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공포영화’ 습격 충무로 오싹

김종철 | 익스트림무비 편집장(http://

공포영화의 계절 여름이다. 올해도 변함없이 다양한 공포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수 있지만, 예년과 달리 특이한 변화가 있다. 충무로 공포영화의 제작이 주춤해지면서 그 빈자리를 태국 공포영화들이 채우기 때문이다. ‘바디’ ‘카르마’ ‘카핀’과 같은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의 태국산 공포영화가 올 여름의 주인공이다.

반전이 인상적인 공포영화 ‘카르마’. ‘시티즌 독’과 ‘블랙타이거의 눈물’로 태국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위시트 사사나티앙이 연출을 맡았다.

반전이 인상적인 공포영화 ‘카르마’. ‘시티즌 독’과 ‘블랙타이거의 눈물’로 태국 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끈 위시트 사사나티앙이 연출을 맡았다.

태국 공포영화는 낯설지 않다. 그동안 한두 편씩 꾸준히 소개되었고 지금은 일본 공포영화를 보는 것처럼 어느 정도 친숙해진 상황이다. 올해 유난히 그 편수가 많아지면서 공포영화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런 현상은 한때의 유행으로 그칠 수도 있고, 또는 공포영화의 새로운 변화와 경향으로 읽을 수 있다. 갑자기 태국산 공포영화가 밀려드는 이유와 배경, 그리고 이들 영화의 장·단점에 대해서 짚어보자.

태국 공포가 몰려드는 배경

태국 공포영화 3편이 동시다발적으로 수입되어 개봉을 하는 배경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공포영화 제작 붐을 몰고왔던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저예산으로 제작된 ‘여고괴담’은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면서 충무로에 공포영화 제작 붐을 일으켰다. 다른 장르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제작이 가능하다는 점, 스타 배우가 중요하지 않다는 장르적 특성이 충무로 제작사들을 매료시켰다. 적게 투자를 해서 실패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성공을 거둘 경우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 공포영화는 그저 값싸게 대충대충 찍을 수 있는 만만한 장르가 아니다. 충무로는 공포영화에 대한 이해도도 낮지만, 오랜 시간 축적된 노하우가 전무했다. 결국 안일한 접근방식으로 졸속 제작한 영화들을 내놓았고, 몇 편을 제외하곤 모두 관객의 외면을 받으며 예정된 수익 악화로 이어졌다. 그 결과 매년 5편에서 6편 정도의 한국 공포영화가 제작되던 것이, 올해는 ‘고사’ ‘외톨이’ 단 두 편에 불과하다. 흥행에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여기엔 제작비 상승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카핀’

‘카핀’

이런 상황에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둔 공포영화들이 있었다. 시미즈 다카시의 ‘주온’ 극장판 1편, 미이케 다카시의 ‘착신아리’ 등 일본 공포영화, 태국공포영화 ‘셔터’ 등이다. 이들 영화는 폭발적인 관객 동원은 아니지만, 싸게 수입을 해서 이윤을 남겼다. ‘주온’의 경우 1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면서 수입사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최근 태국 공포영화들의 개봉 숫자가 많아진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영화 사업의 핵심은 투자 대비 더 많은 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그 점에서 동남아시아의 공포영화 수입은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태국 공포영화 수입 러시는 충무로에 드리운 위기를 간접적으로 대변하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제작 열기가 식었다고 해서 관객들이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태국 공포영화의 존재를 알린 대표작들

