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주년 경향신문


경향신문

기획·연재

이희경의 한뼘 양생
  • 전체 기사 59
  • [이희경의 한뼘 양생]가당치 않게, ‘가능주의자’
    가당치 않게, ‘가능주의자’

    짜증과 답답함이 최고기온만큼이나 매일 기록을 경신 중이다. 기후위기를 걱정하면서도 에어컨 없이는 못 살겠고, 서울에 와 집값을 보면 아득해진다는 지방 청년의 하소연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다. 노력하면 된다는 능력주의의 주문은 강력하지만, 출발선부터 기울어진 경쟁에서 승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기대도 접은 지 오래고, 다른 전망도 안 보인다. 자책과 원한, 혐오와 냉소,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 어쩌면 이것이 우리 시대를 떠도는 가장 흔한 정동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최근에 본 <남태령>과 <가능주의자>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숨통을 조금 틔워주었다.<남태령>은 비상계엄 이후 탄핵 정국이 한창이던 2024년 12월21일 정오부터 다음날 오후까지,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올라오다 남태령 고개에서 경찰에 막힌 농민들과 그 소식을 듣고 트위터 계정을 통해 고개로 모여든 청년들의 28시간을 기록한 영화다. 내가 인상적이었던 ...

    2026.08.06 20:12

  • [이희경의 한뼘 양생]어느 날, ‘뭐라구’가 왔다
    어느 날, ‘뭐라구’가 왔다

    어머니 살아생전 식구들과 둘러앉은 식탁에서 가장 많이 하셨던 말은 “뭐라구?”였다. 소리가 잘 안 들리는 건지, 아니면 맥락 파악이 잘 안 되는 건지 누군가 한마디할 때마다 매번 그렇게 되물으셨다. 당연히 이야기는 툭툭 끊겼다. 그래도 우리는 “궁금해서 그러실 거야” “답답하시겠지”라며 다시 말하거나 조금 더 천천히 이야기했다.하지만 늘 그렇게 사려 깊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왜 그렇게까지 다 들으려고 하실까. 적당히 못 알아들어도 그냥 넘어가시면 안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는 “뭐라구?”를 대화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라기보다 늙음을 초연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안간힘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후배들과 밥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계속 “뭐라구?”를 연발하고 있는 것 아닌가? 당황스러웠다.어머니의 노화는 심혈관계 질환이나 당뇨 같은 만성...

    2026.07.09 20:14

  • [이희경의 한뼘 양생]마을공유지는 장례식장이 될 수 있을까
    마을공유지는 장례식장이 될 수 있을까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상조회와 병원 장례식장 이외의 대안을 생각해보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경황도 없었지만, 장지(葬地)에 대해서 미리 고민하고 준비해왔던 것에 비하면 장례 절차에 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겠다. 40여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달랐다. ‘객사’는 안 된다며 시신을 집으로 모셔 왔고, 동네 장의사가 염을 맡았으며, 아버지 친구분들이 절차를 주관했고, 내 친구들이 관을 운구했다. 그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표준적인 장례 의례 ‘바깥’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그런데 최근 이 문제에 대해 곱씹어볼 기회가 있었다. 우선 희정 작가의 <죽은 다음>을 읽었을 때였다. 이 책에서 특히 ‘한국 여성 1호 화장(火葬)기사’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니는 이해루씨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그는 초보 장례지도사 시절, 어떤 유족이 염습에 직접 참여하겠다고 하자 짜증부터...

