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건축, 사우나··· 걸어서 하루만에 핀란드 헬싱키 ‘도장 깨기’

헬싱키(핀란드) | 글·사진 김형규 기자
지난해 8월 개관한 헬싱키의 현대미술관 ‘아모스 렉스’는 유서 깊은 라시팔라치 광장 아래에 자리 잡았다. 광장 위로 솟은 돔천장은 시민과 관광객의 놀이터다. 아모스 렉스를 중심으로 펼쳐진 헬싱키 주요 관광지는 걸어서도 하루면 그럭저럭 둘러볼 수 있다.

지난해 8월 개관한 헬싱키의 현대미술관 ‘아모스 렉스’는 유서 깊은 라시팔라치 광장 아래에 자리 잡았다. 광장 위로 솟은 돔천장은 시민과 관광객의 놀이터다. 아모스 렉스를 중심으로 펼쳐진 헬싱키 주요 관광지는 걸어서도 하루면 그럭저럭 둘러볼 수 있다.

핀란드는 북유럽이다. 북유럽 하면 멀고 춥고 비싼 나라라는 생각에 움츠러든다. 핀란드는 아니다. 직항을 타면 8~9시간 만에 도착하는 ‘가장 가까운 유럽’ 나라다. 물가도 의외로 저렴하다. 여름에 가면 날씨도 쾌적하고 하루 20시간 해가 떠 있는 ‘백야’(midnight sun)를 활용해 오히려 알찬 여행을 할 수 있다.

인천과 핀란드 수도 헬싱키를 잇는 직항 노선을 운행하는 핀에어는 다른 유럽 도시로 가는 승객들도 헬싱키를 추가로 여행할 수 있게 무료 스톱오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다행히 헬싱키는 작은 도시다. 부지런히 다니면 걸어서도 하루이틀 만에 주요 관광지를 얼추 둘러볼 수 있다. 짧은 일정 안에 건축과 디자인, 사우나로 유명한 핀란드 문화의 정수를 가득 담아봤다.

■거짓말 같은 침묵의 공간

요즘 핀란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는 현대미술관 ‘아모스 렉스(Amos Rex)’다. 미술에 관심이 없다고? 그래도 가보는 게 좋다. 역사와 장소성을 잘 녹여낸 핀란드 건축의 특징이 함축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모스 렉스 미술관은 광장에 붙어있는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을 통해 입장할 수 있다. 헬싱키올림픽 때 사용하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기능주의 양식으로 건축학과 학생들이 설계한 이 건물은 미술관이 생기면서 다시 활기를 얻었다.

아모스 렉스 미술관은 광장에 붙어있는 1930년대에 지어진 건물을 통해 입장할 수 있다. 헬싱키올림픽 때 사용하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기능주의 양식으로 건축학과 학생들이 설계한 이 건물은 미술관이 생기면서 다시 활기를 얻었다.

지난해 8월 개관한 아모스 렉스는 도심 한복판 라시팔라치(Lasipalatsi) 광장에 있다. 정확히는 광장 아래에 있다. 건물이 들어서면 추억이 깃든 광장이 사라질까봐 미술관은 넓게 판 지하 공간으로 밀어넣고, 지상엔 유리천장으로 마감한 돔 지붕이 튀어나오게 했다. 덕분에 광장엔 울룩불룩한 언덕이 여러 개 생겼다. 네모반듯한 직선의 땅이 유려한 곡선의 공간으로 변했다.

관광객도 시민도 그 사이로 엉켜 걷고 뛰고 또 누워 쉰다. 놀이터가 따로 없다. 잠망경처럼 생긴 유리천장은 지하의 미술관에 자연광을 끌어들이고, 밤이면 미술관 불빛이 땅 위로 새어나오며 근사한 조명이 된다. 그러니 카메라 들고 사진 찍는 인파가 종일 광장에 머문다.

