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전범·마약밀매업자까지…크레디트 스위스 ‘비밀계좌’ 고객 3만명 정체 드러났다

박효재 기자

1940년대부터 운용 금액 129조원 넘어

 각국 정부 고위 인사들도 다수 확인

크레디트 스위스의 스위스 취리히 본사 건물 로고. 취리히|AP연합뉴스

크레디트 스위스의 스위스 취리히 본사 건물 로고. 취리히|AP연합뉴스

독재자, 전쟁범죄 용의자, 마약밀거래 업자, 인신매매범. 스위스 대형 투자은행 ‘크레디트 스위스’의 비밀계좌를 이용해 온 고객 3만명의 명단이 공개됐다.

독일 쥐트도이체차이퉁(SZ), 미국 뉴욕타임스, 프랑스 르몽드 등 전 세계 46개 주요 언론 매체가 참여한 ‘조직범죄·부패 보도 프로젝트(OCCRP)’는 20일(현지시간) 1년 전 내부 고발자가 전달한 자료를 분석해 크레디트 스위스의 비밀계좌 고객 명단을 공개했다. 이 자료는 1940년대부터 개설된 계좌 정보를 대상으로 했다. 해당 기간 비밀계좌로 운용된 금액은 1000억스위스프랑(약 129조5900억원)으로 파악된다.

OCCRP가 공개한 고객명단에는 필리핀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인신매매범, 뇌물수수 혐의로 수감된 홍콩 증권거래소 사장, 레바논의 팝스타 여자친구를 살해하도록 지시한 이집트 억만장자 등 범죄자도 다수 확인됐다. 쥐트도이체차이퉁은 크레디트 스위스가 계좌 개설 이전 고객의 부적합한 행위를 인지하고도 계좌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크레디트 스위스는 2008년 전 베네수엘라 에너지 부장관인 네르비스 빌라로보스가 국영 석유기업 부패스캔들에 연루됐다는 외부기관 보고서를 확보하고도 그의 계좌 개설을 허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빌라로보스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비밀계좌에 1000만달러를 예치했다.

재산 축적 과정이 의심스러운 각국 정부 고위 인사들과 그들 가족의 이름도 다수 확인됐다. 이집트의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두 아들 알라와 카말은 총 6개 계좌를 가지고 있었으며, 2003년 사용한 한 계좌에는 1억9600만달러가 예치됐다. 뉴욕타임스는 무바라크 측 변호인이 두 사람의 구체적인 부 축적 과정에 대한 언급은 피한 채 성공적인 사업활동의 결과물로 어떠한 불법행위도 없었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전 파키스탄 정보기관 최고 책임자 아크라 압두르 라만 칸 장군의 세 아들도 크레디트 스위스의 비밀계좌를 이용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칸 장군은 과거 아프가니스탄에서 구소련에 맞서 싸웠던 무자헤딘에 미국 정부의 지원금과 원조 물자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뉴욕타임스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무자헤딘 지원 자금이 제대로 집행되고 있는지 철저하게 감독할 것을 지시한 해인 1985년 칸 장군 아들 명의의 비밀계좌가 개설됐으며, 이들 계좌 예치금액은 수년 뒤 370만달러까지 늘었다고 전했다.

크레디트 스위스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비밀계좌 소유자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과 부인 이멜다가 꼽힌다. 이들 부부는 1986년까지 3차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국고에서 100억달러(12조원)를 횡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크레디트 스위스에 ‘윌리엄 손더스’와 ‘제인 라이언’이라는 가명으로 비밀 계좌를 개설하기도 했으며 취리히 법원은 크레디트 스위스와 다른 한 은행에 5억달러를 필리핀 정부에 반환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르몽드는 이번 탐사보도는 크레디트 스위스가 수십 년 동안 범죄·부패와 관련된 자금을 보유함으로써 국제 은행 규정을 무시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해당 자료를 제공한 익명의 내부 제보자는 “스위스 은행들의 비밀 보장은 부도덕하다”며 “금융 프라이버시를 보호한다는 구실은 스위스 은행들이 탈세자와 협력하는 부끄러운 일을 은폐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크레디트 스위스는 “지금과 금융거래 관행과 법률이 달랐던 과거에 벌어진 일들로 지금은 대부분 폐쇄된 계좌”라면서 “남아있는 계좌에 대해선 적절한 실사와 서류검토, 계좌 폐쇄를 포함한 통제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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