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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개교
김일성종합대학은 북한에서 가장 큰 대학이자 사실상 유일한 ‘종합대학’이다. 북한에는 3개의 종합대학이 있는데 평양의 김책공업대학은 이공계 중심이고 개성의 고려성균관대학은 경공업 전문대학이기 때문에, 인문·사회·이공계를 아우르는 실질적인 종합대학은 김일성대학뿐이다. 줄여서 ‘김대(金大)’라고도 부르지만 약칭이 ‘수령의 권위’를 손상시킨다고 해서 공식적으로는 잘 쓰지 않는다. ‘김일성 주석의 혁명사상과 근대 과학이론을 체득한 민족간부의 양성’을 설립 목적으로 하며 1946년 10월1일 문을 열었다.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후 새로운 사회 건설에 들어선 북한에서 인재 육성은 그 당시 가장 절박한 문제였다. 북한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민족 인텔리’가 아주 적었으며, 주민 대다수가 문맹상태였다. 해방 전 북한에는 대학이 한 곳도 없고 몇 개의 전문학교가 있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여러 분야의 인재를 동시에 양성할 수 있는 종합대학부터 서둘러 설립했다.북한 내 김일성대학의 위상은 절... -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 결정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현지시간은 오후 3시45분, 한국에서는 오후 11시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서울 52, 나고야 27.”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 순간이었다. 나고야에 비해 열세로 평가받았던 서울이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을 거뒀다.서울올림픽 유치의 꿈을 품은 것은 1979년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추대된 박종규씨였다. 1970년대 후반 한국 스포츠는 세계무대를 향해 막 도약을 시작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대한민국은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땄고,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일본과 중국을 위협하며 신흥 스포츠 강국으로 떠올랐다. 당시 사격연맹 회장을 지냈던 박종규씨는 1970년대 후반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지는 경험을 하면서 올림픽 개최를 구체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박 회장... -
1970년 월간지 ‘사상계’ 강제 폐간
1950~1960년대 독재정권에 맞서는 비판적 지성지였던 ‘사상계’는 1952년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 ‘사상’에서 출발했다. ‘사상’의 편집인으로 참여했던 장준하가 1953년 4월 이 잡지를 인수해 제호를 ‘사상계’로 바꾸고 월간 종합교양지를 만든 것이다.‘사상계’는 민주주의와 자유언론, 남북통일, 노동 등의 분야에서 자유와 진보에 기반을 둔 권위 있는 글을 실었다. 특히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날카로운 글로 진보적 지식인과 학생들의 인기를 모았다. 1960년대를 전후해서는 판매부수가 5만~8만부에 이르며 전성기를 맞았다.장준하가 1967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발행인이 부완혁으로 바뀌었다. 박정희 정권의 미움을 받아오던 ‘사상계’는 1970년 9월29일 문화공보부가 “등록효력을 상실했다”고 통보하면서 폐간됐다. 폐간의 진짜 이유는 그해 5월호(205호)에 실린 김지하의 ‘오적’이라는 시 때문이다. ‘오적’은 부정부패로 물든 한국 권력층의 실상을 을사... -
1891년 ‘모비딕’ 작가 허먼 멜빌 사망
영문학사에서 소설가 허먼 멜빌의 지위는 독보적이다. 그는 19세기 미국문학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인공으로, 모험소설 을 통해 미국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하나 생전의 그는 무명작가에 가까웠다. 1819년 8월1일 미국 뉴욕시에서 멜빌은 부유한 무역상 집안에서 8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유복하게 자랐지만 13살에 아버지의 파산과 죽음으로 소년 멜빌은 학업을 그만두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온갖 잡일을 전전하던 그에게 바다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20살 때 잠시 영국 리버풀로 가는 여객선에 선원으로 승선했고, 1841년 당시 포경업의 중심이던 뉴베드포드에서 남태평양으로 향하는 포경선 아쿠시네트호에 탔다. 그러나 포경선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일 자체가 위험하고 더러운 데다 선장은 선원들을 혹사시켰다. 실제로 그가 탄 아쿠시네트호에서도 선장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선원들이 탈출하기도 했다. 멜빌 역시 동료와 함께 남태평양 마르키스 제도에서 탈주해 식인풍습이 있는 섬에... -
1987년 전교협 창립식 열려
교원노조의 효시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결성된 ‘4·19 교원노조’다. 3·15 부정선거 등 여러 규탄집회를 열면서 교직원의 이해를 대변할 집단의 필요성이 제기돼 결성된 단체다.그러나 제2공화국 출범 직후 1961년 1월 국무총리 장면은 공무원과 교사의 노동조합 설립 추진운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관련자들을 파면·해임한다. 군사정권이 출범한 이후에는 더욱 암울한 시절을 보낸다. 5·16 쿠데타에 의해 1500여명의 교사가 구속·해직된 후 1980년대 초반까지 근 20년의 세월 동안 ‘교사운동’과 ‘교육운동’은 기나긴 암흑기를 걷는다. 이 시기 교육은 정권 이데올로기의 홍보 수단이 되곤 했고, 교사들은 강제적으로 전달자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그러다 1980년대 초 YMCA와 흥사단 등을 중심으로 교사들의 작은 모임이 하나둘 만들어지면서 교사들의 교육운동이 기지개를 켠다. ‘서울의 봄’을 보내며 교사들이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특히 1985년 여름 실천... -
1991년 미국서 ‘바이오스피어2’ 실험 시작
