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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의 불평등
‘원치 않은 임신’은 두려운 일이었다. 두 아이를 기르는 지금도 그렇다. ‘원치 않은 임신’은 자궁이 몸 안에 자리한다는 이유로 여성이 겪어야 하는 근원적 불안일지 모르겠다. 초경 때 엄마는 말했다. “몸을 잘 간수해야 해.” 13세 초등학생은 조심하지 않으면 임신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산술적으로 30년간 ‘원치 않은 임신’을 걱정하며 살아왔다면 과장일까. 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던 기간은 ‘딱 2년’이었다. 두 아이를 품었던 시간이다. 안전한 남자와 사회가 용인하는 결혼제도 안에서 임신을 계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돌아보면 자궁은 불평등의 근원이었다. 임신과 출산만큼 여성의 삶을 뒤흔드는 사건은 없다. 혼자 임신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안전한 임신 기간’에도 남편에게는 자궁이 없다는 사실에 가끔 당혹스럽게 화가 났다. 함께 아이를 낳기로 했지만 입덧도, 출산도 자궁이 있는 몸에서만 가능했다. 괴로운 건 혼자인데 부모는 함께 된다는 것이 불공평하다... -
거울처럼 닮은 한국과 일본의 여성 기자들
언론사 등 간부급 여성 비율 적어한국의 성별임금격차 OECD 최고가사·돌봄 노동 상시적 저평가도의사결정구조에 여성 배치 늘어야“일, 육아, 가사노동. 3가지 일을 함께 해낼 자신을 원하지 않습니까?” 일본의 한 제약사 음료 광고의 여성 모델 옆에 붙은 문구다. 남성 모델 옆의 문구는 다르다. “시대가 변하면 피로의 형태도 변하니까요.” 여성들을 위한 매체 ‘코먼스’를 창간한 일본 여성 기자들은 이 광고가 일본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해 여성을 1년 일찍 입학시키자는 국책연구원 보고서가 나오는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에? 똑같아, 똑같아요.” 지난 4일 일본 기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똑같다’는 맞장구가 나올 때마다 함께 웃었지만 뒤끝은 씁쓸했다. 여성이 3가지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 그런 압력이 여성에게 과도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상황은 한국과 일본이 흡사했다.‘코먼스’를 ... -
2004년 밀양 그리고 2024년 진주
2004년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한공주>에서 공주는 나직이 말한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피해자는 1년여 집단 강간 피해를 입고도 도망치듯 전학을 갔고 전학 간 학교에도 가해자들의 부모가 찾아와 다시 내몰렸다.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밀양 물을 흐렸다”며 피해자 탓을 했고 언론에 피해자 신상을 노출했다. 가해 고등학생 44명 중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잊을 만하면 일부 유튜버들은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본인들이 심판하겠다며 ‘사적제재’에 나선다. 피해자가 설 곳은 여전히 그 어디에도, 없다. 유튜브 계정주들의 돈벌이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겠다. 끊임없이 불거지는 ‘사적제재 논란’은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겪은 처참한 결말이 현재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고 있다 보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질문은 ‘2004년 밀양과 2024년 진주는 얼마나 달라졌는가’다.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무기로, 무죄추정의 원칙을 이유로 피해자는 ... -
44년 만에 ‘피해자’에서 ‘증언자’로
5·18 계엄군의 성폭력 피해40여년간 ‘2차 피해’로 고통첫 증언 후 다른 증언 이어져이제 나머지 숙제는 ‘우리 몫’당신 잘못이 아니었습니다“아따 참 오래 걸렸네요.”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이 진상규명됐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일부 계엄군이 자행한 강제추행·강간·성고문 등 피해 사건 중 16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조사를 위한 법적 권한을 가진 국가기관이 과거사 성폭력 사건의 종합적인 피해 실상을 규명한 것은 처음이다. 지난해 12월 한 피해자는 위원회로부터 “국가가 당신의 피해가 사실이라 인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숨 푹 놓이고 가벼워진 기분이었어요. 위안부 할머니들 심정이 이해됐어요. 피해를 인정받고 사과받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예요.”이들이 국가로부터 피해를 인정받는 데는 43년이나 걸렸다. 1990년대만 해도 5·18민주화운동은 ‘폭도’에 의한 것... -
잠시 합계출산율 수치는 잊자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EBS <다큐멘터리K-인구대기획 초저출생> 인터뷰에 응한 미국의 한 교수가 한국의 지난해 합계출산율 수치(0.78명)를 듣고 보인 반응이 인터넷 ‘밈(유행 게시물)’이 됐다. ‘저출생 공포’는 점차 강해지고 있다. 최근 통계청은 내년 합계출산율이 0.6명대로 내려앉을 것이라는 장래인구추계 전망을 내놓으며 두려움 하나를 더 얹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통계들이 있다. 통계청 발표 하루 전 보건복지부는 고립·은둔 청년이 54만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들 4명 중 3명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1020세대의 사망 이유 1위가 자살이기도 하다. 지난해 자해·자살 시도자의 46%가 10~20대였다.세계 ‘꼴찌’ 출산율이라는 수치 반대편에는 자살률, 산재사망률, 성별 임금격차 모두 1위라는 통계가 거울처럼 서 있다.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에 비해 2배나 높다. 산재사망률도 OECD 국가 ... -
