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사람들의 짠한 소통…일본영화 ‘너를 보내는 숲’

백승찬기자

그래서 산다는 건 무엇일까. 밥을 먹고 숨을 쉰다고 삶은 아니다. 살아있음의 흥을 느끼는 감정이 삶이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짠한 소통…일본영화 ‘너를 보내는 숲’

일본 영화 ‘너를 보내는 숲’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아이를 잃은 아픔을 간직한 마치코가 시골 요양원에서 간병일을 시작한다. 마치코는 치매에 걸린 노인 시게키를 만난다. 시게키는 33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옛 추억만으로 삶을 지탱한다. 둘은 시게키 아내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숲에 갇혀 하룻밤을 보낸다.

영화 속의 한 스님은 “삶은 위(胃)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치코와 시게키는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았다. 위는 왕성하게 움직이되, 마음은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였다. 시게키가 요양원 동료들의 생일 축하에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지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미 반쯤 죽어있는 마당에 태어난 날을 기념해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영화는 등장 인물이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마치코가 어쩌다 아이를 잃었는지, 시게키가 왜 세상에 대한 문을 닫았는지 관객은 좀처럼 알 수 없다. 대신 산책을 하거나 호박을 따는 등 별스러울 것 없는 노인들의 일상이 전시된다.

단지 이들이 신체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한 상실감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뿐이다. 이별은 제대로 못하면 독이다. 일본 불교에서는 33주기 기일이 되면 죽은 이는 이승을 완전히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믿는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시게키의 33년은 독을 마시고 꿈틀대는 듯한 고통의 나날이었다. 타인에 대한 공격 성향은 자기 보호 본능의 이면일 뿐이다.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은 자연이다. ‘너를 보내는 숲’에서는 때로 풍경과 소리가 사람을 제치고 주인 노릇을 한다. 바람 부는 숲이 화면 중심에 자리를 잡으면,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삶과 죽음이 주변을 맴돈다. 유장하고 애달픈 소리가 화면 한쪽 구석에서 들려오고, 흰 상여가 짙은 녹음을 가로지른다. 단정한 녹차밭에서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는 “나 잡아봐라” 하면서 논다. 잘 익은 수박을 들입다 깨고 벌건 속을 나눠 먹으며 웃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살아보는 삶이다. 남녀는 곧 온 존재를 뒤흔드는 어둑한 숲 속의 모험길을 떠난다. 이번엔 제대로 이별하기 위해, 그리고 정말로 살아보기 위해.

영화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비전문 배우를 기용했고, 다큐멘터리적인 화면을 삽입했지만 ‘너를 보내는 숲’은 매우 잘 짜여진 영화다. 내버려둔 듯 하지만 사실은 잘 가꾸어진 일본 정원처럼, 영화엔 사람의 감정을 계산적으로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일본 문학에는 ‘사소설(私小說)’ 전통이 있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일상적, 개인적 소설 쓰기 전통이다. 그렇다면 ‘너를 보내는 숲’은 ‘사영화(私映畵)’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감독 가와세 나오미(39)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버림 받고 친척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상처 입은 소녀는 다큐와 픽션을 번갈아 만들며 스스로를 치유했다. ‘너를 보내는 숲’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2등상) 수상작이다. 서울 CGV 강변,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 등에서 24일부터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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