    2026.06.11 20:07

  • [이희경의 한뼘 양생]대학 도서관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대학 도서관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올해 박완서 전작을 다시 읽고 있다. 그의 거침없는 문장들과 어떤 도식적 비평으로도 가둘 수 없는 세계에 새삼 놀라는 중이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구체적인데도, 인간의 허위와 욕망을 이토록 날카롭게 드러내는 작가는 흔치 않다. 마침, 박완서 아카이브 전시가 열린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한달음에 달려갔다.하지만 전시회가 열리는 서울대 중앙도서관 문턱은 높았다. 어렵게 찾은 출입 회전문 앞에서 박완서 전시 장소를 묻는 우리에게 돌아온 첫 말은 “신분증 내세요”였다. 동행한 친구가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자 출입은 곧바로 가로막혔고, 다른 방법은 없겠냐고 묻자 “왜 이렇게 목소리가 커요?”라는 ‘통박’이 돌아왔다. 무안했고 위축되었다. 결국 ‘비굴 모드’로 통사정한 끝에 신용카드를 맡기고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그런데 처음에 느꼈던 당혹감은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발견한 성미산학교 학생들의 항의문을 읽으며 근본적인 질문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은 박완서 소설을 읽고 작...

    2026.05.14 20:25

  • [이희경의 한뼘 양생]명숙 언니
    명숙 언니

    부고를 처음 접했을 때 오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던 때가 불과 한 달 반 전이었고, 그때만 해도 아무 낌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시간도 안 돼 여기저기서 올레 이사장 서명숙의 부고가 떴다. 3월 말에 옆구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었는데 4월7일 호스피스 병동에서 숨진 것이다. 황망했다.서둘러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그러나 주말을 낀 제주 1박2일 왕복표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치 아이돌 공연 예매하듯, 추석 귀성열차 예매하듯 새로고침을 반복하면서 간신히 표 한 장을 구했다. 하지만 결국 문상을 가진 못했다. 공항으로 가던 도중, 제주 강풍으로 모든 항공편이 결항이라는 메시지를 받았기때문이다. 전국에 비가 내렸고, 나는 가던 길을 오들오들 떨면서 되짚어 왔다. 조금 울었는데 추위 탓인지, 슬퍼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우리의 인연은 4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엄혹했던 시절, “담배 없이 대체 무슨 낙으로 사니?”라며 줄담배를 피우던 시절...

    2026.04.16 19:53

  • [이희경의 한뼘 양생]살기 위해 숨는 용기
    살기 위해 숨는 용기

    내가 속한 공동체 출신 김고은 작가가 은둔 고립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너무 희미한 존재들>을 출간했다. 그는 ‘은둔 고립’을 통계에 갇힌 사회현상으로 박제하는 대신, 에두아르 콘의 ‘혼맹’ 개념을 빌려와 존재론적 층위에서 재해석한다. 스스로를 ‘자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세계와의 연결이 끊겨버린,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정의한 것이다. 관점을 이렇게 이동시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될까?공동체의 다른 청년이 그 책에 열렬히 반응하며 북토크를 열었다. 자신이 그러했듯, ‘혼맹’에 빠졌던 다른 청년들도 이 주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행사에서 맨 먼저 입을 뗀 사람은 물류센터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청년이었다. 그는 10여년 전, 가족과 소통이 되지 않아 무작정 집을 나와 고시원 침대에서 천장만 바라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내일이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은 무엇이 다를까? 매일 눈을 떠야만 하는 이유가...

    2026.03.19 20:10

  • [이희경의 한뼘 양생]새해에 하는 ‘뻔한’ 말
    새해에 하는 ‘뻔한’ 말

    한국의 새해는 두 번이다. 이를 ‘이중과세(二重過歲)’라 비판하며 하나로 줄이자는 말이 나오던 시절도 있었지만, 나같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새해가 두 번이라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양력 새해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어도, 음력 새해라는 ‘패자부활전’이 다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번 설 연휴에도 1월 초에 써놓았던 문구를 다시 읽었다. “단정히 살고, 치밀하게 생각하고, 진득하게 공부하기.”재밌는 사실은 몇년째 이 문장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올해도 작년의 결심을 그대로 복사해 붙여 넣었다. 다시 말하면 결심은 늘 ‘절제하고 몰입하는 삶’인데, 현실은 늘 ‘허겁지겁과 녹초’였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이 문제가 10년 가까이 어머니를 돌보며 쌓인 피로 때문이라고 여겼고 돌봄이 줄어들면 삶도 좀 더 단순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돌봄이 사라진 자리에는 귀신같이 다른 일들이 들어찼고, 나는 여전히 소진되어갔다. 고농축 비타민과 쌍화탕은...

