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일사막’을 막자
낮에 한여름같이 더운 4~5월에도 귤이 나온다. 청로다. 만생종인 이 귤은 당도가 15브릭스 정도로 높다. 적절한 산도도 있어 입안에서 느끼는 균형감이 절묘하다. 균형감은 긴 여운으로 이어진다.나는 청로 같은 감귤류를 초겨울부터 5월까지 즐기려고 한다. 퇴근하고 바로 감귤류를 먹으면 낮 동안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씻겨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딸기와 사과 같은 당과 산이 조화로운 과일을 먹을 때도 비슷한 효능을 느낀다.그런데 며칠 전 청로를 아내 대신 직접 사서 귀가했는데 가격에 놀랐다. 2㎏에 2만3600원이었다. 작년에 1만5000원 정도 했던 데 견줘 큰 폭으로 오른 것이다. 과일값은 올 초부터 큰 폭으로 올라 사회적 이슈가 돼왔다. 오름 폭도 컸지만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이슈가 된 탓도 있었다. ‘애플레이션’(사과를 뜻하는 애플+인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민생 경제의 화두로 떠올랐다.실제 우리나라 과일 가격 상승률이 선진국 가운데 최악의 수준이다.... -
메인 요리만큼이나 중요한 디저트
플랑(Flan)의 맛이 궁금했다. 플랑은 ‘프랑스 국민 디저트’로 불리는 프랑스식 에그 타르트다. 타르트 반죽에 우유, 설탕, 바닐라빈 등을 넣은 계란혼합물을 채워 오븐에 굽는다. 포르투갈에서 시작한 에그 타르타가 프랑스로 전해지면서 프랑스식으로 변형된 것이다. 에그 타르트보다 훨씬 크고 충전물이 폭신하다. 평소 계란 노른자향이 강해 에그 타르타를 그다지 즐기지 않던 내가, 플랑을 사려고 서울 강남의 백화점 지하에 문을 연 ‘밀레앙’까지 찾아간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프랑스 파리 6구에 있는 빵집(블랑제리) 밀레앙은 한국인인 서용상 셰프가 운영한다. 그는 ‘디저트의 제국’ 프랑스에서 프랑스제과제빵협회가 1년에 한번 여는 2023년 플랑 대회에서 1위에 올랐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일요일 오전 밀레앙이 위치한 신세계 강남점 지하는 인산인해였다. 신세계가 지난달 중순 강남점에 문을 연 5300㎡(약 1600평) 규모의 43개 디... -
아이스 커피와 마라탕
나는 한겨울에도 냉커피를 마시는 ‘얼죽아’다. 차가운 것을 마시면 이가 시린 내가 왜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찾는 걸까?이유는 간단하다. 20년 넘게 한 기자 시절 거의 매일 커피를 5잔 이상 마셨다. 마감이 있는 날은 10잔까지 마셔본 것 같다. 둔필인 탓도 있지만 마감이라는 정신노동의 고단함을 떨쳐버릴 요량이었다. 심지어 커피를 사러 가기도 귀찮으면 사무실에 있는 믹스커피를 차가운 물에 타서 먹었다. 뜨거우면 마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탓이었다. 찌는 듯한 한여름을 제외하고 나에게 아이스커피는 사실 ‘카페인 링거’였다.하지만 마흔이 넘어서 커피로도 씻어지지 않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피로감은 점차 무력감으로 변했고 이명 현상을 유발했다. 병원에 가보니 의사는 과한 커피 음용을 내 질병 원인의 하나로 지목했다. 커피를 끊거나 줄여야 한다고 했다.그렇지만 커피 없인 글뿐 아니라 단순한 일정 체크도 쉽지 않았다. 홍차나 녹차를 마셨지만 커피를 갈음하... -
구내식당 예찬
