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세계 왼손잡이의 날’ 제정

정진호 기자

소수자 편견에 맞선 평등 선언

“나의 오른손이 왼쪽에 있을 뿐이다.” 시솜시나 시인(본명 박종구)이 쓴 ‘왼손잡이’의 한 구절이다. 왼손잡이는 그저 왼손이 편해서, 오른손보다 왼손을 더 많이 사용하는 사람일 뿐이다. 사소한 차이지만 고대로부터 왼손잡이들은 소수자로서 오른손잡이와 다르다는 이유로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되어왔다.

문화적 편견은 다양했다. 로마시대에 생긴 악수는 무기를 사용하는 오른손을 맞잡는 평화 의식이었기에 왼손잡이는 ‘믿지 못할 사람’으로 여겨졌다. 중세 유럽에서 예술성이 뛰어난 왼손잡이는 악마에게 재능을 받은 것으로 의심을 사기도 했다. 예수가 로마병사의 창에 왼쪽 옆구리를 찔렸고, 승천 후엔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다는 성경 기록 때문에 왼쪽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는 주장도 있다.

[어제의 오늘]1992년 ‘세계 왼손잡이의 날’ 제정

언어적 차별은 극명하다. 전 세계 언어의 대부분이 오른쪽은 방향뿐 아니라 ‘정확·권위·정의·능숙’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반면 왼쪽엔 ‘어색·서툰·잘못·부정’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오른손·왼손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단어이지만 오른손이 바른손이 되면 상대적으로 왼손은 바르지 못한 손처럼 여겨진다. 지위가 떨어짐을 뜻하는 좌천(左遷)도 글자만 보면 왼쪽으로 옮겼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엔 적자가 아닌 서자의 자손은 좌족(左族)으로 불렀다. 왼쪽으로 고개 돌리는 왼고개도 부정 혹은 외면을 뜻한다.

20세기 이후 편견과 차별은 많이 줄었지만, 불편은 커졌다. 산업혁명 이후 각종 기계설계 및 디자인에 표준화가 필요했고 기준이 되는 것은 언제나 오른손이었다. 불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카메라 셔터, 지하철 개찰구의 카드 접촉 부위, 자동차 변속기 등등 왼손잡이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의도된 차별은 아닐 테지만 죄도 벌도 아닌 왼손잡이의 삶은 불편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왼손잡이의 불편을 개선하고 편견을 없애자며 만든 날이 매년 8월13일 ‘세계 왼손잡이의 날’(International Lefthanders Day)이다. 국제적 왼손잡이 인권운동으로 1992년 영국 왼손잡이협회가 제정했다. 2002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10주년 행사 때는 왼손잡이 구역(Lefty Zone·사진)이란 특별 부스를 만들어 오른손잡이의 왼손잡이 체험행사를 벌였다. 2008년에는 전 세계 네티즌을 상대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영화배우 앤젤리나 졸리,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 등을 후보로 투표를 실시해 오바마를 ‘올해의 왼손잡이’로 선정하기도 했다.

한국 왼손잡이협회는 1999년 창립되어 2000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왼손잡이 날을 기념했다. 회원들이 왼손에만 흰 장갑을 낀 채 일반인들에게 왼손잡이의 날 제정을 위한 왼손 서명을 받는 이벤트를 펼치기도 했다.

한국갤럽의 2002년 조사에서 만 20세 이상 국민 중 왼손잡이는 3.9%, 양손잡이 7.8%, 오른손잡이 88.3%로 나타났다. 양손잡이 대부분이 원래는 왼손잡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국민의 약 10%는 왼손잡이로 볼 수 있겠다. 왼손잡이의 날이 제정된 지 19년이 됐지만 국내에서는 별로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같은 조사에서 ‘왼손잡이라서 불편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다’고 답한 왼손잡이가 85%나 되는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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