퓰리스트인 그를 선택할 수 있느냐고 물을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트럼프가 있다. 지난 기자회견에서 잘못을 성찰하고 새롭게 출발하기를 바랐던 보수의 간절함을 ... -
어쩌다 우리는 부부통치를 받게 되었나?
남한 부부통치는 북한 남매통치와 닮았다.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다. 김여정은 중대 발표 때 오빠 위임을 받았다고 공표하지만, 김건희가 국정개입 때 오빠 위임을 받는지는 알 수 없다. 김여정 오빠가 누군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김건희 오빠가 누군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렇다 해서 김건희·명태균 대화록에 나오는 오빠가 어떤 오빠인지가 중요해지는 건 아니다. 세상의 시선은 오직 김건희를 향해 있다. 어쩌다 우리는 부부통치를 받게 된 것일까? 김건희 라인이 과시하는, 지난 대선 때의 활약상은 우리를 윤석열 정부 탄생기로 강제 소환한다. 좋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때 이야기를 해보자. 윤석열 정부 탄생의 비밀에 관한 많은 질문들이 여전히 대답 없이 허공을 맴돌고 있다. 상명하복의 위계조직에서 한번 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재능밖에 없다는 인물을 대통령감이라고 부추긴 사람은 누군가? 모두가 주시하는 대선 국면에서도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산만한 아저씨가 조리 있는 ... -
통일은 잊자
지금 한반도에서 통일 의지를 불태우는 건 윤석열 정부뿐이다. 북한은 이미 남한과 통일하지 않겠다고 했다. 남한 시민들은 2023년 통일연구원 통일의식 조사에서 46.1%가 ‘통일 필요 없다’고 응답했다. 응답자는 보통 이런 설문에 자기 개인 판단보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대답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편향을 제거하기 위해 평화공존과 통일 가운데 선택하도록 하자 평화공존이 59.5%, 통일이 22.5%였다.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서 평화공존 선호가 압도적이다. 그러든 말든 윤석열 정부는 ‘자유의 북진’이니 ‘통일독트린’이니 하며 들떠 있다.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통일은 민족의 구원이었다. 반민주, 인권탄압, 빈부격차, 정경유착과 부패 같은 한국 사회의 모순은, 분단이라는 단 하나의 원인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남한은 불구화된 체제다, 남한만으로 발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통일 환원주의, 통일 메시아주의였다. 하지만 남한 스스로 산업화, 민주화... -
보수를 응원하며
마치 흑백 기록영화를 본 것 같다. “반국가세력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전 국민 항전 의지를 높일 방안을 강구하라”.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지시다. 거대 야당 위세에 기죽지 않겠다는 허세려니 했다. 그래도 그렇지, 저런 식의 대야공세라니,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열 해명에 따르면, 그건 오해였다. 그는 간첩을 말한 것이라고 했다. 간첩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그가 걱정됐다. 그는, 영수회담은 거부하고, 당정 갈등은 부인했다. 김건희 조사는 정당하게 처리됐고, 채 상병 사건 외압은 없었고, 의대 증원 문제는 마무리됐고, 응급실은 정상이라고 했다. 이 초현실주의적 독백이 의미하는 딱 한 가지는, 2년이 넘어도 그의 스타일에 익숙해지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이다.보수진영 내 위기론이 팽배하다. 국정방향은 좋지만, 국정운영 방식이 서툴고 거칠어 차기 집권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이상한 논리다. 옳은 방향을 추구하는데... -
윤석열, 한동훈, 이재명의 돌멩이 정치
21대 국회 임기 말인 지난 5월 국민연금 개혁에 관한 양당 입장은 상당히 접근했다. 이재명이 ‘받는 돈’에 관한 국민의힘 안을 수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합의를 거부했다. 민주당이 채 상병 특검법안을 냈을 때도 국민의힘은 반대했다. 한동훈이 특검 추천인을 대법원장으로 하는 대안을 냈을 때는 민주당이 반대했다. 민주당이 22대 국회에서 다시 특검법안을 발의하면서 한동훈 안도 논의할 수 있다고 하자 이번에는 국민의힘이 반대로 돌아섰다.의대 증원, 저출생 대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당 사이 정책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게다가 양당에는 김종인 발자국이 있다. 양당을 오가며 비대위원장을 한 그는 양당 정강정책을 모두 손봤고, 그 결과 비슷비슷해졌다. 그런데도 양당은 합의를 피하려 무진 애를 쓴다. 주요 쟁점을 타결짓는 사고가 날까봐 그런 것 같다.이념·정책 중심 경쟁, 그리고 조정·타협이라는 정치과정은 정치 양극화·팬덤정치 심화로 사라졌다. 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