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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성탄절이 다가온다. 연말의 흥분감이 더해져 괜스레 마음이 분주하다. 종교적 믿음을 떠나 이맘때면 늘 그랬던 것 같다. 곳곳을 밝힌 트리 장식, 동심과 함께하는 산타클로스, 감각을 콕 건드리는 디자인 상품, 가족애를 돋우는 특선영화 같은 게 12월 대중의 정서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거다. 기원을 따르자면, 중세 유럽 미술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탄생의 이미지는 오늘날 격앙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화가는 성서에 기반해 내용을 신성하게 재현했고 높은 신분의 후원자가 원하는 도상을 그려 넣으며 종교화의 무게감에 충실했다. 아기 예수에게 예배하는 동방박사의 모습은 특히 빈번한 주제로 회화에 등장했다. 플랑드르 화파 히에로니무스 보스도 그 장면을 세 폭 제단화로 묘사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림 분위기가 음습하여 기묘할 정도다. 비범하고 독창적인 예술가 자신의 개성이었을까? 당대 현실을 풍자하던 방식이 그랬던 걸까? 인류 사상 최악의 사망자를 낸 흑사병이 대륙 전역으로 번... -
신문 오리기
1970년대 한국 미술계는 전후의 멍에를 딛고 근대화를 열망하던 한편, 팝아트나 옵티컬아트 등 서구 미술사조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데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자기 성찰을 거친 예술에의 추동 의지가 들끓었고, 실험적이며 전위적인 조형 의식이 발현되었다. 이 같은 배경 속에 개최됐던 그룹전 ‘ST’에서 성능경은 매일 그날 발행된 신문을 벽면에 붙이고 면도칼로 기사를 오려내는 행위를 했다. 그는 이후에도 신문을 가지고 비슷한 작업을 반복하면서 정보를 지우고 해체했다. 정부의 언론 검열 및 탄압을 비판한 미술가의 이런 퍼포먼스는 당시 매우 도발적이었다. 거대 권력에 저항하는 개인의 자유를 드러내는 동작이 긴장 속에서 수행되었다. 유신체제하에 창작을 모색했던 예술가의 신념과 처지가 그랬다. 이제 팔순을 앞둔 원로작가 성능경은 올해만 해도 국내외 유수의 여러 전시에 초대되며 한국의 개념미술을 널리 알리고 있다. 이러한 주목은 단색화 시장에 편중됐던 그간 세태에 대한 하나... -
명화의 수난과 인류사
이 그림은 언제까지 우리의 눈길을 잡아끌까? 바로크 시대 벨라스케스가 그린 비너스의 모습이 고혹적인 자태로 욕망을 자극한다. 다만 화가의 의도는 시선이 단순히 거기 머무르게 하지만은 않았다. 화면 속에 거울을 두어 투영의 공간, 탐구할 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림을 보는 시선의 방향은 거울로 이동하고 반사되어 이곳을 비춘다. 응시하던 자가 역으로 입장을 관찰당하는 쪽에 놓이게 된다.한때는 금기를 어기고 그려져 한 스페인 귀족이 몰래 소장하던 작품인데, 산업혁명 즈음 국경을 넘어 영국의 저택에 걸렸다가 1906년부터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대중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14년, 어느 여성이 이 그림을 난도질한 사건이 있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그녀의 행위는 명백한 반달리즘이었지만, 그로부터 4년 뒤 영국이 여성의 정치 참여를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다양한 역경이 있었는가를 예증하는 일화라고도 하겠다. 복원을 거쳐 전시됐던 이 회화는 이달 초 환경운동가... -
도시의 열망과 참사 사이
미술에 담긴 욕망을 살피다 보면, 노스탤지어의 어렴풋한 그림자 같은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를 다루는 작가들은 꿈에 반복돼 나오는 과거의 잔해를 그리거나, 이제는 사라져버린 상실의 빈터를 애써 채우는 작업을 하는 것 같다. 그들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자연을 역행하기에 어렵고, 돌이킬 수 없음을 부정하기에 괴롭다. 망각에 부쳐진 것들은 불완전한 파편으로만 부유하고, 가슴속 통한으로는 깊이 파고들어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고통이 된다.이정성 작가의 작품에서 보는 그림자는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작가는 군중 속 익명의 존재로 사라진 사람을 찾아 그렇게 그리곤 했다. 대입 즈음 촌에서 도시로 상경한 작가 자신이 놓고 싶지 않던 초심의 자아 모습일 수도 있겠다. 나아가 그는 재난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과 그 주변의 흔적을 묘사해왔고, 참사의 무게를 간명하게 덮어버린 거대 산업과 모종의 권력도 암시해왔다. 사람의 실종이 결과라면, 그것의 원인에는 인간성의 소멸이 있었다. 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어디 계시나요
미술이 현실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될까? 안 된다.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전이 있던 1980년의 정부는 그랬다. 당시 대관 장소이던 문화예술진흥원은 일방적으로 전기를 끊고 출입문을 막았다. 결국 동인들은 개막 당일 촛불을 밝혀 관람객을 맞았다. 그 사건 이후에도 정부는 작품 압수와 연행을 일삼았고, 그에 맞선 미술인들의 힘겨운 저항이 한동안 이어졌다.문화예술진흥원의 후신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에서 노원희 작가의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 ‘현실과 발언’의 창립 구성원으로, 약자 개인의 존엄과 사회 문제를 다뤄온 그녀가 이렇게 조명받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현실을 비판하던 청년작가가 어느덧 원로작가가 되어 같은 공간에 다르게 서 있음을 우리는 본다.그러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책임 의식은 여전히 더디다. 수천명의 예술가를 블랙리스트로 낙인찍고 배제했던 비상식적 과오를 스스로 면죄한 것일까. ‘피해자와 예술현장의 관점에서’ 반성하고 쇄신하겠다던 한때의 발... -
쉿!
