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쓰는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어두운 회고

(10) 강철무지개 위에 서 있는 우리들을 위한 후기

이응준 | 소설가

절정 치닫는 한반도의 겨울…통일은 ‘강철무지개’로 뜰까

혼돈을 직시해야만 한다. 진정한 질서가 오기 전에 혼돈으로 내려가야만 한다. (…) 불교 경전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식별하기를 거부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콜린 윌슨, <아웃사이더>에서

나는 자유주의 날라리이자 탐미주의자인 내가 21세기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을 논하는 작가가 돼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고백은 그게 뭐든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는 제 고백이 문학과 사회에 기여할 측면이 있다고 판단되면 어쩔 수 없이 자의식을 저버리고 자신의 글로 고백을 시작한다. 작가가 되는 것에는 결코 노력보다 적잖은 우연의 힘이 필요한 것처럼 그에게 의미 있는 한 작품이 다가오는 데에는 강인한 운명의 정성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나는 잠시 그러한 사정을 고백하고자 한다.

일러스트 | 박건웅

일러스트 | 박건웅

▲우리는 우리 현대사의 긍정성과 불완전성을 동시에 인정하고 과학적으로 통찰해야 한다. 역사를 대단하게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우스꽝스럽게 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자세이다. 그래야 우스꽝스러운 이유들 때문에 빛나는 미래를 증오와 폭력으로 불살라 버리지 않을 수 있고 또한 우스꽝스러운 사고 같은 역사에 의연히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반도의 통일은 우스꽝스러운 사고처럼 닥칠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그렇게 무너졌듯이….

대한민국에서 현대문학가로 산다는 것은 수모가 일상화됨을 뜻한다. 문단에 모욕당하고, 평론가에게 모욕당하고, 책장사에게 모욕당하고, 편집자에게 모욕당하고, 언론에 모욕당하고, 친구에게 모욕당하고, 부모형제에게 모욕당한다. 그리고 그러다 망가진 작가는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황폐해지고 결국엔 그 분노와 불모를 양분 삼아 다시 글을 쓴다. 어느 순간, 나는 하필 작가가 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고, 목숨보다 귀중했던 문학을 향한 사명감에 환멸을 느껴버렸다. 그때 나는 오로지 영화판으로 도망치려는 수단으로 남한의 북한 흡수 통일에 대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역설적이지만, 아무튼 <국가의 사생활>은 절망 이후의 내게 그렇게 우연처럼 찾아왔다. 따라서 애초에 나는 천박한 ‘이야기 사냥꾼’의 입장에서만 한반도 통일에 접근했다. 근래 북한 관련 정보가 넘쳐나지만 불과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북통일’이라는 단어를 사석에서 꺼낸다는 것은 희한한 놈이 되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남몰래 한 자 한 자 원고를 채워나가는 동안 나는 내가 대단히 심각하고 예언적인 문제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고, 또한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나은 작품을 쓰든 <국가의 사생활>이 작가로서의 내 일생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예감에 휩싸였다. 2013년 5월 영국의 가디언은 나를 인터뷰하면서 “왜 한국에는 통일된 한반도에 대해 다룬 소설이 <국가의 사생활>밖에는 없느냐”고 물었고, 5년 전이나 요즘이나 한국인들의 통일에 대한 의도적이자 무의식적인 무관심이 여전히 놀라운 것처럼, <국가의 사생활>은 전 세계를 통틀어 한반도 통일 이후의 사회(작게는 북한을 흡수 통일한 대한민국)를 다룬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한 소설이다.

