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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을 밀어준 바람
영화 <기생충>이 네번째 오스카상까지 거머쥐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회의가 한창일 때였다. 휴대폰 화면에 단톡방 메시지가 떴다. “작품상 받았대요”라는 말 뒤로 글자보다 많은 여덟 개의 느낌표가 붙어 있었다. 코로나19를 필두로 쏟아지는 무거운 소식들 때문에 발랄한 기분이기 어려운 시기에, 모처럼 모두에게 얼마간 들뜬 얼굴이 되게 하는 단비였다. 나 역시 각종 영상과 이런저런 뒷얘기와 해석들을 찾아보며 <기생충>의 성취를 흠뻑 즐겼다. 그후 며칠간, 누구와 만나도 대화의 얼마간은 <기생충> 얘기로 채워졌다. 대단한 개인의 성취를 목격하는 것은 그 자체로 근사한 일일뿐더러, 그 성취를 얼마간 ‘우리의’ 성취처럼 느낄 만한 구석이 있다면 함께 고양되는 흐뭇함을 느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시상식의 무게중심이 급격히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으로 쏠리기 시작한 순간은 뭐니뭐니해도 ‘감독상’이 주어졌을 때였다. 봉 감독이 무... -
우리의 3.5%는 어디에 있을까
지난 21일부터 24일까지 다보스포럼이 열렸다.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 연례회의를 일컫는 다보스포럼에서는 세계 경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재계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세계 자본주의 질서가 해소해야 할 현안을 놓고 토론한다. 올해로 50년째를 맞은 이번 다보스포럼이 내건 주제는 ‘결속력 있고 지속 가능한 세계를 위한 이해관계자’였다. 2019년 8월 미국 유수의 기업 CEO 181명이 참여하는 단체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이 기업의 목적을 새로이 천명하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시대의 공식적인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과 궤를 같이하는 움직임이었다. 기업에 자본을 대는 주주만이 아니라, 기업이 비즈니스를 영위하기 위해 관계 맺는 모든 당사자, 바로 이해관계자들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면, 주주들을 위한 이윤 창출 역시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전제다. 기업이 비즈니스를 펼치는 시장은 사회와 자연으로부터 단절된 공간이 아니... -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2019년 4월 이 지면에 나는 “열렬한 육식주의자이긴 하지만, 고기를 생산하는 데 얼마나 많은 환경 비용이 지불되는지 잘 알고 있다”라고 썼다. 그리고 2019년 11월 결국 고기를 끊었다. 다큐멘터리 <더 게임 체인저스(The Game Changers)>를 보고난 후였다. 육식을 최대한 멀리한 지 이제 두 달쯤 되었다. 혼자 먹을 때는 해산물과 유제품도 거의 먹지 않는다. “열렬한 육식주의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놀랍게도, 채식 중심의 식단은 별로 괴롭지 않다. 실은 즐거운 면도 제법 많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미각의 경험이 있고, 긍정적인 몸의 변화도 느낀다. 이제 와서 보면, 축산업이 환경에 끼치는 폐해를 알지만 여전히 고기를 먹는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면에 썼다는 게 부끄럽게 느껴진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전 세계 온실가스의 22%가량이 가축 생산 및 소비 때문에 발생한다고 추정한다. 육류 및 유제품 섭취를 반... -
기후위기 대처, 먼저 움직이는 ‘큰손’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25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15일 폐막했다. 예정보다 이틀 길어진 일정이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번 당사국총회의 목표는 2015년 채택된 파리협정의 이행에 필요한 17개 이행규칙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도국과 선진국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는 끝끝내 평행선을 유지했고 이행규칙 합의는 또다시 내년으로 미뤄졌다. 기후변화는 그사이 더욱 위기를 향해 치달을 테고,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만큼 더 줄어있을 것이다. 16세의 환경운동가 툰베리가 지난 9월 유엔총회 연설에서 서늘한 얼굴로 뱉었던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How dare you!)” 기후변화의 경고등이 켜지고 그 경고등을 ‘국제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25년보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지구정상회의에서 유엔 기후변화협약이 체결되었을 때, 기후변화의 위기에 대한 과학적 논의는 여전... -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착한 투자’
시민경제는 시민으로서의 덕목이 경제생활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개념이며, 실은 인류 역사를 돌아볼 때 오랜 기간 그래왔다. 노동이라는 경제활동을 하러 나서는 사람이 자신의 사회적 얼굴과 가치관을 집에 두고 출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투자의 영역에서 돈을 불리는 것과 사회적으로 좋은 것이 양립할 수 없다는 개념이 자리 잡게 된 것은 자산 운용이 하나의 산업으로 고도화되면서부터다. 이 산업 안에서 자산을 가진 사람과 실제로 그 자산을 투자처로 배치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기업 열 곳을 나란히 세워놓고, 각 기업이 어떤 물건을 어떤 소비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팔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직접 자신의 돈 1000만원을 나누어 투자하도록 한다면, 이때 사람들이 내릴 선택은 그 1000만원을 맡아 운용하는 펀드매니저의 선택과 제법 다를 것이다. 이 차이는 단순히 전문적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펀드매니저는 주어진 운용기한 내 수... -
최적화 게임