형, 미스터 린턴 그리고 놈놈놈
원래는 이 정부의 굳건한 남성연대에 대해 쓰려고 했다. 우격다짐으로 방송을 장악하는 모양새 뒤에 숨어 있는 남성연대 그리고 그에 맞서 신당을 만들겠다는 또 다른 남성의 언어는 다른 측면에서 더욱 문제적이라고 쓰려고 했다. 시작은 박민 KBS 사장 당시 후보자의 지난 7일 국회 인사청문회였다. KBS 사장 자리를 제안한 인물이 이 위원장 아니냐는 질문에 박 후보자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사석에서 어떻게 부르느냐’는 질문에 “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왜 자꾸 서로 형이라 호칭하는지 모르겠어요.” 한 여성 취재원은 팀장을 ‘형’이라 칭하는 남성 동료들 앞에서 곤혹스럽다고 했다. 자신이 참석하지 못한 회식 자리에서 팀장과 동료들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 당혹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같이 밥 먹고 술 먹으며 일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굳건한 연대,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고 ‘형’이라는 호칭으로 대동단결하는 남성들의 네트워크에서 여성들은 겉돌거나 배제된다. 이동관 위원장만 ... -
도망치는 여성 정치인은 그만 보고 싶다
뉴질랜드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케이트 셰퍼드 신호등’이 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케이트 셰퍼드를 기리는 신호등이다. 뉴질랜드 최초 여성 신문사인 ‘화이트 리본’에서 일했던 셰퍼드는 교회여성절제회를 설립한 후 처음 의회에 청원을 넣는다. 여성들을 술집 종업원으로 고용하지 말고, 청소년에게 술을 판매하지 말라는 청원이었다. 의회는 단체 의견을 묵살했다. 셰퍼드는 이때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참정권 운동을 시작한다. 1888년 처음 5000명분의 서명을 제출했지만 의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1만여명, 2만여명 서명을 이어갔다. 뉴질랜드 성인 여성 인구 4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 3만2000여명의 서명을 모은 1893년이 되어서야 의회는 드디어 여성 참정권 법안을 통과시킨다. 세계 최초다.투표권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여성도 있었다. 영국에선 ‘서프러제트’라는 운동가들이 서명하거나 청원하는 방식을 넘어 단식 투쟁, 우체통에 불 지르기와... -
거부하라, 우리 안의 여성혐오
지난해 9월14일 스토킹을 당하다 서울 신당역에서 살해당한 서울교통공사 직원의 1주기가 다가온다. 그의 죽음 이후 스토킹 처벌법에서 반의사불벌 조항이 삭제되고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이 제정됐다. 그의 죽음으로 법이 개정되고 새로운 법이 만들어졌으니 세상이 많이 바뀌어야 했건만 ‘안전한 일터’는 요원하다. 노동법률단체 직장갑질119 등이 지난달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 직장인 3명 중 1명은 ‘직장 내 성희롱’을, 10명 중 1명은 ‘직장 내 스토킹’을, 4명 중 1명은 ‘직장 내 성추행·성폭행’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지난달에도 일하러 가던 여성이 성폭행당해 사망했다. 최윤종은 서울 관악구의 한 생태공원 야산 등산로에서 알지 못하는 여성을 금속 재질 흉기로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성폭행했다. 피해자는 사건 발생 이틀 만에 숨졌다. 지난 5월에는 서울 금천구에서 교제폭력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30대 남성이 조사 직후 상대 여성을 살해했다. 그는 피해... -
김현숙 장관의 양성평등주간을 기대한다
차별이라 말하긴 쉽다.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고 꼼꼼하게 실행하는 일은 어렵다. ‘여성가족부 폐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일곱 글자는 국가가 더 이상 성평등 정책을 중요하게 보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나아가 호주제 폐지 이후 어렵게 일궈온 성평등 정책을 후퇴시키고 하나씩 쌓아올린 정책 역량을 깎아 먹는 시작점이었다.그로부터 1년이 지나고 우리 사회는 차곡차곡 살뜰하게 이뤄지는 ‘성평등 정책의 후퇴’를 지켜보고 있다. 정부 정책에서 ‘여성’과 ‘젠더’ ‘성평등’은 사라지고 있다. 성평등 주무 부처가 나서서 여성을 ‘삭제’하면 정부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성별 다양성 의제는 후순위로 미뤄진다. 육아휴직이나 육아기 단축근로제는 좋은 제도지만 성인지적 관점 없이 실행되면 여성에게 불리한 정책이 될 수 있다. 정부가 기업에 단순히 육아휴직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하면 사회가 주 양육자라고 호명하고 임금이 적은 여성들이 주로 쓰게 ... -
바보야, 문제는 노동시간 단축이야
“엄마, 학교에서 한 거야.” 며칠 전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가 ‘집안일 백과사전’이라는 활동지를 내밀었다. “집에서 누군가 해야만 하는 집안일들입니다. 우리 가족 중에서 주로 누가 하고 있을까요?” 장보기, 빨래 널기부터 식사 준비, 설거지하기 등 15가지 집안일이 정리된 활동지였다. 아이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중복 답변 결과 엄마 5가지, 아빠 5가지, 할아버지 6가지였다. 식물 기르기 등 할아버지가 단독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표시한 것이 많았다. 아이의 눈은 정확했다. 우리 부부는 9년간은 친정 엄마 도움으로,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는 아버지와 합가를 하면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들을 키웠다. 운이 좋은 케이스다.27일 통계청이 이 같은 현상을 분석해 발표했다. ‘무급 가사노동 평가액의 세대 간 배분 심층분석’ 자료를 보면 2019년 기준 노년층(65세 이상)의 가사노동 생산액은 80조9000억원으로 2014년(49조2040억원)에 견줘 크게 늘었다. 인생을 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