53년 전 스물다섯 살의 작가 최인훈의 <광장> 속 주인공인 남한의 철학도 이명준은 우여곡절 끝에 인민군이 돼 6·25전쟁을 치르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뒤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해 인도로 향하던 중 원양선박 타고르호의 갑판에서 홀연 망망대해 속으로 몸을 던져 사그라진다. 그렇게 되기까지, 일그러진 한반도 현대사의 밀실과 광장을 오가며 상처받던 청년 이명준은 남한과 북한 체제의 모든 치부들을 낱낱이,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중도라는 것이 단순한 회색주의가 아니라 좌와 우에 거리낌 없이 정확한 결정을 내리려는 이성의 의지라고 한다면 이명준은 이른바 중도주의자쯤으로 분류될 수 있을 터이다. 나는 바로 이것이 5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국가의 사생활>과 <광장>의 인연이라는 것을 서늘하게 체감했다. 최인훈의 이방인 이명준은 사실상 추방당하다 영원히 실종된 것처럼 자살한 것이 아니라, 좌익과 우익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 그 살의의 균형으로 간신히 지탱되는 우리 역사에 의해 처형당한 것이라는 충격 앞에서 나는 내가 쓰는 21세기의 <광장>인 <국가의 사생활> 속 이명준은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이념의 바다에 빠져죽는 나약한 문인이 아니라 비록 의로운 도망자가 될지언정 통일 대한민국의 위태로운 현실 안에 분명히 두 발을 디딘 채 새로운 희망을 기다리는 무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국가의 사생활>의 주인공 리강은 그렇게 탄생했고, 와중에 2011년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이 죽었다. 2011년은 <국가의 사생활>에서 남한이 북한을 급변사태에 의해 흡수한 해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중국이 기대하던 ‘인간쓰레기’ 장성택이 경애하는 조카 김정은 원수님에 의해 기관총으로 산산이 공개처형 당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이, 불현듯 북한 붕괴는 유행어가 돼 버렸다. 중도는 통일 대한민국 국민들의 통합에 가장 유용한 도구가 돼 줄 것이다. <광장>의 이명준이 역겨워하던 남과 북의 골육상쟁은 저 무간지옥이 돼 버린 북한은 그대로 남겨둔 채 남한 안으로만 자리를 옮겨와 피비린내 나는 진영논리 패악의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니 우리 곁에 중도세력의 리더를 자처하는 이가 있는데 그가 만약 별 고통도 없이 외롭지 않다면 아마도 그는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 이명준의 비극은 고금 도처에 널려 있다. 지난 7월1일은 천재 시인 백석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모더니스트 백석에게 남과 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가족과 고향을 버리지 않겠다. 더러운 글을 쓰지 않고 번역만 하겠다”며 북에 남았던 백석은 조선노동당의 ‘붉은 문학’에 미숙한 나머지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으로 하방돼 37년을 양치기로 살다가 죽었다. 황석영이 북한에서 어울린 그 북한 작가들은 작가가 아니다. 그들은 선전문학을 하는 요원들일 뿐이다. 작가란 천국에서도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골치 아픈 존재들인 까닭에 하물며 북한에 시인이자 소설가인 파스테르나크나 소설가 솔제니친, 시인 브로드스키 같은 문인들이 여태 살아 있다면 그들은 황석영 같은 소위 민족작가와의 술자리가 아니라 전부 강제수용소에 있을 것이다. 진정한 좌파 작가가 충실한 좌파 작가로서 처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연예인병에 걸려 있는 안하무인파 작가가 좌파 코스프레를 한다고 해서 진보적 지식인이자 멋쟁이 혁명가로 둔갑해 세상과 예술을 끝까지 속일 수는 없다.

이념이란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그 순간부터 악용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회의주의자가 되기 전에는 선량해질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선동하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 속의 진짜 진실을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 조지 버나드 쇼는 “온갖 역사는 천국과 지옥의 양극단 사이에 있는 세계의 진동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한 기간이라는 것은 그 흔들이의 한 번 흔들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각 시대의 사람들은 세계가 항상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인간과 초인>에 썼다.

