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수를 응원하며
마치 흑백 기록영화를 본 것 같다. “반국가세력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전 국민 항전 의지를 높일 방안을 강구하라”.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지시다. 거대 야당 위세에 기죽지 않겠다는 허세려니 했다. 그래도 그렇지, 저런 식의 대야공세라니, 참 고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석열 해명에 따르면, 그건 오해였다. 그는 간첩을 말한 것이라고 했다. 간첩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그가 걱정됐다. 그는, 영수회담은 거부하고, 당정 갈등은 부인했다. 김건희 조사는 정당하게 처리됐고, 채 상병 사건 외압은 없었고, 의대 증원 문제는 마무리됐고, 응급실은 정상이라고 했다. 이 초현실주의적 독백이 의미하는 딱 한 가지는, 2년이 넘어도 그의 스타일에 익숙해지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이다.보수진영 내 위기론이 팽배하다. 국정방향은 좋지만, 국정운영 방식이 서툴고 거칠어 차기 집권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이상한 논리다. 옳은 방향을 추구하는데... -
윤석열, 한동훈, 이재명의 돌멩이 정치
21대 국회 임기 말인 지난 5월 국민연금 개혁에 관한 양당 입장은 상당히 접근했다. 이재명이 ‘받는 돈’에 관한 국민의힘 안을 수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합의를 거부했다. 민주당이 채 상병 특검법안을 냈을 때도 국민의힘은 반대했다. 한동훈이 특검 추천인을 대법원장으로 하는 대안을 냈을 때는 민주당이 반대했다. 민주당이 22대 국회에서 다시 특검법안을 발의하면서 한동훈 안도 논의할 수 있다고 하자 이번에는 국민의힘이 반대로 돌아섰다.의대 증원, 저출생 대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당 사이 정책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게다가 양당에는 김종인 발자국이 있다. 양당을 오가며 비대위원장을 한 그는 양당 정강정책을 모두 손봤고, 그 결과 비슷비슷해졌다. 그런데도 양당은 합의를 피하려 무진 애를 쓴다. 주요 쟁점을 타결짓는 사고가 날까봐 그런 것 같다.이념·정책 중심 경쟁, 그리고 조정·타협이라는 정치과정은 정치 양극화·팬덤정치 심화로 사라졌다. 민주... -
트럼프를 잊어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대선 후보직 전격 사퇴로 도널드 트럼프가 누구와 경쟁할지 알 수 없는, 초유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다 해도 트럼프 당선을 상상하는 건 더는 공상이 아니다. 온갖 난관을 뚫고 기어코 다시 대통령 후보가 되고, 총알까지 피한 행운의 사나이가 집권하는 운은 피할 거라 믿을 이유가 없다. 요즘 한국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트럼프와 합이 잘 맞을지, 어떻게 하면 트럼프 맞춤형 외교를 할 수 있을지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마치 나라 운명이 미국의 손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 같다. 미 대선을 지켜보는 우리의 불안한 시선이 낳은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다. 미 대선이란 거울에 비친, 중심을 잃은 채 흔들리는 한국 외교를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미국은 어차피 트럼프 시대다. 미국에 닥친 ‘트럼프 충격’은 트럼프가 집권하건 안 하건 미국을 트럼프 시대로 바꿔놨다. 바이든은 당초 국제관계를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대결로 규정했다. 권위주의 국... -
누가 애완견인가?
이재명이 언론을 애완견이라고 했다. 그는 종종 자기 통제력을 잃는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언론은 왜 나의 애완견이 되어주지 않느냐는 불만의 표출로 받아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이 커졌다는 점에서 권력과 언론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한 문제다.언론은 그동안 상당한 지면과 시간을 할애해 이재명의 의견과 활동을 보도했다. 애완견이라서가 아니다. 그럴 만한 뉴스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이 이재명에 대해 감시견 역할을 한 것도 그가 미워졌다거나, 윤석열·검찰 애완견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재명도 누군가에게 민주당의 아버지, 여의도 대통령이라 불리는 하나의 권력이 됐다. 권력 감시는 언론이 가장 잘하는 일이며,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언론이 윤석열 감시견 역할을 했다면, 그것도 같은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다.민주당의 총선 승리와 정국 주도권 행사가 이재명 혼자만의 능력으로 된 것은 아니다. 언론이 윤석열 감시견 역할을 하지... -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고 살자’
2020년 6월15일 중국·인도 접경지 카슈미르 라다크에서 양국 군인이 충돌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군인들은 주먹, 돌, 몽둥이로 싸웠다. 2022년 12월9일 인도 동북부 아루나찰프라데시주(州) 타왕 지역에서도 양국 군인이 충돌했다. 주먹으로 싸워 수십명이 부상했다. 핵무장한 두 강대국이 석기시대 전투를 한 것이다. 남북 간에도 그런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실질적 핵보유국 북한, 세계 유수의 군사대국 남한이 풍선에 전단, 1달러 지폐, 아니면 똥, 쓰레기를 담아 치열한 풍선 공방전을 하고 있다. 주먹싸움엔 풍선 공방전과 다른 면이 있다. 중국·인도 간에는 소규모 분쟁이 대규모 분쟁으로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한 장치가 있다. 분쟁에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합의다. 남북 간에는 그런 것이 없다. 풍선 갈등, 바람 따라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다. 한반도 정치군사적 대립 구조는 그 원인, 해결책이 무엇인지 잘 알려져 있다. 군사적 긴장 완화, 군축, 평화협정, 북·미관계... -