태국 공포영화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98년에 제작된 소우칭 스리스팝 감독의 ‘303 연쇄살인사건’이 국내에 비디오로 출시되면서다. 남자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에 얽힌 비밀을 다룬 영화는 당시 국내 공포영화 팬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303 연쇄살인사건’은 꽃미남 배우들의 대거 출연과 이전에는 접할 수 없었던 이국적인 정취, 기대 이상의 완성도로 일본 공포영화와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 태국 공포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듯하더니, 후속타가 없어 반짝 열기는 금방 식어 버렸다. 몇 년 후 팡브러더스의 ‘디 아이’가 소개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방콕 데인저러스’의 힘 있는 연출로 주목받았던 팡브러더스의 첫 번째 공포영화 ‘디 아이’는 각막 이식수술을 통해 시력을 되찾게 된 여성 문의 이야기다. 그는 시력을 되찾는 대신에 원치 않았던 능력까지 부여받는다. 세상과 소통을 하는 순간 주변에 머물러 있는 죽은 이들의 존재가 보이기 시작했고, 의문이 생긴 문이 이식된 각막에 얽혀있는 비밀의 실체를 밝히는 내용이다.

‘바디’

‘바디’

‘디 아이’는 한국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에서 히트했다. 완전한 태국 공포영화라고 할 순 없지만, 팡브러더스의 영화 활동에서 태국은 적지 않은 관련이 있고 다국적 프로젝트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태국영화로 분류하는 것은 당연하다. ‘디 아이’가 일으킨 열풍은 그동안 관심 밖에 있었던 동남아시아 지역의 공포영화에 대한 인지도를 높였고, 최근 제시카 알바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로 리메이크되었다. 국내 관객에게 ‘디 아이’가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친숙함 때문이었다. 귀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계는 동양인들에게 익숙하다. 서양인들에겐 연쇄살인마와 괴물이 보편적인 공포영화의 소재로 잘 먹히지만, 동양은 사후 세계를 다루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태국의 경우 불교 국가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유난히 윤회와 업보를 주제로 한 영화들이 많다. ‘디 아이’도 그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 이어 국내에 소개된 반종 피산다나쿤, 팍품 웡품 공동 연출의 ‘셔터’는 태국 공포영화를 바라보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디 아이’는 냉정하게 보자면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벽 코너와 엘리베이터에서 달려드는 귀신 장면들은 대단한 공포를 자아냈지만, 타이밍과 리듬감을 상실한 깜짝 효과들이 빈번하게 이어지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반면 ‘셔터’의 연출은 한층 더 노련하고 안정적이다. ‘링’의 여파로 아시아 지역의 공포영화들이 앞 다투어 긴 머리 귀신을 쏟아내며,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갈 때 ‘셔터’는 똑같은 귀신을 다루면서도 재미있고 무서운 공포영화로 호평을 받았다. ‘셔터’를 보면 태국 공포영화의 저력을 알 수 있다. 영화는 괴담처럼 떠도는 카메라에 찍혀있는 귀신의 소재를 가지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직하게 밀고 나간다. 귀신은 관객이 예측하는 것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출몰하지만 꽤 효과적이다.

‘셔터’가 식상함을 넘어서 무서운 영화로 인정받은 것은 기교적으로 귀신을 표현하기보다는 관객이 익히 알고 있는 귀신을 매우 단순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만나는 귀신들은 국내 관객에게도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익숙했던 존재들이다. 흔해빠진 무서운 이야기와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합성 사진, 쇼프로그램의 공포 효과와 같은 곳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던 귀신을 이 태국 영화는 제대로 써먹은 것이다. 이후 반종 피산다나쿤, 팍품 웡품 감독은 샴쌍둥이를 소재로 한 공포영화 ‘샴’으로 다시 국내 관객을 찾았다. ‘샴’은 모방과 복제를 거듭하는 장르영화 특성에 충실하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에 일부 영향을 받은 ‘샴’은 기술적인 면에서 ‘셔터’보다 한층 더 발전을 했지만, 공포감은 덜했다. 너무 기교를 부린 탓이다.