“‘세상에, 이산화탄소가 또 1PPM 상승하다니! 오늘은 운전하지 말아야겠다, 나무를 심어야겠다, 아니면 오늘은 천천히 숨을 쉬고 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바이오스피어2 안에서 그런 것들을 생각해야 했어요.”(바이오스피어2 프로젝트 참가자 린다 레이 인터뷰 중)1991년 9월26일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 ‘제2의 지구’ ‘바이오스피어2’가 등장했다. 미래 유인 우주기지 건설을 대비한 생태계 조성 실험이면서 인간 생태계의 변화를 면밀히 살피겠다는 목표도 있었다.1.275㏊ 넓이의 유리 온실 안에 열대우림, 바다, 사막, 인간거주지, 농지를 조성해 현재 지구와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갖췄다. 외부와의 물질 교환은 전혀 없었다.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에너지는 오직 햇빛 뿐. 또 하나의 지구(바이오스피어1)라는 뜻에서 바이오스피어에 숫자 1이 아닌 2가 붙었다.남녀 8명이 이곳에 살겠다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기간은 2년. 직접 벼, 토... -
1996년 미국 FBI, 로버트 김 간첩혐의 체포
1996년 9월24일 미국 워싱턴DC 포트 마이어 미 육군 장교클럽에서는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부 주최로 ‘한국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리셉션이 한창이던 저녁 8시15분경 미연방수사국(FBI) 수사관 3명이 행사장에 들어섰다. 그들은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 무관 백동일 대령(예비역 해군 대령·63)의 초청으로 파티에 참석한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을 미국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전격 체포한다.로버트 김(한국명: 김채곤·71)은 8·9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영 전 의원(1914~2004년)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민주당 김성곤 의원(3선·여수시 갑·59)의 큰형이다.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 1978년부터 19년간 미 해군정보국 컴퓨터 분석관으로 일해 온 미 해군 문관이었다. FBI는 김씨가 미국 정부기밀을 백동일씨를 통해 한국정부에 넘겼다며 그를 간첩죄로 기소했다. 실제로 김씨는 백씨에게 약 10개월간 50여건의 정보를 제공했고, 그중 39건은 한국 정부에 보고됐다... -
1973년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재집권
‘페론주의’의 주인공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핵심 인물이다. 공업화로 경제성장을 이루고 노동자들의 권리와 복지를 증대시켰다는 긍정적 평가와 지나친 대중영합주의로 천문학적 외채와 물가상승을 불러와 결국 아르헨티나를 ‘병자’로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 등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었고,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망명 18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정치적 거물이라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1895년 태어난 페론은 이탈리아계 이민자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당당한 외모와 유려한 말솜씨, 타고난 정치감각으로 군대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1943년 군부 쿠데타에 참여함으로써 정계에 진출했다. 이듬해 군사정권에서 육군장관 겸 노동장관을 맡은 뒤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으로 노동자들의 인기를 독점했다. 반대 세력으로부터 사임을 강요당하고 체포되었으나 오히려 대중의 ... -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중동의 맹주를 다투던 이란과 이라크는 1979년 각각 정치적 대격변을 겪는다. 2월에는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친미 팔레비 왕조가 몰락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했다. 7월에는 이라크에서 향후 중동 정세의 폭풍의 눈이 되는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양국은 국경 근방에서 소규모 군사충돌을 빈번하게 벌였다. 그러던 중 1980년 9월22일 이라크 전투기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폭격하면서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전이 시작됐다.전쟁의 표면적인 이유는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양국 접경지역의 경제·군사적 요충지인 샤트 알 아랍 수로를 둘러싼 국경분쟁이다. 이라크는 이 수로 전체의 지배권을 주장했고, 이란은 수로 중간에 국경선을 그어야 한다며 수십년 동안 대립해 왔다. 양국은 1975년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상회의 때 수로 중앙을 국경선으로 한다는 국경협정을 맺었다. 당시 중동의 최고 강자였던 이란 팔레비 국왕... -
1875년 운요호 사건
1800년대 세계는 제국주의의 음산한 기운에 휩싸였다. 강대국들은 무력을 앞세워 후진국을 압박해 개항을 요구하는가 하면 아예 총칼을 들이대고 침략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일본은 1853년 미국의 포함외교(砲艦外交)에 굴복해 나라의 문을 열었다. ‘포함외교’란 말 그대로 “강대국이 함대의 무력으로 상대국을 압박해 목적을 달성하는 강제적 외교 수단”을 말한다.당시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은 순양함 4척을 이끌고 와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미국 대통령의 개국(開國) 요구 국서(國書)를 일본에 전달했다. 힘에 굴복한 일본은 이듬해 미·일화친조약을 맺은 데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해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한다.이후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 개혁을 단행하면서 자신들도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한다. 그들이 노린 첫 ‘먹잇감’이 조선이다.흥선대원군의 오랑캐를 배척하는 내용의 ‘양이정책’에 막혀 조선과의 수교를 맺지 못하던 일본은 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