대통령을 위한 변명
노태우에서 윤석열까지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 권력의 크기는 시간의 흐름 따라 줄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은 집권당 총재를 겸하면서 당을 지배했다. 다음 대통령들은 일개 당원으로 남았다. 윤석열이 일개 당원으로 당을 지배했던 기간은 2년뿐이다. 집권당을 통제하려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앞으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시선을 한 정부 임기 내로 돌려도 마찬가지다. 권력 크기는 시간의 함수다. 임기 전반기 누리던 권력은 후반기 눈에 띄게 약해진다. 권력에 적용되는 엔트로피 법칙이다. 노태우에서 윤석열까지 권력 감소 과정에 헌법은 단 한 자도 바뀌지 않았다. 오탈자도 그대로다. 바뀐 것이 있다면 권력에 관한 시민, 지식인, 여론 주도층의 인식과 태도다. 시민은 삼권분립이 분명해지고, 총리가 책임 있는 역할을 하고, 당정이 분리되는, 권력 분산을 원했다. 한마디로 분권에 대한 시민의 기대와 요구가 커지는 정도에 따라 대... -
기적의 8
싸울 것인가, 대화할 것인가? 윤석열 정부 출범 이래 첫 영수회담을 마친 윤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제 결심해야 한다. 두 사람은 계속 싸울 수도 있고, 대화할 수도 있다. 싸우고 싶으면 싸울 이유를, 대화하고 싶으면 대화할 이유를 얼마든지 찾아내 싸우거나 대화할 수 있다. 가령, 이견이 없는 의대 증원, 국민연금개혁 문제에서도 차이를 찾아내 대립할 수 있다. 이견이 있는 채 상병 특검, 김건희 특검, 25만원 지원금 문제를 두고도 합의 가능한 점을 찾아 타협할 수 있다. 정치란 구조적 제약을 넘는, 인간 의지가 작용할 수 있는 영역이다. 대결과 대화 가운데 어느 한쪽을 강제하는 필연성, 불가피성 같은 것은 없다. 선택에 달린 문제다. 두 사람은 개인적 성향, 사회적 경험, 직업적 경력상 대화보다 대결에 더 친화적이다. 자신의 성취를 이끈 것이 사적 욕망이든 신념이든 자기 열정 하나만을 믿고 오늘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도 성... -
나쁜 소식
좋은 소식이 있다. 첫째, 22대 총선이 양당 경쟁에서 벗어나 다당 경쟁으로 치러지고 있다. 제3지대 정당의 폭발 덕이다. 둘째, 선거 정보가 풍부하다. 온·오프라인 미디어는 누가 문제행동을 하고 이상한 말을 했는지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다. 전국·지역 상황, 정당 지도부의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 공유된다. 셋째, 대립 구도가 분명하고 단순하다. 다당 경쟁에 정보홍수라고 해도 누구를 선택할지 걱정할 게 없다. 정권심판, 이·조(이재명·조국)심판 가운데 고르면 된다. 그게 싫다면, 양당 동시 심판도 있다. 넷째, 진보정치가 확산됐다. 진보세력이 민주당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하고, 진보를 자처한 조국혁신당이 부상했다. 다당 경쟁, 풍부한 정보, 분명한 대립 구도, 진보 확산은 시민 선택지를 넓혀주면서도 선택을 수월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성숙한 민주주의 증거가 될 수 있다. 나쁜 소식은 한국적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다당 경쟁은 양당질서의 한 현상이다... -
조국은 왜?
우리는 또 조국 앞에 서 있다. 그는 이제 막 정국을 뒤엎을 듯한 기세를 몰고 돌아왔다.시인 장석주는 대추 한 알도 저절로 붉어질 리 없다고 했다. 대추 안에 태풍 몇개, 천둥 몇개, 벼락 몇개가 있다고 했다. 조국의 귀환도 마찬가지다. 그가 흙먼지를 날리며 돌아오기까지 두 개의 정부, 두 명의 인물, 두 개의 정당이 필요했다.조국 사태를 일으켜 윤석열 정부를 탄생시킨 문재인 정부는 모든 것의 시작이다. 무능했을지언정 무도하지는 않았던 문재인 정부와 달리, 윤석열 정부는 무능할 뿐 아니라, 무도하기까지 하다. 집권 이유였던 공정을 흉내도 내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윤석열 정부는 조국을 불공정의 감옥에서 해방했다. 윤석열 정부의 불공정 때문에 불려 나온 한동훈은 이재명 공격에 최적화되었을 뿐, 국정을 변화시킬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게다가 그 자신이 자녀 문제를 포함해 여러 가지 불공정 문제를 갖고 있다. 조국이 한동훈에 비해 부족할 게 없다... -
이재명 사퇴를 권함
이재명은 민주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정당 지도자로서 부적격이다.그는 경기도지사에서 당내 대선 경선 참여자로, 대선 후보자로, 대선 패배자로, 당대표로 자신의 지위가 변할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었다. 특히 자기 정체성이었던 기본소득을 포기한 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선거제를 약속하고, 그걸 뒤집고, 뒤집은 걸 다시 뒤집었다. 불체포특권 포기 선언을 하고는 포기를 포기했다가 이런 변심을 지지하지 않은 동료 의원을 공천 과정에서 보복했다. 전당대회 연설에서 ‘당대표 경쟁 후보가 공천을 걱정하지 않는 당’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고는 ‘공천 때 복수하는 당’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 앞에 있는지, 정세와 자기 입지의 유불리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된다. 어제의 이재명은 오늘의 이재명이 아니고, 오늘의 이재명은 내일의 이재명이 아니다. 매일 변하는 남자를 사랑하기는 어렵다.그의 말과 행동은 다음 말과 행동으로 뒤집힐 때까지만 유효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