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법 잔혹사]③법원과 시민의 시각차
시민 2만명 디지털 성범죄 양형의견 대법원 간다
경향신문이 7일 입수한 ‘국민의견’ 보고서를 보면 응답자 중 75%가 가중 사유 의견을 냈다. ‘범죄 행위의 죄질이 나쁜 경우’(28.1%), ‘취약한 피해자가 대상인 경우’(15.3%), ‘유포 규모가 큰 경우’(10%)를 가중 사유로 봐야 한다고 답했다. 이들은 ‘협박’과 ‘강요’를 동반한 범죄는 특히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했다. 이 밖에 ‘피해자 특정 가능’(9.9%), ‘피해자 규모, 범행 횟수’(9.2%), ‘유포 협박’(8.5%)을 비롯해 총 13가지의 가중 사유 의견이 나왔다.
감경 사유로 고려할 요인에 대해서는 ‘없다’(94%)는 답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없다’를 제외하고 감경 사유를 제시한 1383개의 답변을 분석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피해자와의 합의’(57.64%)를 꼽았다. ‘자수·자백’(36.17%), ‘피해자 전원과 합의’(2.33%), ‘영상 삭제를 위한 노력’(1.98%)이 뒤를 이었다. 법원이 재판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정으로 반영하는 ‘진지한 반성’(0.87%)과 ‘초범’(0.22%)을 감경 사유로 꼽은 사람들은 매우 적었다.
이번 ‘국민의견’에 참여한 사람은 총 2만219명이고, 243명은 성범죄 피해경험자였다. 연령별로는 20대가 80%를 차지했다. 응답자들은 화난사람들 웹사이트에 접속해 가중 사유, 감경 사유 등에 대한 견해를 주관식으로 밝혔다. 화난사람들은 이 답변들에 대한 분석을 데이터 기반 전략컨설팅업체 ‘아르스프락시아’에 의뢰했다. 이 업체는 김영미 변호사와 함께 응답별 카테고리를 분류하고 주요 키워드를 추출했다.
대법원 양형위는 지난해 6월부터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이용 범죄’ 등 디지털 성범죄의 양형기준 설정 작업을 해왔다. 디지털 성범죄의 법정형 자체는 낮은 편이 아니지만, 법정형보다 낮은 수준인 집행유예나 벌금형이 선고되는 경우가 잦았다. 양형기준이 없어 재판부마다 들쭉날쭉 판결을 해왔기 때문이다. 양형위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이후 높아진 시민 눈높이에 맞는 양형기준을 마련할지 주목된다. 지난달 26일 법원 내 연구모임인 젠더법연구회 소속 판사 13명은 대법원에서 진행한 양형 관련 설문조사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피해자는 물론 일반 국민도 납득하기 어려운 양형기준이 될 수 있다”며 “시민의 눈높이를 반영할 수 있도록 공청회 절차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놓고
“취약한 피해자 대상도 엄벌”
아동·청소년 보호 목소리 높아
대다수 시민 “감경 사유 없다”
재판부의 가해자 시각 꼬집어
감형 지식 공유 온라인 카페선
‘모범 반성문’ 거래 이야기도
“누구는 평생을 지옥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누군가는 집행유예를 받거나 잠깐 감옥에 있다 나오면 그만이겠죠. (사법기관은)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려주세요.”
공동 소송 플랫폼 ‘화난사람들’이 8일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제출할 보고서의 근거가 된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국민의견’에 한 시민이 남긴 글이다. 2만여명이 참여한 ‘국민의견’에 의견을 남긴 시민들 대다수는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봐달라고 호소했다. 한 번 온라인에 유포되면 피해자는 ‘영상이 어딘가 돌아다닐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떠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반면,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아왔다고 말한다. 수많은 유사 ‘n번방’이 온라인 공간에 버젓이 살아있다고, 법이 바뀌지 않는 한 피해는 반복될 거라고 말한다.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아청법)에 따르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은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유기징역, 영리 목적 유포는 징역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법정형 자체가 낮지 않음에도 그에 못 미치는 판결이 이어졌다. 디지털 성범죄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각은 법원과 간극이 컸다. 시민들의 생각은 재판부와 어떻게 다를까. ‘국민의견’ 보고서에 나타난 가중·감경 사유와 주요 키워드를 살펴봤다.
■시민의 눈높이에서 본 가중 사유
시민들은 현재 디지털 성범죄가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있으며, 디지털 성범죄를 대하는 사법기관의 인식이 안일하다고 봤다. ‘국민의견’ 참여자 다수가 가중 사유 의견을 제시한 이유다. 시민들은 “디지털 성범죄가 무거운 죄라는 인식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온라인은 이미 제2의 현실세계다. 피해 촬영물은 빠른 속도로 퍼져 피해자를 두 번 세 번 죽이는데, 현행법은 너무나 가해자 중심주의”라고 했다.
