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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소득주의를 넘어, 공공이 미래
고단한 번역작업이 완성된 무렵에야 나는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 <불로소득자본주의 시대>의 한국어판 서문을 요청했다. 브렛 크리스토퍼스는 대단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메일을 보낸 다음날 바로 답신이 왔는데 저자서문까지 함께 보내왔다. 번역서 저자서문 때문에 고생을 바가지로 하고도 끝내 서문을 받지 못한 경험을 가진 나로서는 너무 뜻밖이고 고마운 일이었다.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분량이 너무 짧고 간명했다. 하룻밤에 쓴 서문이니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이 서문으로 끝내야 하나 다시 요청해야 하나 생각이 복잡했다. 출간된 책에 수록된 저자서문은 결국 내가 욕심을 이기지 못해 재요청을 한 결과 ‘얻어낸’ 서문이다. <불로소득자본주의 시대>는 사실 여러모로 읽기 쉽지는 않은 책인데, 최종 저자서문은 안내 글로 손색이 없다. 서문에서 저자는 불로소득주의로의 타락, 즉 자본의 생산적 기능마저 저버린 지대추출자본(rentier capital)의 논리가 역사적 자본주... -
윤석열 리스크와 ‘미완의 부활’ 조국
대파 한 단 값 875원이 합리적이라고 한 민생쇼는 한바탕 큰 웃음거리였다. 민생을 탐방하고 민생토론회를 24회나 진행했다는 최고권력자가 얼마나 민생경제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무지·무능·불통을 여실히 보여줬다.보수도 보수 나름이다. 수구(守舊)에만 집착 말고 시대과제와 마주해 합리적 방향으로 보충하고 고쳐지음으로써 제 소임을 할 수 있고 중도층을 품는 포괄적 정당이 될 수도 있다. 세계 정치사에서 전향적 보수의 사례는 적잖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는 원래 수구적 성향이 강한데 특히 현 정권은 너무 퇴행적, 반동적이다. 이 정부 출범 때 나는 윤석열 리스크를 경고하면서 그 ‘최대 적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대체 이 정부가 할 줄 아는 게 뭔가? 윤석열 리스크 넘버1은 내로남불이다. 권력의 사유화와 무도한 오남용으로 제 식구를 감싸고 스스로 내건 공정과 법치를 짓밟아 자기 발등을 확실히 찍었다. 김건희 여사 명품백 사건에 이어, 채모 ... -
배신의 정치와 이재명 리스크
한국사회는 불평등도 불공정도 모두 참기 어려운 지경이다. 하지만 공공선을 저버리는 사익 추구와 위선적 내로남불로 자살골을 차는 이상한 정치가 전개되면서 조건의 평등보다 공정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리하여 여야 할 것 없이 말로는 공정 약속을 무수히 해왔다. 하지만 현실정치는 공정 약속조차 저버리고 배신을 때렸다. 청와대, 거대 양당 모두 사익에 눈멀고 공정을 배신하는 경쟁에 몰두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이는 나라와 국민이 그 비용을 전가받아 병들게 한다. 그들은 전 국민이 빠져든 배신감, 불신감, 우울감, 무력감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한국정치는 변화무쌍하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민주당에 오차범위 밖으로 앞섰다는 소식이다. 최대 요인으로 민주당 공천파동과 민심이반이 손꼽힌다. 사법리스크를 잇는 이재명의 ‘공천 리스크’가 ‘김건희 리스크’를 앞섰다는 말도 있다. 둘째, 재정건전성과 작은 정부, 규제 완화 일변도였던 윤석열이 뜻밖에 의대증원정책을 뚝심 있... -
돈의 분열증, 부동산과 금융의 공생
돈은 순리대로 돌아야 인간을 위한 돈이 된다. 그러나 정작 돈의 생각은 다르다. 자기가 경제와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굽신굽신해야 다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 돈은 어떻게 돌고 있을까? 돈은 유동성이 최고인 재산 중의 재산이며 모든 여타 재산에 대한 일반적 등가권(title)이다. 생산적으로 투자되면 유용한 가치를 창출할뿐더러 일자리와 임금소득을 보장한다. 화폐-생산-노동-임금으로 이어지는 생산적 화폐순환 또는 소득경제 순환이 일어난다. 생산적 투자의 위험부담이 싫을 경우 돈은 본성상 자산적 투자로 흐른다. 물론 그 고삐를 풀어주는 제도적 조건이 따라야 한다. 인간의 살림살이에 유용한 필요 물자의 조달이라는 책임에서 해방되어 교환가치증식에 몰두하는 화폐-자산-화폐의 순환 또는 화폐-화폐의 순환(채권자-채무자)이 발전한다. 자산시장이 팽창하고 불로소득 잔치판이 벌어지는 가운데 부가가치생산과 민간소비를 중심으로 하는 실질경제 순환은 ... -
선택적 법치와 법치의 배신
함박눈이 펑펑 내려 묵은때를 씻고 새해가 밝았는데 대한민국의 법치는 안녕한가? 법치란 모름지기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권력자의 자의적인, 선택적 법치가 도를 넘고 있다. 국민의 공복이어야 할 검찰이 권력자를 위한 방탄으로 추락했다. 다시 헌법을 생각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 있다(헌법1조). 주권은 대통령 1인이나 어떤 정치적·경제적 특수계급에 있지 않다. 또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성별·종교·사회적 신분에 의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않는다(11조). 헌법은 누구는 법치의 대상이 되고 다른 누구는 법치 위에 군림하는 식의 선택적 법치가 아니라 예외 없는 법 앞의 평등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권리 보호는 물론 죄에 상응하는 처별 측면에서도 평등하고 공정해야 함을 함축한다. 무엇보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가 있다(제34조). 이처럼... -
학현 변형윤 선생을 기리며