여성의 몸을 그리는 것이 제한되던 시절, 화가는 인간이 아닌 여신이나 신화적 인물을 그려 금기를 우회했다. 그렇게 재현된 그림은 비너스, 다나에, 밧세바가 그랬듯이 반라의 몸으로 남성의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 많았다. 대상화된 그녀에게는 성스럽거나 육감적인 표현이 늘 따라다녔다. 서양미술사는 여성 몸의 사실성을 수용하기까지 수세기의 시간을 더 소요해야 했다.이란 태생 탈라 마다니가 그린 여성의 몸은 어떨까? 그것은 똥이다. 더럽고 끈적거리는 분변 질감의 신체다. 작가는 ‘똥 엄마’로 지칭된 인물이 홀로 무기력하게 집 안을 돌아다니면서 오염 물질을 여기저기 묻히는 광경을 보여준다. 작품 속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통념의 여성성이 부정되고 모성은 파괴된다. 아름다움은 없고 느리고 늘어진 몸, 아니 몸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운 비체(卑體)가 그래도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발한다.작품의 블랙유머 이면에 비치는 건 외부에 그리 저항적이지도, 유려하지도 않은 나약하고 비천한 것. ... -
빚진 감상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꼽으라면 무엇이 거론될까. 축약된 몇개의 후보에 필시, 빈센트 반 고흐의 명화가 들어갈 만하다. 고흐는 전 세계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화가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그는 비운의 운명으로 생을 마감했다. 고흐가 살았던 당대는, 혈육 테오를 제외한 아무도 그의 작품을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오만이 고흐를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원한 후원자요, 새로운 사조의 인물을 알아본 선구자였다.고독한 예술가의 절망이 밤하늘의 소용돌이와 노란 별빛에 섞여 이제는 미학적으로 독해되지만, 비극을 감수해야 했던 당사자 고흐의 처지는 결코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 같은 예술가의 자학과 분열에 얼마간 빚진 감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오늘날 우리 사회에 고흐가 살고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비록 주류 시장 트렌드에 맞지는 않지만, 시대를 앞서는 매체 실험과 개성으로 작가 공모에 선정되지 않았을까? 지역의 ... -
무슨 일 하십니까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의 명대사다. 극중 교사는 학생에게 부모의 직업을 묻고, 완력을 쓴 처벌도 스스럼없이 한다. 관객들은 과거 학창 시절 경험한 바를 떠올리며 공감했다. 그땐 그랬다.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이제는 학부모가 자기 학력과 지위를 내세워 교사를 압박하는 사례가 드러난다. 교권의 실추, 교육계 위기론이 정점을 찍고 있다. 인권을 가르쳐야 할 학교에서 인권이 보장되지 못하는 현실이 공론으로 떠오른다. 유사한 사례를 미술에서도 이야기해볼까. 미술은 지난 몇년간 예술인복지법, 표준계약서, 미술진흥법 관련 논의의 길을 걸어왔다. 미술인 기본 처우와 관련한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저히 낮은 보수, 불공정 계약이 만연한 데다, 순수 창작자 권리를 소외시키는 산업이 팽배해서다. 저작권을 뺏기고 생활고를 비관하며 안타까운 선택을 한 미술인이 최근에도 있었다. 직업적 명운을 스스로 끊고 사회에 등 돌린 이들은... -
활어회
세상의 모든 것을 그림으로 다 그릴 수 있을까? 이세준 작가는 이를 자기 회화의 질문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등장하는데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 산 것과 죽은 것이 그렇다. 횟집 수조 안의 활어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는 존재를 보여준다. 인공 수조 속 자연 생물이라는 역설을 내고, 이세준의 작업에 자주 포착되는 도상이 된다.이제는 그 도상의 의미가 우리 국민에게 남다르게 적용될 것 같다. 방사능에 오염된 물고기이냐, 아니냐가 첨예의 관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산물을 보며 안전과 불안, 건강과 위해의 양가성을 떠올린다. 역사에서 해방과 전쟁, 에너지원과 살상무기 사이에 있던 원자력이 밥상머리 위 논의 화두가 된 현실을 맞게 됐다. 더는 피할 수 없다.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가 방류된다. 그것이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과학적 검증과 사회 합일보다는 정치 갈등의 난... -
다비드는 어디에
유럽 인본주의가 전성을 누리던 1504년, 당시 20대 신예 작가 미켈란젤로는 구약의 한 장면을 대리석으로 완성한다. 침략자 골리앗과 싸우기 전 다비드의 모습이었다. 젊은 나신으로 묘사된 다비드는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돌멩이를 손에 쥐고 적진을 향해 서 있다. 그 강인한 육체와 얼굴에 실린 용맹은 신의 가호가 어느 편인가를 이미 짐작하게 한다.골리앗을 이긴 다비드는 강자에 맞서 정의를 구현한 약자를 대변해왔다. 자만에 취한 기성에 도전한 패기의 젊음이었고, 한계를 초월한 인간 의지의 현현이었다. 예술가들은 이 고전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소재를 참신하게 변형해왔는데, 바로크 시대 카라바조도 그중 한 명이다. 그런데 성격이 괴팍했던 카라바조는 자신의 죄를 사면받기 위해, 자기 얼굴을 골리앗의 잘린 머리가 들어갈 위치에 그려 넣었다. 폭행을 저지르고 자책하던 그는 젊은 양심을 투영한 다비드를 통해 새로 구원받고 싶었던 모양이다.우리 주변에 청년 다비드는 어디 있을까?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