‘아르스프락시아’가 총 1만5212개의 가중 사유 의견을 분석한 결과, 시민들은 ‘협박’과 ‘강요’를 동반한 디지털 성범죄를 더 중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박사방’ ‘n번방’으로 드러난 텔레그램 성착취 범죄도 피해자를 협박해 성착취물을 지속적으로 제작·유포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취약한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경우’도 주요한 가중 사유로 꼽혔다. 주요 키워드를 조합해보면 ‘아동·청소년이나 장애인 피해자의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광범위하게 유포한 경우 가중 사유로 봐야 한다’는 말로 정리된다.
현행 아청법상에는 ‘그루밍’을 처벌하는 조항이 없다. 아동·청소년의 경우 성인 가해자의 범행에 취약할 수밖에 없지만, 피해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신체를 촬영하도록 유인한 행위는 처벌받기 어려운 것이다. 피해 경험자라고 답한 한 응답자는 “내가 청소년일 때 나를 그루밍하며 성관계 동영상을 불법촬영한 성인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적었다.
‘유포’ 역시 중요한 가중 사유로 봤다. ‘유포 규모’ ‘피해자 특정 가능성’ ‘피해자 규모 및 범행 횟수’ ‘성착취물 유포 협박’이 약 9%의 응답비율로 나란히 가중 사유 3~6위에 올랐다. 유포 관련 응답이 많은 것은 디지털 성범죄의 특수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일반적으로 재판부는 직접적 신체 위해가 아니란 점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강간, 강제추행보다 가벼운 범죄로 인식한다. 하지만 응답자들은 유포로 인해 불특정 다수가 본다는 점에서 피해 범위와 심각성이 ‘무한대’라고 말한다.
이들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진 피해 촬영물은 피해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온라인 세계에서 이뤄지는 인격살인” “불특정 다수의 가해를 받는 게 디지털 성범죄의 가장 큰 무서움” 등 유포 피해를 설명했다. 조주빈(25)도 성착취물을 제작해 광범위하게 유포했다. 방을 등급별로 나눠 관리하고, 고액 방으로 접속할 링크를 제공했다. ‘유포’ ‘링크’ ‘광범위’ ‘접속’ ‘신상정보’ ‘누구인지 알아볼’ 등은 유포를 가중 사유로 꼽은 답변들의 주요 키워드로 등장한다.
시민들이 꼽은 가중 사유는 지금까지 재판부에서 ‘감경 사유’처럼 적용되곤 했다는 점에서 시각차가 드러난다. 협박, 유인, 유포는 ‘국민의견’에서 주된 가중 사유로 제시됐으나, 재판부는 이에 대해 거꾸로 ‘~를 하지 않았다’며 형을 깎아왔다. 13세 초등학생 피해자에게 접근해 41회에 걸쳐 성착취물을 찍도록 요구하고 유포한 ㄱ씨는 지난해 7월 아청법 등 위반으로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실형을 받긴 했지만 법정형에 못 미치는 수준이다. ‘피해자를 폭행·협박하거나, 경제적 유인으로 유혹하지 않은 점’ ‘성착취물을 유포하면서 피해자 얼굴을 가려 피해가 확대되지 않은 점’ 등이 유리한 사정으로 고려됐다. 시민들의 견해는 재판부가 가해자에게 유리한 사정을 찾으려고 들이는 노력만큼 피해자에게 고통을 준 부분을 찾아보라는 취지로, 누구의 시선으로 사건을 볼 것이냐와 관계 있다.
■시민의 눈높이에서 본 감경 사유
94%에 달하는 다수 응답자는 감경 사유를 꼽으라는 질문에 ‘없다’고 답했다. 처음이라서, 협박이 없어서, 영리목적이 없어서…. 지금까지 여러 이유로 디지털 성범죄의 형량을 감경해 온 재판부는 감경 사유를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없다’는 답변을 제외하고 총 1383개(중복 답변 반영)의 감경 사유 의견을 분석했을 때, ‘피해자와의 합의’가 가장 많이 제시됐다. 이때 ‘합의’는 단순히 경제적 차원의 보상만을 뜻하진 않는 것으로 해석된다. 답변의 주요 키워드를 보면 ‘심리적’ ‘정기적’ ‘영상’ ‘삭제’ ‘약속’ 등이 포함됐다. 금전적 보상뿐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민들은 “피해자와의 합의와 영상물 완전 삭제 둘 다 필요하다” “피해자 전원에게 사과 및 합의를 해야 한다” 같은 의견을 냈다.
