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묶인 삶 넘어 ‘여성의 언어’로 확장하는 세계···연극 ‘앨리스 인 베드’

선명수 기자

‘20세기 미국의 지성’ 수전 손태그 희곡

19세기 실존 인물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만남

“여성의 고통, 자의식, 분노, 상상력에 대한 작품”

수전 손태그의 희곡을 무대화 한 국립극단 연극 <앨리스 인 베드>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수전 손태그의 희곡을 무대화 한 국립극단 연극 <앨리스 인 베드>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히스테리는 오랫동안 여성의 전유물로 치부됐다. 히스테리의 어원 자체가 자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히스테라’에서 유래했다. 여성이 겪는 고통과 질병을 ‘방황하는 자궁(wandering womb)’ 탓으로 돌리며 여성성을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오랜 혐오와 낙인의 언어가 히스테리였다.

연극 속 ‘앨리스’도 그런 시대에 살았다. 20세기 미국 뉴욕 지성계를 대표했던 작가 수전 손태그의 희곡 <앨리스 인 베드>는 19세기 실존 인물인 앨리스 제임스(1848~1892)의 삶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미국의 일기 작가인 앨리스 제임스는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빅토리아 시대 ‘히스테리’로 규정된 정신적 병증과 신체적 질병, 장애로 평생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부유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는 오빠들 못지않게 명석하고 뛰어났지만 여성이란 이유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사후에서야 일기 작가로 주목받았다.

손태그는 명망 높은 신학자였던 아버지, 유명 소설가였던 오빠 헨리 제임스에게 가려져 있던 앨리스 제임스의 일기에 주목해 허구적 상상력을 덧붙여 <앨리스 인 베드>를 썼다. 1991년 발표된 이 희곡이 국립극단 공연(이연주 연출)으로 국내에선 처음 무대에 올랐다.

좁은 침대 넘어 극장 수놓은 활자들···‘나의 언어’로 확장하는 세계

막이 오르면 무대 한쪽, 겹겹이 쌓여 있는 매트리스 더미가 보인다. 앨리스의 공간이다. 침대 위 앨리스를 짓누르는 듯한 매트리스 더미가 공중으로 올라가며 관객들은 본격적으로 ‘앨리스의 세계’에 초대된다. 이 세계는 낯설고도 기이하다. 그러나 앨리스를 둘러싼 현실 만큼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라는 시공간적 거리감에도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아버지와 오빠 등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의 해석과 언어로 앨리스를 규정하며, 그에게 ‘의지’를 가질 것을 독촉한다.

연극은 주변인의 언어가 아닌 앨리스의 언어에 주목한다. 일기는 앨리스가 침대에 묶인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통로다. 그의 몸은 침대를 떠나지 못하지만, 영상을 통해 살아난 그의 언어들은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극장 안을 활자로 수놓는다. 연극은 이를 통해 앨리스의 글쓰기가 여성의 몸과 질병에 대한 남성중심적 시선을 거부하는 일종의 저항 행위이자,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확장하는 시도였음을 암시한다.

연극 <앨리스 인 베드>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앨리스 인 베드>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공연은 앨리스의 환상 속 세계로 관객을 안내한다. 작은 침대 위에서 앨리스는 전설적인 여성 인물들과 티파티를 벌이고, 홀로 로마로 여행을 떠난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티파티 장면엔 시대와 불화했거나 남성들의 세계에서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들이 등장한다. 19세기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가이자 평론가였던 마가렛 풀러, 사후에서야 인정받은 시인 에밀리 디킨스를 비롯해 발레 <지젤> 속 남성들을 유혹해 죽음으로 내모는 정령들의 여왕 미르타,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시팔>에 등장하는 마녀 쿤드리가 이들이다. 토끼도 등장해 앨리스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시공간을 넘어선 앨리스의 여행은 계급도, 살아가는 세계도 다른 젊은 도둑과 우연히 조우하며 종료된다. 이 ‘완전한 타인’과 만나며 앨리스는 비로소 공연 내내 머물렀던 침대를 벗어나 자유롭게 걷는다. 앨리스는 이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상상력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한계에 대해서도 마주한다. 손태그는 이 희곡의 서문에 “<앨리스 인 베드>는 여성에 대한 연극이자 여성의 고통, 자의식에 대한 연극”이라며 “동시에 여성의 슬픔과 분노, 마지막으로 상상력에 관한 연극”이라고 썼다.

시적이고 은유적인 대사, 환상과 실재가 뒤섞인 설정 등 관객에게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연극이다. 7명의 여성 배우가 출연하며 주인공 앨리스는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배우가 맡는다. 배우들은 각 장면 안에서 앨리스가 되기도, 앨리스를 바라보기도 하며 다양한 시선으로 인물을 표현한다. 이연주 연출은 “질병과 장애를 경험한 앨리스의 세계가 어떻게 관객들과 만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스스로 경험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주목하고자 했다”며 “어떤 세계가 그대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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