    2026.02.19 19:55

  • [이희경의 한뼘 양생] 마르잔, 마흐사, 나르게스를 기억하며
    마르잔, 마흐사, 나르게스를 기억하며

    이란을 잘 몰랐다. 축구, 팔레비, 호메이니 등 몇개의 단편적 사실들과 ‘핵’ ‘하마스’ ‘악의 축’ 같은 미국적 프레임이 인상의 전부였다. 그러다가 2008년 흑백의 강렬함과 소박함이 돋보이는 2D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를 만났다. 케첩 바른 감자칩과 아디다스 운동화를 좋아하고 이소룡을 동경하며, “왕에게 죽음을!”을 외치던 꼬마 ‘마르잔’. 그 천방지축 소녀의 성장기를 따라가면서 이란은 내게 ‘사람이 사는 땅’으로 실감되었다.1979년의 이란 혁명은 부패한 왕조를 무너뜨렸지만, 그 자리엔 억압적인 신권 통치 체제가 들어섰다. 펑크록을 사랑하는 소녀 마르잔은 이제 차도르를 입어야 했고, 젊음과 자유가 거침없을수록 수많은 고통과 배반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할머니가 있었다. 55년 전 이혼을 감행하고, 브래지어 속에 재스민꽃을 품고 다니던 할머니는, 비겁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한 손녀에게 호통치며 말한다. “방법은 있어. 방법은 항상 있는 거야.” 이...

    2026.01.22 19:54

  • [이희경의 한뼘 양생]‘누가’ 돌봄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누가’ 돌봄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지난 10월, 제주에서 작은 포럼이 열렸다. 20년 전 서간집 <경계에서 말한다>를 함께 펴낸 한·일 양국의 대표적 페미니스트 조한혜정과 우에노 지즈코가 희수를 맞아 다시 뭉친 자리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오늘날의 페미니즘’ ‘돌봄 사회’ ‘나이듦과 죽음’ 등을 주제로 진행된 이틀간의 대담 내내 뚜렷한 차이를 드러냈다. 서로를 ‘혜정’ ‘지즈코’라고 다정히 부르면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덕분에 관전하던 사람들도 꽤 쫄깃한 시간을 보냈고, 다들 장외에서 이 차이를 해석하고 토론하느라 ‘불타올랐다’.우선 지금의 페미니즘 정세와 관련해 우에노는 백래시를 영향력 확대의 방증으로 보면서 젊은 세대의 자립과 주권을 기반으로 한 ‘페미니즘 리부트’에 희망을 걸었다. 반면 조한은 자기결정권 개념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전유되는 현실을 경계하면서 피해의식을 넘어선 연대와 협력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차이는 돌봄에서 드러났다. 우에노는 일본의 개호보험 ...

    2025.12.04 22:10

  • [이희경의 한뼘 양생]무덤의 미래
    무덤의 미래

    45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묘를 이장(移葬)했다. 당시 정신없이 구했던 묘지는 경기도 모 공원묘지에서도 거의 산꼭대기 자리였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장례식 풍경. 사람들이 무거운 관을 낑낑대며 운반했고, 어린 동생들은 눈 쌓인 산에서 계속 미끄러지면서 울었다. 지금은 접근성이 좋아졌다지만, 노쇠한 어머니에게 그곳은 어느 날부터 갈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1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집 근처에 평장묘를 마련했고, 이번에 그곳으로 아버지를 이장한 것이다.그런데 부모 묘와 관련된 이 같은 고민이 나만의 것은 아닌 것 같다. 선산에 부모를 모신 친구는 성묘 한 번 다녀오려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며, 언젠가 이장하고 싶어도 어디까지 모셔와야 할지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조부모 묘가 고향 뒷산에 있는데, 이제 그곳엔 아무도 살지 않아 다음 세대가 돌볼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부모를 돌보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돌봄을 기대하기 어려운 첫 세...

    2025.11.06 22:07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