일반적으로 디지털 성범죄 판결문에서 단골 감경 사유로 등장하는 ‘진지한 반성’(0.87%)과 ‘초범’(0.22%)은 가장 끝인 6~7위로 언급됐다. 지금까지 재판부는 두 가지 사유를 이유로 감경한 경우가 많았다. ㄴ씨는 랜덤채팅에서 만난 15세 중학생에게 약 1년 반 동안 88개의 성착취물을 제작하도록 요구하고, 1만7000여개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소지했지만 지난해 9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점’과 ‘처벌받은 범죄 전력이 없는 점’을 이유로 형이 줄었다. 시민들의 견해는 두 요인을 양형에 너무 고려하지 말라는 취지다.
‘n번방’에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와치맨’ 전모씨(38)도 ‘범죄 전력이 없다는 점’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상태에서 텔레그램 내 성착취물을 유포·거래했다. 그는 2018년 6월 대구지법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집행유예 기간인 2019년 4월부터 텔레그램에 ‘고담방’을 개설했다. 전씨를 비롯해 ‘태평양’으로 알려진 이모군(16), ‘켈리’ 신모씨(32) 등 텔레그램 성착취 가해자들은 이미 이러한 판결 경향을 읽고 줄줄이 ‘반성문’을 제출하고 있다. ‘성범죄 감경’ 지식을 공유하는 온라인 카페에서 ‘모범 반성문’을 거래한다는 사실도 알려지면서, 반성의 진정성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나온다.
감경 사유에 ‘없다’고 답한 시민들은 “불법촬영을 수없이 많이 해도 딱 한 번 적발되면 ‘초범’이라고 한다. 초범 기준을 범행 횟수로 따져야 한다” “부양가족이 있다, 반성하고 있다 등 이유로 가해자에게 감정이입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등 의견을 남겼다.
■피해자들의 견해는
‘국민의견’에는 총 242명의 피해 경험자도 의견을 제출했다. 피해 경험자의 경우 전체 응답자와 비교했을 때 디지털 성범죄 피해의 심각성을 더 깊게 인식하고, 피해 회복에 집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피해 촬영물 유포를 더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응답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가중 사유 3·4위였던 ‘유포 규모’와 ‘피해자 특정 가능’은 피해 경험자의 응답에서 공동 2위(10.6%)로 나타났다. 피해자 지원을 담당하는 단체들에 따르면 조주빈이 검거된 후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크게 보도되면서 과거 피해자가 다시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한다. 과거 삭제 작업을 했던 피해 촬영물들이 여전히 남아서 재유포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호소한다는 것이다.
피해 경험자들은 ‘국민의견’에 “영상을 합의 없이 유포하고 있다. 개인정보와 이름을 합성하기도 하는데 2차 피해가 두렵다” “(가해자가) 성관계 사진을 촬영하고 단톡방에 올려서 성희롱을 한 적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끝났다”며 유포로 인한 피해를 설명했다.
감경 사유도 전체 응답자와 비교했을 때 피해 경험자의 답변은 다소 달랐다. ‘피해자와의 합의’를 감경 사유로 봐야 한다는 답변이 훨씬 높게 나타났다. 피해 경험자의 80.55%가 ‘피해자와의 합의’를 감경 사유로 꼽았다. 57.46%인 전체 응답자 비율보다 더 높다. 피해 경험자는 다음으로 ‘피해자 전원 합의’ ‘초범’ 등을 감경 사유로 봤다. 전체 응답자는 ‘자수·자백’을 감경 사유로 답한 비율이 두 번째로 높았으나 피해 경험자의 응답엔 언급되지 않았다. 전체 응답자의 경우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에 대한 분노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가담자가 모두 자수하고 처벌을 받으라는 취지다. 반면 이미 이전에 사건을 겪은 피해 경험자의 경우 ‘피해 회복’을 가장 중시한다고 해석된다. ‘영상 삭제를 위한 노력’도 2.77%로 전체 응답자(1.93%)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들은 ‘국민의견’에 재판부가 가늠하기 어려울 디지털 성범죄 피해 상황을 상세히 서술했다. 한 10대 피해자는 “피해자는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무너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최대한 안정된 상태가 될 때까지 치료 후 피해자 의견을 수렴해주세요”라고 했다. 그밖에 “피해자로서 3년이 지난 지금까지 밖에서 화장실을 갈 수 없다. 정신과 치료를 꾸준히 받는 중” “피해자의 피해 사실을 축소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면 어떤 것도 감경 사유가 될 수 없다” 등 의견을 남겼다.
김영미 법무법인 숭인 변호사는 “피해 경험자는 피해 회복에 대한 응답을 많이 했다. 합의하고 보상을 받는 과정이 힘들 뿐만 아니라, 영상을 삭제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고 피해자는 그동안 사회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다”며 “그런 부분도 피해 회복과 감경 사유에 반영됐을 것”이라고 했다.
[관련영상]사법부의 판결과 관련해서는 ▶ [읽씹뉴스]초범이라, 반성해서···아동성착취물 제작해도 집행유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