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⑥“우린 왜 가해자 편에 기울었을까” 판사들의 반성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둘러싼 시민들의 분노가 법원으로 향하는 지금, 판사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어릴 때부터 수재로 불리며 합격률 3%의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은 엘리트들이 집결한 법원. 그 법원이 지나치게 낮은 형량의 판결로 n번방 범죄자들을 키웠다는 비판을 판사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들이 디지털 성폭력 범죄에 낮은 형량을 선고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바깥에선 잘 알기 어려운 법원 내부의 사정이 궁금했다. 경향신문은 어렵게 현직 판사 4명을 각각 심층 인터뷰했다. 성폭력 범죄 재판을 담당해본 경험이 있는 판사들이다. 이들에게 n번방 사건과 성폭력 범죄를 대하는 사법 시스템에 관해 물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연 판사들은 공통적으로 디지털 성범죄 재판의 법정이 가해자 편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말했다. 재판에서 피해자 목소리는 배제돼 있다고 했다. 피해자 권리를 보장하는 법은 법전엔 있지만 법정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 -
⑤“성범죄 재판부 배치, 별도 자격 없고 사실상 무작위”
성착취물을 제작·판매한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재판받을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재판장 이현우)는 ‘성폭력범죄 전담 재판부’다. 하지만 성범죄 재판부 구성 과정에 성인지 감수성, 성비 등은 사실상 고려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올해 전국 법원에는 175개 성범죄 전담 재판부가 운영되고 있다. 소속 법관은 363명이다. 면면을 보면 이름만 ‘성범죄 전담’인 곳이 대부분이다. 수원지법 형사12부는 ‘국민참여재판, 선거, 식품, 보건, 성폭력 전담 재판부’다. 최대 법원인 서울중앙지법만 해도 성범죄 전담은 모두 13개 재판부가 지정돼 있지만, 실제로 성범죄 사건만 전담하는 재판부는 4개다. 나머지는 외국인, 아동학대 등 사건도 함께 맡는다.법원은 어떤 기준으로 성범죄 전담 재판부를 구성하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사무분담위원회 회의 내용은 비공개”라고 했다. 성범죄 전담 재판부에 근무한 한 판사는 “특별한 자격을 요하지... -
⑤처음부터 수사관은 무고죄 운운…“내 말 믿어줄까, 두려웠다”
‘나만 참고 입 다물면 돼.’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인 ㄱ씨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가해자는 대학교수였고, ㄱ씨는 제자였다. 피해는 고통스러웠지만 고소할 수 없었다. 좁은 학계에서 보는 눈이 많았다. 그대로 공부하면 미래가 보장돼 있었다.ㄱ씨가 가해자를 고소한 것은 학교에서 가해자의 다른 성폭력이 공론화되면서였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침묵하는 사이 다른 피해자가 생긴 겁니다. 전 피해를 입고 문제제기를 안 해 다른 피해자를 만든 잘못을 했습니다. 가해자는 감옥에 가야 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주변에선 ㄱ씨의 고소 결심을 말렸다.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학계에서 매장당할 것이라고 했다.고소했지만, 고소는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경찰에서 검찰로 사건이 넘어가기까지 1년이 걸렸다. 결국 ㄱ씨는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여기는 희망이 없어요.”성폭력 ... -
⑤“앞길 창창한데…” 수사 경찰이 가해자 대변하듯 합의 종용
재판 19명 중 9명 “경험” 생계·피로 등 이유로 수용 현행법상 형 감경 요소에‘합의’ 없지만 재판엔 반영 안돼도 ‘노력’으로 평가 피해자들 “무섭고 싫었다”가사도우미 성폭행 혐의를 받은 김준기 전 동부그룹 회장에게 법원은 지난 17일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서울 강남 클럽 버닝썬에서 고객 신체를 몰래 촬영해 유포한 클럽 MD에게도 같은 날 같은 형이 선고됐다. 두 사건에서 법원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사유로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점을 감안했다.성폭력 범죄에서 친고죄 규정은 폐지됐지만 친고죄의 그림자는 남아 있다. 친고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는 범죄다. 고소를 취소시키기 위해 가해자가 합의를 종용하며 2차 피해가 발생한다는 비판을 받고 2013년 폐지됐다. 그러나 합의는 수사기관이 가해자에게 어떤 처분을 할지, 법원이 어느 정도의 형량을 매길지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친다.합의를 가해자에게 ... -
수년간 지켜본 성범죄 재판…판사들은 방조자와 다름없었다
한국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을 한 단어로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마녀’(트위터 활동명·@C_F_diablesse)는 “동상으로 있으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 ‘우리가 필요하면 갖다 쓸게,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그 자리에 박혀 있어’라는 거죠. 동상이길 거부하면 공격받아요. 사회가 생각하는 ‘순결한 피해자상’에 피해자가 맞지 않으면요.”n번방 사건에 대한 시민들 분노가 분출되던 지난 11일 마녀를 만났다. 마녀는 성폭력 피해 당사자로서 수사·재판을 경험했다. 그 후 수사·재판 과정을 겪는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했다. 10년의 시간이다. 마녀라는 이름은 성폭력 피해자가 당하는 ‘마녀사냥’에서 따온 것이다. 증인으로 나가는 피해자들의 신뢰관계인으로 법정에 동석하거나 재판을 방청하면서 성폭력 범죄를 둘러싼 형사사법 시스템의 문제점을 속속들이 알게 됐다.신뢰관계인으로 동석해보니피해자보다 가해자 중심 법정사법시스템 문제 절실히 느껴... -
