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부 계층 간 ‘공간적 단절’

오창민 경제부장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정서적·공간적 단절이 일어나고 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환경이 되고 있다.

[아침을 열며]빈부 계층 간 ‘공간적 단절’

야구장만 해도 예전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좋아하는 팀이 홈런을 치면 함께 소리를 지르고 파도타기 응원을 펼쳤다. 특별석과 일반석 구분이 있긴 했지만 모두들 말라붙은 치킨 조각을 뜯고 종이컵에 맥주를 마셨다. 어쩌다 비가 내리면 똑같이 비를 맞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부자들은 경기장 제일 높은 곳에서 뷔페 음식을 들며 경기를 본다. 냉장고와 에어컨이 설치돼 있고, 소파가 있다. 부자들은 군중 속에서도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해 파티를 열고 프라이버시를 즐긴다.

학교도 예전과 달라졌다. 과거에는 가난한 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가 한 교실에 있었다. 평준화 정책에 따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같은 재벌 자제들도 장삼이사(張三李四)와 ‘일반고’에 다녔다. 급우들은 이 부회장과 정 부회장을 ‘재용이’, ‘용진이’로 불렀다. 이 부회장의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동기와 선후배들이 이 부회장 조부인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회장 장례식에 조문을 갔다. 친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 부자들은 자녀를 외국에서 가르치거나 국제학교에 보낸다. 부잣집 아이들은 가난한 집 아이들을 친구로 사귈 기회가 없다. 가난한 집 아이들 역시 부잣집 친구를 두기 어렵다. 강남·강북 간 집값 격차가 커지면서 부자는 부자끼리,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끼리 모여 산다. 강남의 한 중학교는 학급 학생의 절반이 6개월 이상 해외 체류 경험이 있다. 강북의 한 고교는 전교생의 30%가 ‘결손 가정’ 출신이다.

계층 간 단절이 심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더 어려워진다. 사회의 공공 서비스 투자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은 최근 발표한 ‘불평등은 가난한 이들의 성장에 나쁘다’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불평등이 사회 공공재 투자 등을 가로막아 빈곤층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적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미국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델은 또 다른 저서 <왜 도덕인가?>에서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빈부격차가 전례없던 수준으로 심화되고 있다. 부유층이 자신들의 삶을 공공 영역과 공공 서비스로부터 점차 분리시키고 있다”고 했다.

예컨대 부자들은 공공 수영장을 짓는 일에 관심이 적다. 사설 수영장을 이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대중교통 정책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기사가 딸린 자가용을 타고 다니므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수도권 광역버스의 입석 금지가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잘 알지 못한다. 부자들은 주치의가 따로 있고, 대부분 고액의 개인 보험을 갖고 있다. 병원 증설이나 의료보험 개혁에 대한 관심도 당연히 낮을 수밖에 없다. 부자들은 그 결과 공공 서비스 확대에 소극적이다. 인간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공공 시설이나 서비스를 별로 접해보지 않은 까닭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이용하지 않으므로 거기에 세금을 쓰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최고의 공공재인 치안 서비스가 필리핀 같은 나라에서 엉망인 이유도 그 사회의 불평등과 관련이 있다. 필리핀은 빈부 격차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인구의 1%가 전체 국토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5개 명문가가 필리핀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반면 하루 소득 2달러 미만의 빈곤층 비율은 전체 인구의 54%에 이른다. 필리핀 부자들은 대부분 사설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닌다. 굳이 경찰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정부가 제공하는 치안 서비스가 자유를 억압해 오히려 불편할 수 있다.

계층 간 단절의 원인은 소득 양극화이다. 한국 사회도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공공재 투자가 후퇴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공공재 투자의 대표적인 예가 복지 확충이지만 기초연금 지급이나 반값 등록금 같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은 대폭 축소되거나 시행시기가 미뤄졌다. 외국의 부러움을 산 공교육 시스템도 사교육이 번창하면서 약화되고 있다. 문제는 양극화가 외환위기·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론자인 최경환 신임 경제부총리까지 분배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제 성장의 열매를 고르게 나누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지만 스포츠 경기장이나 학교 같은 곳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물리적 거리를 좁혀 사회를 통합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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