아모스 렉스에 전시 중인 페트리 알라-마우누스(Petri Ala-Maunus)의 풍경화

아모스 렉스에 전시 중인 페트리 알라-마우누스(Petri Ala-Maunus)의 풍경화

지난 6월 들른 미술관에선 5명의 작가가 일종의 경쟁전을 펼치고 있었다. 가로 길이가 20m 넘는 거대한 풍경화부터 극사실주의 조각, 미디어아트까지 장르가 다양했다. 전시실은 넓고 쾌적했다.

관람 후엔 유리구슬을 하나씩 받아 가장 마음에 드는 작가의 이름이 쓰인 구멍에 넣었다. 구슬은 얇은 관을 타고 도미노를 쓰러뜨린 뒤 한곳에 모여 우승 작가를 가리는 데 쓰였다.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줄곧 예술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공간이었다.

‘침묵의 교회’ 캄핀 예배당

‘침묵의 교회’ 캄핀 예배당

아모스 렉스 바로 옆에는 눈에 확 들어오는 건물이 하나 있다. 커다란 원형 나무통을 세워놓은 것 같은 건물은 캄핀 예배당(Kampin kappeli). ‘침묵의 교회’라고도 불리는데, 도심 한가운데서 거짓말 같은 고요와 평온을 누릴 수 있는 장소다. 11.5m 높이의 건물은 가문비나무(외벽), 오리나무(내벽), 물푸레나무(출입문)로 만들었다. 천장엔 방음 효과가 좋은 자재를 썼다.

작은 강대와 기다란 의자 몇 개가 전부인 예배당 안에선 작은 속삭임조차 금물이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반드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사진 촬영도 물론 금지다. 연간 30만명이 그렇게 묵상하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 간다.

■모두의 놀이터, 헬싱키 도서관

두 번째 목적지는 헬싱키 중앙도서관인 ‘오디(Oodi)도서관’이다. 여행까지 와서 무슨 도서관이냐고? 가보면 안다. 유리와 나무를 외벽에 발라 노랗게 반짝이는 건물은 헬싱키의 파란 하늘과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비정형으로 뻗어나간 건물의 좁고 긴 외벽은 꼭 미래 도시의 조감도를 보는 것 같다. 알고 찾아가지 않았어도 한 번 눈에 띄면 ‘뭐지?’ 하고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건물이다. 전통과 현대의 요소를 두루 결합한 핀란드 대표 건축물답다.

지난해 말 개관한 오디도서관은 핀란드 건축사무소 ALA가 설계했다.

지난해 말 개관한 오디도서관은 핀란드 건축사무소 ALA가 설계했다.

오디도서관은 러시아로부터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12월 개관했다. 6개월 만에 방문객 200만명을 돌파했으니 인기를 알 만하다. 도서관은 준비 단계부터 시민들의 의견을 고루 모아 내부에 들어갈 시설을 정하고 설계에 반영했다. 오디(oodi)라는 이름도 시민 공모로 정했다. 시(詩)라는 뜻이다. 시 중에서도 정열적이고 서정적인 시, 찬가를 뜻한다. 문학과 관련된 이름을 짓기로 한 결과다.

1층엔 식당과 영화관이 있고 2층엔 스터디룸, 컴퓨터실, 게임장 등이 있다. 훤히 트인 유리방 안에서 가상현실(VR) 게임을 즐기는 커플과 축구오락 ‘위닝일레븐’에 빠져 있는 청소년들이 눈에 띄었다. 3D 프린터를 포함해 대부분 시설은 외국인을 포함 누구에게나 무료. 안내를 맡은 도서관 매니저 로타(Lotta Muurinen)는 “누구라도 평등하게 공부하고 쉬고 놀게 하는 게 도서관의 의무”라고 했다.

