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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합계출산율 수치는 잊자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EBS <다큐멘터리K-인구대기획 초저출생> 인터뷰에 응한 미국의 한 교수가 한국의 지난해 합계출산율 수치(0.78명)를 듣고 보인 반응이 인터넷 ‘밈(유행 게시물)’이 됐다. ‘저출생 공포’는 점차 강해지고 있다. 최근 통계청은 내년 합계출산율이 0.6명대로 내려앉을 것이라는 장래인구추계 전망을 내놓으며 두려움 하나를 더 얹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통계들이 있다. 통계청 발표 하루 전 보건복지부는 고립·은둔 청년이 54만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들 4명 중 3명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1020세대의 사망 이유 1위가 자살이기도 하다. 지난해 자해·자살 시도자의 46%가 10~20대였다.세계 ‘꼴찌’ 출산율이라는 수치 반대편에는 자살률, 산재사망률, 성별 임금격차 모두 1위라는 통계가 거울처럼 서 있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해 2배나 높다. 산재사망률도 OECD 국가 ... -
형, 미스터 린턴 그리고 놈놈놈
원래는 이 정부의 굳건한 남성연대에 대해 쓰려고 했다. 우격다짐으로 방송을 장악하는 모양새 뒤에 숨어 있는 남성연대 그리고 그에 맞서 신당을 만들겠다는 또 다른 남성의 언어는 다른 측면에서 더욱 문제적이라고 쓰려고 했다. 시작은 박민 KBS 사장 당시 후보자의 지난 7일 국회 인사청문회였다. KBS 사장 자리를 제안한 인물이 이 위원장 아니냐는 질문에 박 후보자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석에서 어떻게 부르느냐’는 질문에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왜 자꾸 서로 형이라 호칭하는지 모르겠어요.” 한 여성 취재원은 팀장을 ‘형’이라 칭하는 남성 동료들 앞에서 곤혹스럽다고 했다. 자신이 참석하지 못한 회식 자리에서 팀장과 동료들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 당혹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같이 밥 먹고 술 먹으며 일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굳건한 연대,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형’이라는 호칭으로 대동단결하는 남성들의 네트워크에서 여성들은 겉돌거나 배제된다. 이동관 위원장만 ... -
도망치는 여성 정치인은 그만 보고 싶다
뉴질랜드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케이트 셰퍼드 신호등’이 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케이트 셰퍼드를 기리는 신호등이다. 뉴질랜드 최초 여성 신문사인 ‘화이트 리본’에서 일했던 셰퍼드는 교회여성절제회를 설립한 후 처음 의회에 청원을 넣는다. 여성들을 술집 종업원으로 고용하지 말고, 청소년에게 술을 판매하지 말라는 청원이었다. 의회는 단체 의견을 묵살했다. 셰퍼드는 이때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참정권 운동을 시작한다. 1888년 처음 5000명분의 서명을 제출했지만 의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1만여명, 2만여명 서명을 이어갔다. 뉴질랜드 성인 여성 인구 4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 3만2000여명의 서명을 모은 1893년이 되어서야 의회는 드디어 여성 참정권 법안을 통과시킨다. 세계 최초다.투표권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여성도 있었다. 영국에선 ‘서프러제트’라는 운동가들이 서명하거나 청원하는 방식을 넘어 단식 투쟁, 우체통에 불 지르기와... -
거부하라, 우리 안의 여성혐오
지난해 9월14일 스토킹을 당하다 서울 신당역에서 살해당한 서울교통공사 직원의 1주기가 다가온다. 그의 죽음 이후 스토킹 처벌법에서 반의사불벌 조항이 삭제되고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이 제정됐다. 그의 죽음으로 법이 개정되고 새로운 법이 만들어졌으니 세상이 많이 바뀌어야 했건만 ‘안전한 일터’는 요원하다. 노동법률단체 직장갑질119 등이 지난달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 직장인 3명 중 1명은 ‘직장 내 성희롱’을, 10명 중 1명은 ‘직장 내 스토킹’을, 4명 중 1명은 ‘직장 내 성추행·성폭행’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지난달에도 일하러 가던 여성이 성폭행당해 사망했다. 최윤종은 서울 관악구의 한 생태공원 야산 등산로에서 알지 못하는 여성을 금속 재질 흉기로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성폭행했다. 피해자는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숨졌다. 지난 5월에는 서울 금천구에서 교제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30대 남성이 조사 직후 상대 여성을 살해했다. 그는 피해... -
김현숙 장관의 양성평등주간을 기대한다
차별이라 말하긴 쉽다.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고 꼼꼼하게 실행하는 일은 어렵다. ‘여성가족부 폐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일곱 글자는 국가가 더 이상 성평등 정책을 중요하게 보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나아가 호주제 폐지 이후 어렵게 일궈온 성평등 정책을 후퇴시키고 하나씩 쌓아올린 정책 역량을 깎아 먹는 시작점이었다.그로부터 1년이 지나고 우리 사회는 차곡차곡 살뜰하게 이뤄지는 ‘성평등 정책의 후퇴’를 지켜보고 있다. 정부 정책에서 ‘여성’과 ‘젠더’ ‘성평등’은 사라지고 있다. 성평등 주무 부처가 나서서 여성을 ‘삭제’하면 정부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성별 다양성 의제는 후순위로 미뤄진다. 육아휴직이나 육아기 단축근로제는 좋은 제도지만 성인지적 관점 없이 실행되면 여성에게 불리한 정책이 될 수 있다. 정부가 기업에 단순히 육아휴직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하면 사회가 주 양육자라고 호명하고 임금이 적은 여성들이 주로 쓰게 ... -
바보야, 문제는 노동시간 단축이야