면밀히 판정해보았을 적에, 남한과 북한의 초대 내각에는 친일파가 거의 없었다고 해야 맞다. 또한 의열단 단장이자 임시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약산 김원봉은 친일파가 설치는 남한이 싫어서 월북했다가 김일성에게 숙청되었다. 이런 식의 똥개 같은 경우는 이명준의 비극보다 훨씬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현대사의 긍정성과 불완전성을 동시에 인정하고 과학적으로 통찰해야 한다. 역사를 대단하게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우스꽝스럽게 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자세이다. 그래야 우스꽝스러운 이유들 때문에 빛나는 미래를 증오와 폭력으로 불살라 버리지 않을 수 있고 또한 우스꽝스러운 사고 같은 역사에 의연히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반도의 통일은 우스꽝스러운 사고처럼 닥칠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그렇게 무너졌듯이. 역사의 순결성을 핑계대면서 나타난 것이 독일에서는 나치즘이었고 한반도에서는 주사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순결한 척하는 것들은 좌파건 우파건 개건 고양이건 대체로 다 악마의 제자들인 법이다.

나는 이 글들을 쓰면서 영국 작가 콜린 윌슨의 세계적인 출세작 <아웃사이더>를 무슨 시집 읽듯 자주 펼쳐보았다. 노동자 출신인 그는 침낭으로 노숙을 하면서 대영박물관의 독서실에 다니던 중 우연 같은 운명처럼 작가 A 윌슨에게 발탁돼 스물네 살이던 1956년에 이 평론집을 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만약 런던의 그 청년 콜린 윌슨이 2013년의 내가 되어 통일 대한민국에 대해 글을 쓴다면 과연 어떠할 것인가, 하는 ‘감각’을 상상하면서 이 글들을 썼다. 나는 한반도 통일에 대한 지식보다는 우선 한반도 통일에 대한 ‘어떤 자극’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증오이자 인간에 대한 염려였다. 서머싯 몸이 “인간은 모두 어두운 숲이다”라고 <작가의 수첩>에 썼던, 도스토예프스키가 “만약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이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 된다. 인간은 기어코 자기 모습과 닮은 악마를 만들어냈을 것이다”라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썼던 바로 그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감히 한반도 통일에 대한 옳은 한 가지 답을 고집하느니 차라리 한반도 통일에 대한 의미 있는 여러 질문들을 시도하고 싶었던 것이다.

통일 대한민국은 젊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청춘은 육체가 아니라 실존의 나이다. 우리는 과거로 후퇴해서는 안된다. 시대정신은 항상 가장 영특한 까닭 안에서 쇄신돼야 한다. 현 상황에서 남한의 북한에 대한 평화적 흡수 통일은 유일한 도덕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이 정언명령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6·25전쟁의 유엔군 참전용사들은 고국으로 귀환해 정신적 외상으로 고통받다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방문해서는 잿더미 속에서 날아오르는 불사조를 목도하는 것만 같아, 그 옛날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감동에 비로소 치유받는다고들 한다. “인간은 다만 역사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 또한 인간에 의해 창조된다”고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썼다. 이미 우리는 승리의 역사를 창조해본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난 12월5일 콜린 윌슨이 영국 남서부 콘월의 한 병원에서 폐렴 합병증으로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묘한 슬픔에 젖었다. 어쩌면 나는 기질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안에 대해 논하고 있는 스스로가 마치 콜린 윌슨이 논하고 있는 어두운 소설들 속의 아웃사이더들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환란이 작가인 내게 <국가의 사생활>로 다가와 한반도 통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면, 나의 이 보잘것없는 글들이 누군가에게도 그러한 우연과 운명으로 작용해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다만 나는 의열단 단원이었던 시인 이육사의 시 ‘절정’에 등장하는 ‘강철’과 ‘무지개’의 저 위태롭고도 아름다운 조합이 마음에 걸린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그 마지막 연의 마지막 줄이 마치 통일 대한민국에 대한 질문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사랑과 슬기로운 용기가 곧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21세기 인류사의 이정표가 될 거대한 폭풍이 강철무지개 위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로 지금 다가오고 있다.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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