④피해자 배제된 재판…“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텔레그램을 통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한 n번방 사건이 사회적 논란으로 불거진 뒤 트위터엔 이런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분노한 시민들은 n번방의 시발점으로 ‘법원’을 가리켰다. 법원이 성착취물의 해악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낮은 형량을 매겨 범죄의 방조자 역할을 했다는 비판이었다.법원 내 젠더법연구회 판사들이 인터뷰단을 구성해 활동하던 중 지난해 말‘마녀’(트위터 활동명·@C_F_diablesse)를 만났다. 일명 ‘마녀, 디케를 만나다’ 프로젝트다. 마녀는 성폭력 피해 당사자이면서 피해자와 연대하는 익명의 활동가다. 마녀는 피해자 64명을 설문조사했다. 판사들은 마녀를 인터뷰했다. 설문조사와 인터뷰는 전국 법원의 판사들이 볼 수 있도록 법원 내부통신망에 게재됐다. 경향신문은 이 자료들을 확보했다.성폭력 피해자, 활동명 ‘마녀’ 피해자 64명 설문조사 진행 재판 경험한 19명 답변 분석 피... -
④“여성을 물건으로 소비하는 절망적인 사회, 엄중한 처벌이 있었다면 여기까지 왔을까”
지난 13일 오후 1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 청사 정문 앞. 한 여성이 양손에 팻말을 들고 사람들을 향해 섰다. “버닝썬, 김학의, 그리고 n번방”, “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여성은 주부 김수정씨(44)다. 트위터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계정에서 국회와 법원 앞 1인 시위를 할 시민을 모집하는 것을 보고 서울 상계동에서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딸의 엄마이기도 하다. 김씨는 “n번방에 참여한 남성들의 인원수, 남성들이 아이들을 착취한 방식을 보고 분노했다”고 했다. “(n번방 사건을 보면서) 여성이 사람이 아니라 소비되는 물건이 된 느낌이었어요. 이미 너무 오랜 역사를 통해 여성들이 싸워왔는데 하나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은 느낌이었어요. 두렵고 무서웠어요. ‘여자가 사람인가, 여자에게 영혼이 있는가’ 이런 이야기를 400~500년 전에 신학자들이 심각하게 토론했다고 하잖아요. 근대의 남자들이... -
③시민 2만명 “협박·유포는 가중처벌 사유”···재판부는 왜
시민들은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해 협박과 강요를 동반한 경우,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경우, 성착취물을 유포한 경우 등을 가중 처벌해야 할 사유로 들었다. 또 형의 감경 사유는 최대한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동소송 플랫폼 ‘화난사람들’이 지난 1월30일부터 3월31일까지 약 2만명의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국민의견’(국민의견)을 모집한 결과다. 디지털 성범죄는 법관이 참고할 양형기준이 없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올 상반기 중으로 양형기준을 설정할 계획이다. 성폭력위기센터 이사이자 대법원 양형위 산하 양형연구회 회원인 김영미 법무법인 숭인 변호사는 이 같은 ‘국민의견’ 분석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의견서를 8일 대법원 양형위에 전달한다.경향신문이 7일 입수한 ‘국민의견’ 보고서를 보면 응답자 중 75%가 가중 사유 의견을 냈다. ‘범죄 행위의 죄질이 나쁜 경우’(28.1%), ‘취약한 피해자가 대상인 경우’(15.3%), ‘유포 규... -
②아동 성범죄를 “장난”…처벌강화법 ‘골든아워’ 놓친 국회
2012년 통영 초등생 성폭행 살해, 제주 올레길 여성 성폭행, 나주 여아 성폭행 사건… 연초부터 연달아 일어난 강력범죄에 19대 국회에서 아동·여성성폭력대책특위가 열렸다 아동 성폭행 처벌 하한선 상향에 남성 의원들 “과잉처벌 우려” 이유로 반대…결국 무산 감경 사유 제한 개정안도 법사위서 폐기…7년 전 제대로 논의됐다면 n번방 나왔을까“n번방 사건을 보며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2년 19대 국회의 아동·여성대상성폭력대책특별위원회(성폭력특위) 논의 과정을 지켜본 한 전직 여성 국회 보좌관이 6일 말했다. 2012년은 통영 초등학생 성폭행 살해사건, 제주 올레길 여성 성폭행 사건, 나주 여아 성폭행 사건 등 강력 성범죄가 잇달아 일어나 성범죄에 대한 강력 처벌 여론이 비등했던 해다. 그해 9월 국회 성폭력특위는 이례적으로 입법 권한을 부여받아 아동·청소년성보호법과 성폭력특례법을 전부 개정하는 대대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한두 조항만 ... -
①여성이 죽고, 분노해야…법은 바뀌었다
1953년 처벌 규정 마련 뒤 친고죄 폐지되는 데 60년 2018년 서지현 미투 이후‘비동의 간음죄’는 제자리법은 언제나 한발 느렸다. 성범죄에 대한 처벌 규정이 마련된 1953년 이후, 60년이 지나서야 친고죄 조항이 폐지됐다. 조두순, 강호순, 김길태, 김수철…. 이름만으로 사회를 공포에 몰아넣은 이들의 잔혹한 범행 뒤에야 한국 사회는 성범죄자 처벌과 관리를 논의했다. 피해자의 눈물과 여성들의 분노가 없었다면, 성범죄에 대한 인식은 지금도 1953년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2020년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아동·청소년 등의 성착취물이 유포된 ‘n번방’ 사건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현행법상으로 구제받지 못하는 피해자, 처벌받지 않는 범죄자들이 있다.‘정조에 관한 죄.’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성범죄와 관련된 제32장의 제목이었다. 1955년 박모씨는 자신을 해군 대위라고 속여 여성 70여명을 농락했다. 혼인빙자간음죄로 법정에 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