“엄마, 학교에서 한 거야.” 며칠 전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가 ‘집안일 백과사전’이라는 활동지를 내밀었다. “집에서 누군가 해야만 하는 집안일들입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주로 누가 하고 있을까요?” 장보기, 빨래 널기부터 식사 준비, 설거지하기 등 15가지 집안일이 정리된 활동지였다. 아이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중복 답변 결과 엄마 5가지, 아빠 5가지, 할아버지 6가지였다. 식물 기르기 등 할아버지가 단독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표시한 것이 많았다. 아이의 눈은 정확했다. 우리 부부는 9년간은 친정 엄마 도움으로,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는 아버지와 합가를 하면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들을 키웠다. 운이 좋은 케이스다.27일 통계청이 이 같은 현상을 분석해 발표했다. ‘무급 가사노동 평가액의 세대 간 배분 심층분석’ 자료를 보면 2019년 기준 노년층(65세 이상)의 가사노동 생산액은 80조9000억원으로 2014년(49조2040억원)에 견줘 크게 늘었다. 인생을 쉬... -
희생을 먹고 사는 학교 급식실의 ‘비극’
엄마는 ‘다른 사람이 차려준 밥’을 사 먹는 걸 늘 아까워했다. “찬을 이렇게 조금 내고 이 돈을 받는다니, 내가 만들면 훨씬 좋은 재료로 더 맛있게 할 수 있는데.” 말하지 못했지만 생각했다. ‘엄마 밥에는 엄마 노동력에 대한 대가가 포함 안 돼 있으니까요.’ 엄마의 노동은 늘 공짜였다. 계산이 되지 않으니 엄마 음식은 사서 먹는 음식보다 저렴한 게 당연했다. 가부장제는 그렇게 수많은 엄마들의 노동을 공짜로 갈아 썼다. ‘학교 급식’이 생겨나며 엄마들은 겨우 도시락 싸는 일에서 자유로워졌다. 중식, 석식 2개의 도시락을 싸다가 해방됐다고 기뻐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엄마의 공짜 노동은 학교 급식 조리사의 노동이 되면서 ‘최저임금’을 겨우 맞추는 값이 됐다. 중장년 여성들의 일은 ‘반찬값’ 벌러 나온 노동으로 치부되고 여성이 집에서 맡아왔던 가사노동의 연장선으로 이해되며 저평가됐다. 이들은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에 열악한 임금에 대해 말할 ‘힘’도 없었다. 2017년 한 국회... -
화장실을 보면 알 수 있다
한 흑인 여성이 800m나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가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뛰고 또 뛴다. 1960년대 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시절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최초로 일한 흑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의 장면이다. 캐서린 존슨은 로켓 개발을 위해 아무도 할 수 없는 계산을 해내지만 흑인 여성이기에 유색인종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고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으며 심지어 공용 커피포트조차 쓸 수 없다. “이곳엔 제가 갈 화장실이 없습니다. 서관 전체에도 없어서 800m를 나가야 해요. 알고 계셨어요?” 어느 비 오는 날 캐서린은 “필요할 때마다 안 보이던데 대체 매일 어딜 가는 거야”라며 성내며 묻는 백인 상사에게 흠뻑 젖은 채 울부짖듯 답한다. “죄송하지만 화장실에 가야겠어요.”2023년 한국의 현대자동차 공장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화장실은 ‘가기 힘든 곳’이다. 남성들만 있던 공장, 여성 화장실이 거의 없었다.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
“많이 나아지지 않았느냐”고 묻는 당신에게
“저희도 좀 분석해주시면 안 돼요?”지난 1월 세계 여성의날(3월8일)을 위한 기획 기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성별 임금격차는 27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를 달리고 있지만 언론에서 그 원인을 다각도로 들여다본 적은 거의 없다. 이제는 차별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신입 채용부터 얼마나 공정한지 들여다보고자 했다. 공공기관들이 면접 성비·최종 합격자 성비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국회의원 보좌직원들과 어떻게 데이터를 구할 수 있을지 상의하고 있을 때였다. 한 보좌직원이 “국회야말로 제일 분석이 필요한 곳”이라며 국회도 분석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얼마 후 국회의원 보좌직원 성비 데이터를 확보했다. 이를 분석한 결과 가장 높은 직급인 4급 보좌관·5급 선임비서관에 여성이 아예 없는 국회의원실이 133개(44%)에 달한다는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 수치를 분석하고 생각보다 비율이 높아서 적잖이 놀랐다. 여성 보좌직원들은 “국회야말로 성평등에서 제... -
여성들의 피해는 왜 늘 뒷전으로 둘까
지난해 9월14일 서울 신당역에서 순찰을 돌던 여성 역무원이 사망한 다음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신당역을 찾아 “국가가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했다.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터’에서 여성이 일하다 죽은 끔찍한 사건, 여성들의 분노가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때처럼 커질까 두려웠을까. 그로부터 한 달 뒤 한 장관은 브리핑을 열어 스토킹 범죄에 적용되던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폐지하고, 온라인상 스토킹 범죄도 처벌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스토킹처벌법 개정안을 ‘직접’ 발표했다. 당시 법무부는 “11월 국회 제출 후 연내 국회 통과 추진 예정”이라는 일정표도 제시했다. 장관이 직접 브리핑을 열 만큼 사안을 챙기고 있다는 인상을 줄 법도 하지만 이전에 법무부가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는 게 순서다. ‘반의사불벌죄’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형사처벌을 할 수 없는 범죄다. 여성에 대한 폭력 범죄에는 유난히 반의사불벌죄 조항이 끼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