‘셔터’

‘셔터’

몬쏜 아라양쿤 감독의 ‘사령 : 리케의 저주’는 스토리가 매력적이다. 살인사건의 현장검증에 나선 여배우 팅이 살해당한 귀신과 소통을 하면서 진범을 가려낸다는 이야기다. ‘사령…’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과 깜짝 공포 효과들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며 중반까지 진행되지만, 반전에 집착을 하면서 힘을 잃어버렸다. 몬쏜 아라양쿤은 ‘사령…’를 끝내고 ‘더 하우스’를 찍으며 꾸준히 공포영화에 도전하고 있다. 최근 개봉한 파윈 푸리킷판야 감독의 ‘바디’는 최근 태국 공포영화의 경향을 읽게 한다. 디지털 기술의 과감한 도입이다. 기술적 완성도는 뛰어나지만, 귀신의 존재를 디지털로 처리하면서 일어나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 관객은 디지털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배우가 직접 연기를 하는 것보다 실재감이 덜한 까닭이다. 좋은 기술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할 경우 역효과를 일으키게 마련이다.

반복적이지만 공포영화 본연에 충실하다

태국 공포영화의 단점은 충무로 공포영화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동일하지만 또 다른 면이 있다. 공통적인 것은 각각의 영화들이 다른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공포와 관련한 장면들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연출의 문제로, 대표적으로 귀신을 다루는 방식에서 많은 허점을 드러낸다. ‘디 아이’ ‘셔터’ ‘샴’ ‘하우스’ ‘바디’ 등에서 만나는 귀신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개성이 없다. 가령 나카타 히데오의 ‘링’에서 등장하는 ‘야마무라 사다코’는 기존에 존재했던 머리를 풀어 헤친 귀신의 이미지를 원한과 복수라는 주제로 극대화시키며 뚜렷한 개성을 갖추었다. 성공 포인트는 사다코의 이미지를 최대한 배제한 채,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터트린 노련하고 대담한 연출에 있었다. 그러나 태국 공포영화에서 만나는 귀신들은 성격이 급하다. 소음에 가까운 굉음과 더불어 너무 자주 등장한다. 또 하나같이 왜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자세한 배경 설명이 없다. 이것은 관객에게 척 달라붙어 오래 지속되는 공포를 추구하기보다는, 1회성 깜짝 쇼크를 연발하면서 생기는 문제다.

대다수 태국 공포영화들은 쇼크 위주로 장면을 구성한다. 이 때문에 귀신의 모습이 점점 괴물처럼 끔찍하게 변해가고, 출연 빈도도 쓸데없이 많아지고 있다. 또 과도한 CG 사용도 무개성을 초래한다. 이런 문제들은 결국 ‘디 아이’에 등장하는 귀신을 ‘셔터’ ‘샴’에 집어넣어도 영화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치명적 결함을 지닌다. 개성이 없으니 어떤 영화에 나온들 상관이 없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태국 공포영화가 많은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충무로 공포영화의 몰락은 장르 본연에 충실하기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겉포장에 공을 쏟고, 관객이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회적 의미나 철학을 담으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결과다. 태국 공포영화는 잘 만들었건, 못 만들었건 공포 그 자체에 충실할 뿐 결코 예술을 추구하지 않는다. 촌스럽게 보일지 몰라도 대부분의 작품들이 옆길로 새지 않고 오직 공포라는 원초적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스트레이트한 진행을 고수한다.

태국에서 오랜 시간 공포영화가 많이 제작되고, 관객이 끊임없이 몰리는 것은 장르영화의 변화와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힘은 꾸준함에서 비롯된다. 태국 공포영화 감독은 한 편의 공포영화를 만들곤 다른 장르로 넘어가는 일이 없다. 지금 현재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영화가 공포영화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장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크다는 증거다. 장르영화의 세계, 그 가운데 유별날 정도로 공포영화는 만드는 쪽과 보는 쪽 모두의 애정을 필요로 한다. 서툴지만 태국 공포영화는 이 둘을 갖추었기에 미래가 밝다. 이들은 관객이 새로운 것을 요구할 때 재빠르게 변화를 할 것이다. 자기만족에 앞서 어떻게 하면 관객을 만족시킬지를 먼저 고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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