지난 칼럼에서는 멀린다 게이츠가 젠더 평등을 위해 10년간 1조2000억원을 쓰겠다고 약속한 소식을 소개했다. 오늘은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의 또 다른 의장이자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얼마 전 <인사이드 빌게이츠>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빌 게이츠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빌 게이츠라는 인물의 머릿속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뜻을 살린 원문 제목은 ‘빌 게이츠의 뇌 구조’쯤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들은 빌 게이츠라는 이름에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시는가? 이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 내가 가진 빌 게이츠에 대한 이미지는 평면적이었다. 일단 그는 어마어마한 부자다. 아주 오랜 시간 세계 최고의 부자자리를 지켰고, 최근에야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 두 번째 자리쯤에 올라 있다. 빌 게이츠가 이렇게 엄청난 부자가 된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어마어마한 성공 덕분이다.... -
200년을 기다릴 순 없으니까
여성 혁신가 8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든 일터로 출근합니다>에서 저자 홍진아는 30대 중반 이후에는 어떻게 일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불안했던 마음을 털어놓는다. 일의 형태나 환경이 바뀌어 가는 중에도 여전히 롤모델로 삼을 만한 여자 선배를 찾기 어려웠고, 그러던 중 10명 연사 전부가 남자로만 들어찬 4차 산업혁명 콘퍼런스를 보고 직접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여성에게 마이크가 주어지지 않고 여성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런 얼굴들을 찾아나서기로 한 것이다. 계속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는 먼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는 데서 온다. 주변이 그런 얼굴들로 둘러싸여 있다면 그 효과가 얼마나 큰지 깨닫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얼굴을 다 꼽아도 손가락이 남는다면, 나는 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드는 건 당연하다. 지난 10월2일 ‘빌&멜린다 게이... -
미래에서 온 메시지
스웨덴에서 온 16세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지난 24일 뉴욕 유엔본부 기후정상회의 연단에 섰다. 툰베리의 연설을 들은 사람이라면, 모두 바로 이 한 문장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How dare you!”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그레타 툰베리는 기후변화의 위험을 알려온 환경운동가다. 툰베리는 15세이던 2018년, 스웨덴 의회 앞에서 기후변화를 위해 더 강력히 행동할 것을 촉구하며 시위를 시작했다. 기후변화를 멈추지 못한다면 학교에서 배운 역량을 펼칠 미래 또한 없을 것이라며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이라는 간판을 손에 든 채였다. 이후 점점 많은 청소년들이 이 움직임에 동참했고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s for Future)’이라는 운동이 탄생했다. 전 세계 청소년이 매주 금요일 학교 파업에 동참해 기후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던지자는 운동이다. 이렇게 시작된 운동에 전 세계 2200여곳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동참했고, 움직임은 지금... -
주식회사의 존재 이유
얼마 전, 창업해 회사를 꾸린 지인이 주주 간 서로 다른 의견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회사에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해야죠”라는 흔해 빠진 내 조언에 “회사에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할 때 회사란 뭘까요?”라고 그는 되물었다. 기관의 성격이 서로 다른 주주들 모두가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라는 같은 말 아래 제각각의 이해관계를 펼쳐놓는데, 모든 말이 나름의 일리가 있어 보이니 하는 말이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주섬주섬 에둘러 내놓은 내 대답은 이랬다. “20년이나 30년쯤 주식을 팔 수 없는 주주가 내릴 법한 결정이 회사를 위해 좋은 결정일 거예요.” 금융업에서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던 시절, 재무제표는 세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정연한 중립적 질서처럼 보였다. 기업의 모든 활동은 재무제표의 어떤 항목을 올리고 내리느냐로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듯했다. 손익계산서의 맨 아랫줄인 순이익을 늘리는 활동은 좋은 것, 줄이는 활동은 나쁜 것이... -
개인의 한계를 뛰어넘는 비즈니스 윤리
최근 종영한 TV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는 양대 검색포털기업 ‘유니콘’과 ‘바로’를 배경 삼아, 두 기업을 치열히 1, 2위를 다투는 선두주자로 일궈낸 여성 3명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검블유>에도 여느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달콤하기도 씁쓸하기도 한 각양각색의 러브스토리가 있지만, 이 드라마는 무엇보다 내게 기업의 윤리에 대해 거듭 질문하는 이야기로 읽혔다. 거대 포털은, 요즘 들어 점점 그 세가 약해진다고는 해도, 여전히 수없이 많은 국민에게 정보와 뉴스에 닿기 위한 관문으로써 작동한다. 그만큼 그들에게 영향력이 집중된다. 커다란 영향력은 수많은 유혹에 노출된다는 의미이며, 그만큼 엄청난 자기검증의 책임을 요구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홈 화면에 뜨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무엇을 그대로 남기고 무엇을 삭제할 것인가 하나를 결정하기 위해 물어야 할 질문은 무겁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특정 개인의 인권과 시민 일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