나는 구내식당을 좋아한다. 구내식당은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 데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일반 식당보다 음식이 담백한 데다 영양사가 영양을 고려하기에 채소와 생선을 자주 먹을 수 있다. 집 밖에서 어떻게든 채소를 접하려는 나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하지만 대다수 회사 동료들은 구내식당을 타박한다. 맛이 밍밍하고 고기가 없다는 게 주된 이유다. 내가 구내식당을 좋아하는 이유와 정반대다. 그런 동료들이 좋아하는 메뉴는 제육볶음, 부대찌개, 돈가스같이 기름진 음식들이다.내 기억에 남는 구내식당은 한때 내가 다녔던 한 대기업에 있는 것이었다. 반찬도 충실했고, 낮 12시 반에 가면 세트메뉴로 비빔밥이나 파스타가 나왔는데 꽤 괜찮았다. 대학 시절 소가 잠깐 건너간 듯한 학생회관 구내식당의 장국밥을 툴툴거리며 먹었던 나의 눈에 회사 구내식당은 완전한 신세계였다. 구내식당 덕에 회사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다.구내식당의 연원은 오래다. 지금도 공동체... -
음식에서 그레셤의 법칙은 어떻게 가능할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은 은 같은 귀금속이 포함된 동전뿐 아니라 음식에도 적용된다.탕후루가 대표적이다. 배달의민족(이하 배민)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의 ‘배민트렌드 2023 가을·겨울편’을 보면, 지난해 7월 배민에서 탕후루 검색량은 1월에 견줘 47.3배 늘었다. 탕후루는 긴 나무 꼬치에 과일을 꿰 설탕·물엿을 입혀 먹는 중국 전통 간식이다. 구글의 검색어 흐름을 보여주는 구글트렌드 자료를 보면, 탕후루는 거의 검색 자체가 안 되었다가 지난해 초부터 늘더니 7월부터 폭증했다.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탕후루가 급속히 퍼졌고 이런 유행이 배민 데이터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마라로제도 주목할 만하다. 배민의 같은 자료를 보면, 입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맛이 특징인 마라탕을 변주한 마라로제의 지난해 7월 주문량은 1월 대비 6.3배 증가했다. 중국 쓰촨 지역 음식인 마라탕은 SNS에 민감한 10~20대 여성들이 주요 소비층이다.이처... -
1인분을 허하라
내가 혼밥을 시작했던 것은 2005년 무렵이었다. 아내가 아파서 입원 등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서 끼니를 혼자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아졌다. 주중에는 어떻게 해결됐지만 주말은 대략 난감했다.그 당시 혼밥을 할 수 있는 곳은 김밥집이나 서울 시내의 유명한 해장국집 정도였다. 지금은 혼밥이 흔해졌지만 그때는 혼밥을 하면 대부분 식당의 종업원이나 옆의 손님이 나를 약간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래도 서울은 나았다. 서울에서는 1인분을 팔지 않는 것은 수익이 덜 난다는 경제적 판단에서 귀찮다는 투였다면 지방은 사뭇 달랐다. 2013년 세종시가 처음 생길 때, 나는 그곳으로 파견됐다. 사방이 공사판이던 그곳은 사실상 시가 아니라 읍 단위의 마을이었다. 고기나 민물매운탕을 주로 팔던 식당가에서 1인분을 주는 식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곳에서 혼밥을 하는 나에게 쏟아지는 또 다른 종류의 시선을 느꼈다. 주말에 혼밥을 먹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다. ‘멀쩡한 사람이 왜 ... -
한식이 더 사랑받으려면
지난해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에 갔을 때였다. 토리노에 사는 이탈리아인 친구가 시내에 괜찮은 한식당이 생겼다며 가보자고 제안했다. 가보니 재미있게도 주인은 이탈리아 사람, 셰프는 필리핀 사람이었다. 이탈리아 사람이 한국 교포가 많지 않은 토리노에서 한식당을 연 것은 한식이 그만큼 인기가 있다는 뜻이다. 실제 한국기업이 해외에서 운영하는 한식당 통계(출처: 농림축산식품부)를 보면, 2009년 28개 기업 116개에서 2022년에는 63개 기업, 783개로 늘었다. 또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에 따르면, 열성적인 한류 소비자의 한식 소비 비율이 2019년 24.3%에서 2021년 38.4%로 늘었다. 최근 한식의 인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외국인들은 한식을 한류 콘텐츠의 하나로 보는 것 같다. 토리노 한식당을 나와 함께 방문했던 이탈리아인 프란체스카가 한식에 빠지게 된 계기는 K팝이었다. 처음에는 엑소, BTS를 좋아하다 지금은 산울림, 최백호를 즐긴다. 오징어젓을 가장 좋... -