10만권의 장서가 있는 오디도서관 3층 서가. 천장도 바닥도 불규칙하게 경사진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지만 사용자 중심의 편리한 설계 덕분에 머무르는 동안 전혀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10만권의 장서가 있는 오디도서관 3층 서가. 천장도 바닥도 불규칙하게 경사진 독특한 구조로 되어있지만 사용자 중심의 편리한 설계 덕분에 머무르는 동안 전혀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꼭대기층인 3층엔 장서 10만권이 분야별로 정리돼 있었다. 키 낮은 서가는 개방감과 안정감을 줬다. 가장자리엔 카펫이 깔린 바닥에 소파가 놓여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해놨다. 어린이와 가족 이용자를 위한 공간이었다. 한쪽 벽에 붙은 책장을 밀면 감춰졌던 문이 스르르 열리며 나타나는 ‘비밀의 서재’도 있었다. 다양한 목적으로 방문하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도서관 테마파크’ 같았다.

해변가 백사장을 연상시키는 오디도서관 3층 테라스 풍경

해변가 백사장을 연상시키는 오디도서관 3층 테라스 풍경

도서관 앞 잔디밭에도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도서관 앞 잔디밭에도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니 널찍한 3층 테라스는 마치 해변가 백사장 같은 분위기였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책을 읽거나 음료를 마시며 햇살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했다. 코앞에 펼쳐진 공원과 툴루만(Töölö Bay)의 풍경도 시원했다. 도서관 앞 잔디광장에도 피크닉 나온 사람이 많이 보였다. 그 옆에 자리 깔고 앉아 책 읽거나 음악 들으며 여유 부리다 보면 ‘현지인처럼 여행하기’가 별건가 싶다.

■핀란드 자연을 품은 건축

핀란드까지 와서 알바 알토(Alvar Aalto·1898~1976)를 안 만나고 갈 수는 없다. ‘무민’ 시리즈로 유명한 동화작가 토베 얀손(Tove Jansson)과 더불어 핀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알바 알토다. 지폐와 우표에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국민적 존경을 받는 그는 유럽을 대표하는 현대 건축가다. 고전주의, 기능주의, 인본주의 등 시기에 따라 진보한 그의 건축은 핀란드 자연의 요소를 살리면서도 목적에 충실한 과감한 디자인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핀란드 대표 건축가 알바 알토의 걸작으로 꼽히는 핀란디아 홀

핀란드 대표 건축가 알바 알토의 걸작으로 꼽히는 핀란디아 홀

핀란드 전역에 그의 작품이 산재해 있는데, 헬싱키 시내에선 두 곳이 가볼 만하다. 오디도서관 맞은편에 자리 잡은 핀란디아 홀은 1960년대에 설계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세련되고 정교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건물 이름은 핀란드 국민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핀란디아’에서 따왔다. 건물은 헬싱키 교향악단의 근거지면서 갤러리와 카페, 각종 공연장과 국제회의장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

1893년 처음 문을 연 아카테미넨 서점은 몇 차례 주인이 바뀌며 이사를 거듭하다가 1969년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모습으로 지금의 자리에 정착했다.

1893년 처음 문을 연 아카테미넨 서점은 몇 차례 주인이 바뀌며 이사를 거듭하다가 1969년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모습으로 지금의 자리에 정착했다.

헬싱키 쇼핑 명소인 스토크만 백화점의 별관에 들어선 아카테미넨 서점(Akateeminen Kirjakauppa)도 알바 알토의 작품이다. 가운데가 뻥 뚫린 2층 공간의 천장엔 커다란 채광창이 여러 개 나 있다. 은은히 새어들어오는 빛이 책 구경하는 사람들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서점은 1893년 처음 문 열어 몇 차례 주인이 바뀐 끝에 스토크만 백화점에 팔렸고 1969년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지금의 공간에 입점했다.

도서관 한쪽에 진열된 알바 알토 관련 서적들

도서관 한쪽에 진열된 알바 알토 관련 서적들

베스트셀러 서가엔 서점 직원들의 친필 추천사가 붙어 있고, 한쪽엔 물론 알바 알토 관련 책만 따로 모은 서가도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 나와 유명해진 2층의 ‘카페 알토’에도 늘 사람이 붐빈다.

