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임권택 영화 ‘롱 테이크’명장면3

임권택 영화의 호흡은 유장(悠長)하다. 뒷짐을 지고 바라보는 듯 넉넉한 마음이 화면에 배어나고, 한국의 산하와 카메라는 하나가 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임감독의 영화에 빈번하게 사용되는 기법 중 하나가 ‘롱 테이크(long take)’다. 쇼트와 쇼트를 짧게 이어붙이는 대신, 카메라를 멈추지 않고 긴 시간 동안 이어가는 촬영 방식이다.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시간 동안 지속된 롱 테이크는 속도전에 물든 현대 사회에 대한 노장의 묵직한 반론이다.

[커버스토리]임권택 영화 ‘롱 테이크’명장면3

◇서편제의 진도아리랑

임권택의 100편의 영화 중에서도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장면이기도 하다.

직전 장면에서 술에 취해 숙소인 여관방에 들어온 유봉은 동호에게 북치는 방법을 엄하게 가르친다. 옆방에 머물던 약장수 부부는 한밤의 소란에 짜증을 내고, 소리꾼 가족과 약장수는 이 길로 헤어진다.

이제 유명한 진도아리랑 장면이 시작된다. 소리꾼 가족이 한국 시골 특유의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걸으며 노래한다. ‘사람이 살면 몇 백년 사나/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라고 건네면 ‘소리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라고 받는다.

노래의 가사에 소리꾼 가족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유봉과 소원하던 동호도 어느새 등에 지고 있던 북을 앞으로 고쳐매고 장단을 맞춘다. 흥은 고조되고, 셋은 가볍게 춤을 춘다. 인물들이 화면 오른쪽으로 빠져나간 뒤에도 소리는 10여초간 지속된다. 화면에는 가벼운 모래 바람이 일어 인적을 청소한다.

진도아리랑 장면의 시골길은 소리꾼 가족의 잃어버린 이상향이다. 이제 악극단에 밀린 가족에겐 질곡의 삶만이 남아있다. 북이 소리가 가는 길을 미리 닦아주듯이, 카메라도 가족의 마지막 즐거운 한때를 위해 멍석을 깔아준다. 카메라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 5분 10초가량을 가만히 서있지만, 역동적인 에너지가 화면 바깥으로 넘쳐나온다.

소리의 흥겨움, 동작의 즐거움, 감정의 흥겨움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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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뎐의 옥중 재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춘향전의 내용을 알고 있다. 이야기 내용이 뻔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느냐가 관건이다. 임권택은 암행어사로 임명됐으나 신분을 숨기고 있는 몽룡과 옥에 갇힌 춘향이 만나는 장면을 3분여의 롱 테이크로 촬영했다. 뇌물을 받은 간수가 앞장서면, 월매, 향단, 몽룡 일행이 뒤를 따른다. 안쪽 간수가 문을 열면서 좁은 감옥 공간의 롱 테이크가 시작된다. 카메라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어 월매가 싸온 음식을 살피는 간수를 보여줬다가 월매의 뒤를 따라 감옥 쪽으로 이동한다. 월매는 애타게 딸의 이름을 부르지만, 어두컴컴한 옥 속의 춘향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월매가 곧 목숨을 잃을 딸과의 짧은 해후를 마치고 뒤로 빠지면 그 자리에 몽룡이 다가선다. 월매가 향단에게 “불을 밝히라”고 말하자 등불이 화면 왼편에 들어온다. 이제 춘향의 초췌한 얼굴이 제대로 나타난다. 등불은 몽룡의 마음처럼 움직인다. 오랜만에 재회하는 연인의 얼굴을 밝히기 위해 다가섰다가, 남녀가 만나는 공간을 내주기 위해 뒤로 빠진다. “선산 맡에 묻어달라”는 춘향의 유언 뒤, 일행은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감옥을 나온다.

몽룡은 죽음을 눈앞에 둔 연인 앞에서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다음날이면 변학도의 생일 잔치와 암행어사 출두가 벌어진다. 옥중 재회는 폭풍 전야다. 인물들이 내면의 감정을 숨기는 만큼, 내일의 격동은 더욱 거세다. 제자 김대승 감독은 “여러 인물의 감정이 한 커트에서 드러나는 임감독의 기법을 ‘번지 점프를 하다’와 ‘가을로’의 만남과 헤어짐 장면에서 적용했다”고 말했다.

[커버스토리]임권택 영화 ‘롱 테이크’명장면3

◇태백산맥의 김범우와 서점주인의 대화

조정래의 대하소설을 원작으로 한 ‘태백산맥’. 기대만큼의 흥행, 비평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이 영화에도 눈여겨볼 만한 롱 테이크 장면이 있다. 벌교를 장악한 우익 토벌대장은 빨갱이를 잡는다는 이유로 온갖 전횡을 일삼는다. 참다못한 민족주의자 김범일 등 지역 지식인들은 토벌대장을 기생집에 불러 “너무 심하게 밀어붙이면 민심이 돌아선다”며 달래지만, 오히려 토벌대장의 화만 돋우고 만다.

김범일과 중학교 교장이 씁쓸한 마음으로 밤거리를 거닐면서 롱 테이크가 시작된다. 교장은 “토벌대장이 하는 빨갱이라는 말은 정말 증오와 살기를 품고 있더군요. 그 말 한 마디에 사람 목숨이 오고가는 위태로움을 느꼈어요”라고 말한다. 교장과 헤어진 김범일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자, 서점의 여직원이 원하시던 책을 구했다며 불러세운다. 직원이 책을 포장하는 사이 서점 주인은 토벌대장과의 대화 결과를 묻는다. 김범일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면서 1분 50여초의 롱 테이크가 끝난다. 이 장면은 임권택의 롱 테이크 중에서도 대사에 의존해 다소 설명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교장의 대사는 ‘빨갱이’라는 어휘에 담긴 증오의 무게를 말해준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정치권의 색깔 논쟁은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이 ‘태백산맥’ 속 벌교의 상황과 그리 멀지 않음을 증명한다. 좌우의 틈바구니에 낀 중도 지식인 김범일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빨갱이로 몰려 멸공단 청년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스산한 벌교의 거리를 홀로 걷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은 오늘의 시대상을 꽤 정확히 함축하고 있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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