거지방에서는 뭘 먹을까
거지와 도둑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됐지만 기피하는 직업이다. 그래서 두 직업은 욕으로 자주 쓰인다. 활용도 면에서 단연 거지가 앞선다. 질이 낮은 물건을 지칭하거나 원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거지 같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가끔 ‘그지’라는 말로 변형되거나 앞에 ‘개’나 ‘땅’ 같은 단어가 붙기도 한다.그런데 최근 ‘거지’를 자처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카카오톡의 오픈채팅방에서 ‘거지방’이라고 검색하면 100여개 채팅방이 검색된다. 구글에서는 127만개 동영상이 검색된다. 젊은이들은 채팅방에 자신의 아이디를 ‘개그지’ ‘백년거지’로 쓰기도 한다. 스스로를 거지로 낮추면서 젊은이들은 무슨 대화를 나눌까? 거지방에 모인 이들은 자기의 씀씀이를 공개하고 절약법을 공유한다. 가령 한 멤버가 단톡방에 “오늘 저녁, 제육덮밥을 시켰습니다”라고 톡을 올리면 다른 회원들이 바로 “생일입니까?”라고 반박한다. 또 누군가 “립 틴트를 사고 싶어요”라고 하면 “입술을 꽉 깨... -
누가 나의 아침상을 뒤엎나?
내 아침상은 간단하다. 10년 넘게 통곡물 빵 한 쪽과 샐러드, 커피다. 빵만으로 심심하면 견과류나 햄 혹은 삶은 달걀을 곁들인다. 드레싱은 올리브 오일과 식초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샐러드다. 점심·저녁은 외식이 잦아 아침에 채소를 충분히 먹으려 하기 때문이다. 샐러드는 토마토, 상추, 루콜라로 만든다. 처음에는 양배추, 브로콜리를 먹었지만 손도 많이 가고 아침에는 부담스러웠다.국화과(상추)와 십자화과(루콜라) 채소에는 몸에 좋은 항산화 성분이 많이 포함돼 있다. 가짓과인 토마토도 마찬가지다. 이런 컬러풀한 아침상이 과로·과음이 일상인 나를 그래도 질병의 위험에서 구해주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나의 아침상은 나에게 단순한 칼로리 건전지가 아니라 ‘먹는 백신’인 셈이다.그런데 10년 동안 한결같던 아침 식탁이 최근 두 달간 뒤죽박죽이 됐다. 지난 7월 말 끝난 장마 탓이다. 장마 뒤에 토마토, 상추, 루콜라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나는 생활협동조합(생협)에서 ... -
B 푸드에 거는 기대
부산은 서울과 닮았다. 부산은 서울처럼 주변 지역의 인구와 특산물을 흡수하는 거대 소비 도시다. 지하철이 있고 백화점이 있다. 그렇지만 부산에는 서울과 크게 다른 게 있다. 바다가 있다. 그래서 부산은 먹거리가 풍족하다. 낙동강을 따라 내려온 경상도 내륙의 매운맛과 남해·동해 바다의 짠맛이 융합돼 있다.서울에선 아무리 신선하다고 해도, 기장 봄 멸치와 가덕도 겨울 숭어 맛을 제대로 느끼기는 어렵다. 돼지로 뽀얀 국을 끓이는 실용성도 체면치레가 심한 서울과는 다른 결의 음식을 낳는 비결이다. 가까운 거리 때문에 빠르게 수입되는 일본 문화와 한국전쟁 때 피란 온 실향민의 눈물이 섞이면서 부산의 맛은 더 깊어졌다.나는 이런 부산이 좋다. 날씨가 괜찮으면 대마도도 보인다는 탁 트인 바다도 좋지만 서면 돼지국밥 골목과 남포동 자갈치시장에서 풍겨오는 부산 내음이 좋다. 부산이 갖고 있는 탈서울의 생동감도 좋다. 서울을 카피하려고 안달인 많은 도시와 달리 부산은 모든 문제의 뿌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