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 소설가

▲ 클라이머즈 하이…요코야마 히데오 | 북폴리오

[이영훈의 두 번 읽은 책]넘어야 할 산 위로

이런 시기에도, 책을 읽는다.

글은, 그리고 책은, 삶의 어느 순간에 지극히 무력한 것이 아닌가 하고 자조하기도 했다. 그래도 책을 읽었다. 오히려 이런 때이기에 더욱 열심히 책을 찾았다. 그리고 요코야마 히데오의 <클라이머즈 하이>를 다시 읽었다.

어째서 이 소설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다. 좋은 소설이지만, 바꿔 말하면 그저 소설이다. 현실의 비극 앞에 읽어 내린 문장이 모두 풍화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처음 읽었던 소설의 인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무척 재밌게 읽은 소설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이 시기에 다시 읽는 것이 더욱 꺼려졌다.

1985년 군마현의 오수타카 산에 여객기가 추락한다. 지역 언론인 키타칸토신문의 기자 유키는 이 사고의 취재 총괄 데스크를 맡게 된다. 사건이 있던 날, 유키는 친구인 안자이와 일본에서 가장 험하고 위험하다는 츠이타테이와 암벽을 등반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돌연히 날아든 참사로 인해 약속은 물거품이 된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각종 기사들을 정리하던 유키에게 또 다른 비보가 전해진다. 안자이가 식물인간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유키는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중압감 속에서 미증유의 재난을 보도해 나간다.

어쩌면 <클라이머즈 하이>는 이 시기에 어울리지 않는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읽는 것이 괴롭기 때문이다. 여객기 추락사고 보도의 총책임자인 유키가 겪게 되는 부조리는 그 자체로 이 사회의 속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종을 쫓는 기자들의 욕망이 충돌하고, 그 속에서 신문사 간부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내세운다. 전에는 그저 흥미롭게 읽은 부분들이 다시 읽었을 때는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왔다. 이를테면 사고 현장에서 기념촬영을 한 신문사 간부의 일화에서는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인간이란, 어디까지 무신경해질 수 있는 걸까.

더욱 암울한 것은 이런 대목이다. 추락한 여객기에는 524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그중 4명이 구조됐다. 우리는 어떤가, 하고 묻는 것이 마음 아프다. 한 가지 더, 우연히 만난 경찰의 간부는 말한다. “장기전이 되겠지만 도망가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경찰 간부는 3년 뒤를 기약한다. 그때까지 사건의 수사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우리는 어떤가, 하고 묻는 것이 부끄럽다.

소설의 제목인 ‘클라이머즈 하이’는 암벽 등반 시 느끼게 되는 극도의 흥분 상태를 뜻한다. 공포감이 마비된 채 홀린 듯이 암벽을 타고 오르는 도취인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암벽을 오르는 도중 이 도취가 풀려 버리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 말처럼 유키는 중요한 고비의 순간마다 좌절한다. 부하 기자가 쓴 기사는 간부들의 선호에 따라 소홀하게 처리되고, 애써 잡은 특종은 불확실함 때문에 포기하게 된다. 도취 상태로 목표를 향해 올라서지만 결국 공포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결말에서 유키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위험한 결정을 내리지만 그 결과로 돌아오는 것은 지방 통신부로의 좌천이다. 서글픈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다시 읽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여객기 추락사고로부터 15년이 지나고 나서야 유키는 겨우 자신 앞에 닥쳤던 일들을 제대로 반추할 수 있었다. 좌절했을지언정 유키는 스스로의 의지로 현실을 타고 넘으려 했다. 극한 상태의 도취와 도취 뒤의 공포조차도 오직 거기에 오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우리는 세월호 사고가 다 끝난 것처럼 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심할 것이 있다. 우리는 이 사고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다. 시작하지 않았으므로 끝난 것도 없다. 오히려, 이제부터, 산에 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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