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으로 빛나는 한국 추상미술, 김환기에게 점은…

도재기 선임기자

호암미술관, 대규모 회고전

초기부터 말년작까지 망라

예술세계 진화과정 선보여

첫 공개된 새 발굴 작품·자료도

“김환기 진면모 되새기는 자리”

김환기의 대규모 회고전 ‘한 점 하늘-김환기’가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은 저 멀리 뒷편에 작품 ‘여인들과 항아리’가 보이는 전시장 일부 모습. 도재기 선임기자

김환기의 대규모 회고전 ‘한 점 하늘-김환기’가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은 저 멀리 뒷편에 작품 ‘여인들과 항아리’가 보이는 전시장 일부 모습. 도재기 선임기자

“하루 열여섯 시간 서서 일하고, 침실에 들어가면 그냥 죽어버린다” “술, 예술론으로 밤을 새다” “선인가? 점인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 “날으는 점,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이런 걸 계속해보자” “미술(예술)이란 인간의 원동력” “#320 죽을 힘을 다해서 완성” “완성의 쾌감. 예술은 절박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제작 부진. 또 마음이 떴다 가라앉았다” “아, 좋은 그림 그릴 자신이 있고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세상은 왜 이리 적막할까” “한눈팔지 말고 나는 내 일을 밀고 나가자”….

한국적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수화 김환기(1913~1974)가 수첩, 일기, 편지에 쓴 글이다. 예술가로서의 고뇌, 뿌듯함, 다짐 등이 솔직담백하다.

김환기는 흔히 박수근(1914~1965)·이중섭(1916~1956)과 함께 ‘국민화가’로 불린다. 근현대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데다 대중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는다. 격동의 역사 속에, 전남 신안의 작은 섬 안좌도에서 태어나 일본·프랑스·미국을 오가며 치열하게 구축한 예술세계는 감동적이다.

호암미술관(경기 용인)에서 열리고 있는 ‘한 점 하늘-김환기’ 전은 그의 진면모를 되새기는 자리다. 대규모 회고전답게 1930년대 초기작부터 타계 직전의 점화까지, 결국 한 점으로 수렴된 김환기 추상작업의 진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환기의 초기 작품이자 국가등록문화재인 ‘론도’(1938,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왼쪽)와 전시장 입구의 ‘달과 나무’(194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김환기의 초기 작품이자 국가등록문화재인 ‘론도’(1938,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왼쪽)와 전시장 입구의 ‘달과 나무’(1948,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김환기의 ‘영원의 노래’(1957, 캔버스에 유채, 리움미술관 소장, 왼쪽)와 ‘여름 달밤’(1961,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김환기의 ‘영원의 노래’(1957, 캔버스에 유채, 리움미술관 소장, 왼쪽)와 ‘여름 달밤’(1961,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유화 80여점을 비롯해 드로잉과 신문지 작업, 조각, 스케치북 등이 나왔다. 특히 전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창’(1940) 등의 작품과 작가 수첩, 작품에 영감을 준 소장품 등 새로 발굴된 자료는 김환기 연구와 이해에 소중하다.

전시는 둥그런 달을 닮은 나무가 인상적인 ‘달과 나무’(1948)로 김환기와 한국적 추상의 시작을 알린다. 첫 전시실 중앙에 단독 전시된 ‘론도’(1938)는 국가등록문화재다. 김환기는 1960년대 후반 추상의 절정인 전면 점화에 이르기 전까지 달, 달항아리(조선시대 백자 큰 항아리), 산, 하늘, 매화, 새 등의 소재로 한국적 정서가 짙은 작업을 펼쳐냈다. 한국의 자연, 전통미술에 대한 공부를 토대로 현대적·국제적인 표현에 매달린 것이다.

김환기가 소장했던 백자 큰 항아리(달항아리)와 달항아리가 표현된 작품들이 한 공간에 배치됐다. 도재기 선임기자

김환기가 소장했던 백자 큰 항아리(달항아리)와 달항아리가 표현된 작품들이 한 공간에 배치됐다. 도재기 선임기자

김환기의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1960, 281×568㎝,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위)와 전면 점화들의 전시 모습.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도재기 선임기자

김환기의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1960, 281×568㎝,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위)와 전면 점화들의 전시 모습.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도재기 선임기자

달과 백자 항아리가 공존하는 첫 작품으로 알려진 ‘달과 항아리’(1952), ‘영원의 노래’ 연작, 전시 과정에서 발굴된 작가 수첩을 통해 1960년 작품으로 확인된 대작 ‘여인들과 항아리’, 전통 미술양식 속에 점화의 씨앗이 엿보인다는 ‘여름 달밤’(1961) 등이 대표적이다. 그가 소장한 달항아리·목가구와 그것들이 담긴 그림들은 관람객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김환기는 나이 쉰이던 1963년 뉴욕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초기 전시회에선 혹평도 받았으나 “한눈팔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밀고 나갔다. 달과 산 등의 기존 요소들이 점차 점·선·면으로 추상화된다. ‘북서풍 30-Ⅷ-65’(1965)는 이 과정의 작품이다.