불평등·불의 타파해 삶의 질 높이고기후위기 대응이 시급하다면서사회생태적 대안경제의 길 제시한학현경제학 영혼은 우리 곁에 숨 쉴 것학현 변형윤 선생과 첫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72년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엉뚱한 일로 학장실에 불려가 선생과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학생교지 ‘상대평론’에 기고한 나의 글이 말썽이었다. 선생의 손에 원고 교정지가 들려 있었다. “군이 형을 닮아 겁이 없고 당차구나.” 뜻밖의 말씀이었다. 겁먹고 주눅들어 있었는데 꾸지람은커녕 칭찬 조의 말씀을 하신 것도 의외였고 나의 형을 알고 계신 것도 놀랍기만 했다. 문제의 원고 내용은 교수들의 강의가 구태의연하고 영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학부 2년차 당시에 형이 물려준 뮈르달의 <경제이론과 저개발지역>이라는 책을 읽고 뭔가 뭉클한 감동을 받았고 그만큼 강의에 대한 기대도 컸었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나머지 당돌하게도 그런 철부지 글을 썼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식... -
경제문명의 운명, 윤석열 경제의 운명
허드슨이 쓴 책 <문명의 운명>이 흥미롭다. 금융과 부동산 부문이 손잡고 지배하는 현대 불로소득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아가 미·중 갈등의 경제적 본질이 뭔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나름 명쾌한 답을 준다. 쉽지 않은 내용을 이처럼 쉽게 풀어 놓은 책도 흔치 않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꽉 막힌 한국경제 생각도 많이 했을 법하다.허드슨판 불로소득경제론의 첫번째 기둥은 자산소유권에 기반한 지대개념이다. 경제적 지대는 근로소득(임금, 이윤)과 대비되는 불로소득이며 가치를 초과하는 비생산적 가격부분이다. 이 지대는 자산의 소유·통제권에 기반을 둔다. 자산의 소유·통제란 곧 소득과 산출에 대한 특권적 지대청구권을 의미하며 국가가 이 특권을 보장한다.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생산적 실질경제는 불로소득청구권을 행사하는 소유권과 비생산적 자산경제의 그물망에 둘러싸인 채 지대지불부담 압박(지대압박)을 받고 쪼들린다.둘째, 허드슨은 불로소득경제의 거시 ... -
변형윤, 갤브레이스, 폴라니
이제 고인이 된 학현 변형윤 선생은 한국의 대표적인 제도학파 진보 경제학자다. 생전에 전집이 출간돼 누구나 쉽게 선생의 경제학을 접할 수 있다. 나는 인간중심 경제를 추구한 학현경제학이 녹색 지향도 담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전집을 읽어보던 차에 선생이 갤브레이스의 <풍요한 사회>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됐다. 갤브레이스가 마셜이나 뮈르달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도덕과학의 면모를 가진 학현경제학이 분배정의와 경제민주화의 길뿐만 아니라 성장 지향 대중 소비사회와 다른 사회생태적 전환의 길을 가리키는 하나의 대목이어서 의미가 적지 않다.흥미롭게도 갤브레이스의 <풍요한 사회>는 만년의 칼 폴라니도 관심을 보였던 책이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넘어서는 인간의 자유와 좋은 삶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이 책을 언급하고 있는데 학현과 폴라니의 생각은 유사점과 함께 차이점도 엿보인다.<풍요한 사회>가 그리는 미... -
동맹의 굴레, 과학의 구멍, 나라 죽이기
올해 8월은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다. 전쟁이냐 평화냐, 멸종이냐 기후정의냐, 불평등 심화냐 민생안정이냐의 갈림길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전환시대의 요구를 거슬러간 ‘반동적 역류(逆流)의 달’로 기록될 것이다. 한·미·일 정상이 만나 ‘캠프 데이비드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으로 세 나라는 중국을 겨냥하는 군사동맹으로 가는 길을 내디뎠다. 한·미·일 정상은 공동의 이익과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지역적 도전·도발·위협에 대해 서로 ‘협의’할 것을 공약했다. 이어 인도·태평양 지역과 그 너머를 협력 공간으로 호명하고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 등을 언급하며 역내 평화와 안정을 악화시키는 행동으로 중국을 특정했다. 여기서 ‘협의’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이 협의 공약으로 한국은 대만 문제나 남중국해 영토분쟁 등에서 미국·일본의 공동대응 요구에 응해야 하는 실질적 의무를 지게 됐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번 합의를 동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로 나아가는 시작점이 될 수... -
사모펀드에 발목잡힌 녹색전환
기후정의 활동가들 시위에서 표적이 되는 ‘나쁜 기관’ 목록에는 은행과 함께 사모펀드를 비롯해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의 이름이 꼭 들어간다. 무슨 까닭일까? 각종 희소자산의 소유와 독점적 통제, 여기서 얻는 지대가 불로소득 자본주의의 핵심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소유자 자본주의로부터 소유와 통제가 분리 또는 반분리된 법인 자본주의로 변모했듯 불로소득 자본주의에도 비슷한 전개가 보인다. 가계와 기업 투자를 대신하고 자기자산도 굴리는 전문적 자산운용업과 각종 투자펀드가 발전한 것은 이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경제주체의 자산 선호와 투자가 유례없이 중요 변수가 된 자산·부채경제시대, 그리하여 자본주의 방정식이 판이하게 달라진 것과 궤를 같이한다.글로벌 자산운용업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차이가 있다. 벤자민 브라운은 금융자산 투자 중심으로 보면서 자산운용자의 수동성을 강조한다. 반면 주택·에너지·사회 인프라 등 실물 자산투자를 중시하고 적극적 통제가 자산운용업의 특징이라 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