시벨리우스 공원에 설치된 시벨리우스의 두상과 파이프오르간을 연상시키는 기념물

시벨리우스 공원에 설치된 시벨리우스의 두상과 파이프오르간을 연상시키는 기념물

헬싱키 북쪽의 시벨리우스 공원은 아침 조깅이나 산책길에 들러볼 만하다. 여름의 헬싱키는 오전 4시면 해가 뜬다. 선선한 아침바람을 맞으며 슬렁슬렁 걷다 보면 시내에서 20~30분 만에 도착한다.

공원엔 시벨리우스 사후 10주년을 맞아 1967년 설치한 조형물이 있다. 600백여개의 파이프를 이어붙인 20t이 넘는 작품은 덩치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선율을 상상하게 만든다. 주변 벤치를 독차지하고 앉아 아침 새소리를 즐기다 이어폰 속 나만의 음악회에 빠져든 잠깐의 행복이 기억에 줄곧 남는다.

■사우나와 발트해, 맥주의 조합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하루를 꽉 채워 여행했다면 피로한 몸은 사우나에서 풀어야 한다. 핀란드는 사우나라는 말이 유래한 나라다. 핀란드 인구가 540만명쯤 되는데 사우나 숫자가 330만개다.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어려운 상담도, 주말에 보내는 가족과의 휴식도, 친구들끼리 왁자한 대화도 핀란드에선 모두 사우나에서 이뤄진다.

로울루에는 사우나 손님 외에도 테라스나 루프톱에서 일광욕을 즐기려는 이들이 많이 찾는다.

로울루에는 사우나 손님 외에도 테라스나 루프톱에서 일광욕을 즐기려는 이들이 많이 찾는다.

헬싱키에서 사우나 경험은 선택지가 많다. 공항에도 사우나가 있고 심지어 헬싱키 항구의 대관람차에도 전기로 열을 내는 사우나 칸이 있다. 추천하고 싶은 곳은 헬싱키 남서쪽 헤르나사리 바닷가에 자리 잡은 ‘로울루(Löyly)’다. 로울루는 사우나 안의 뜨겁게 달궈진 돌 위에 물을 부었을 때 올라오는 뜨거운 증기를 뜻한다. 이름부터 뜨끈뜨끈한 느낌이 온다.

전통 방식의 세 가지 사우나를 운영하는 로울루의 외관은 세련된 현대식이다. 건물 테라스와 옥상에서는 사우나를 하지 않아도 간단한 음식과 마실거리를 즐길 수 있어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로 늘 선베드가 만원이다. 레스토랑과 바에선 유기농 식재료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잡은 물고기만 쓴다.

사우나에서 몸을 뜨겁게 달군 후에는 연결된 계단과 사다리를 이용해 발트해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사우나에서 몸을 뜨겁게 달군 후에는 연결된 계단과 사다리를 이용해 발트해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사우나는 수영복을 입고 한다. 뜨거운 사우나 안에서 몸을 덥힌 뒤 밖으로 나오는 문을 열면 바다로 향하는 사다리로 이어진다. 발트해의 물은 차가웠지만 인근의 강에서 흘러든 민물이 많이 섞여 전혀 짜지 않았다. 바다로 뛰어들어 열기를 식히고 다시 사우나에 들어가 덥히기를 두어 차례 반복하다 보니 ‘여름에 무슨 사우나야’ 했던 처음의 생각이 싹 사라지고 어느새 사우나 예찬론자가 돼버렸다. 모닥불 앞에서 마신 시원한 맥주 맛도 한몫했다. 입에선 계속 그날 처음 배운 핀란드말이 흘러나왔다. “휘바 휘바!”(hyvää hyvää·좋아 좋아)

배 위에서 바라본 헬싱키 항구와 헬싱키 대성당

배 위에서 바라본 헬싱키 항구와 헬싱키 대성당

툴루만의 공원 풍경

툴루만의 공원 풍경

헬싱키 도심의 한 건물에 “개인의 차이를 존중한다”는 문장과 함께 성소수자(LGBT) 행사인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를 응원하는 깃발과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헬싱키 도심의 한 건물에 “개인의 차이를 존중한다”는 문장과 함께 성소수자(LGBT) 행사인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를 응원하는 깃발과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스토크만 백화점 뒷골목에서 열린 버스킹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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