마침내 그는 드넓은 하늘의 별처럼 널찍한 화면을 점으로 가득 채운 전면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Ⅳ-70 #166’(1970)에 이른다. “이산(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늘 맘속으로 노래”하며 그린 작품이다.

전시장에서는 다양한 전면 점화를 만난다. 한국 미술품 경매가 최고 기록(132억여원)으로 잘 알려진 ‘5-Ⅳ-71 #200’(1971, 일명 ‘우주’), “죽을 힘을 다해서 완성”했다는 ‘하늘과 땅 24-Ⅸ-73 #320’(1973) 등 여러 색조·구성의 작품들이다.

한때 “선인가? 점인가?”를 고민한 그의 추상은 점으로 귀결됐다. 서양 물감을 동양 먹의 번짐효과처럼 표현한 그 점들은 그의 예술세계를 상징한다. 그는 “실로 오만가지를 생각하며 점을 찍어간다”고 했다. 그에게 점은 그리움을 상징하는 “별”이자 “사람” “친구” “강과 산” “돌, 풀, 꽃” 모두였다.

김환기의 ‘북서풍 30-VIII-65’(1965, 178x127㎝,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김환기의 ‘북서풍 30-VIII-65’(1965, 178x127㎝,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1970, 232x172㎝,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왼쪽)와 ‘하늘과 땅 24-Ⅸ-73 #320’(1973, 263.4×206.2㎝,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1970, 232x172㎝,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왼쪽)와 ‘하늘과 땅 24-Ⅸ-73 #320’(1973, 263.4×206.2㎝,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유려한 변주를 보이던 점화는 말년에 정적인 검은 점화로 이어진다. 죽음이 다가오면서다. 타계 한 달여 전인 1974년 6월16일 그는 “죽을 날도 가까워졌는데”라며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라고 썼다. 전시장의 마지막 작품 ‘17-Ⅵ-74 #337’(1974)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새로 발굴된 작가 수첩·사진·스크랩북·유품 등의 자료는 그의 예술세계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다. 김환기의 맏딸인 김영숙과 사위인 단색화 대가 윤형근의 유족들이 간직해오던 것이다. 이들 자료는 한국 근현대 예술가들의 연구가 더 치열해야 함을 새삼 알려준다. 전시기획자인 태현선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김환기를 수식하는 최근의 단편적 수사들이 그의 예술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전시의 필요성을 일깨운다”며 “이번 전시가 회고전을 넘어 미래를 위한 전시이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고미술 중심이고 접근성의 한계까지 보이던 호암미술관이 전시실 개선 등을 통해 탈바꿈한 재단장 개관전이기도 하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리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은 ‘하나의 미술관, 두 개의 장소’로 현대미술과 고미술을 아우르는 전시·프로그램을 통합적으로 기획·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시 관람은 사전 예약이 필수이며, 9월10일까지 열린다.

김환기의 ‘5-Ⅳ-71 #200’(1971, 254×254㎝,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일명 ‘우주’, 왼쪽)과 작품 속 점들의 세부 모습.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도재기 선임기자

김환기의 ‘5-Ⅳ-71 #200’(1971, 254×254㎝,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일명 ‘우주’, 왼쪽)과 작품 속 점들의 세부 모습.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도재기 선임기자

김환기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검은 점화 ‘17-VI-74 #337’(1974, 86x121.5㎝,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김환기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검은 점화 ‘17-VI-74 #337’(1974, 86x121.5㎝,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작업 중인 김환기(왼쪽)와 이번 전시과정에서 발굴돼 처음 공개되는 삽화 스크랩북(1950년대, 오른쪽 위), 1956년 파리에서의 첫 개인전 당시 방명록.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작업 중인 김환기(왼쪽)와 이번 전시과정에서 발굴돼 처음 공개되는 삽화 스크랩북(1950년대, 오른쪽 위), 1956년 파리에서의 첫 개인전 당시 방명록.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호암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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