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판타지 소설… 학교폭력·성적 등 고통을 환상으로 풀려는 고교생

박은하 기자

영웅담 소재 사라지고 죽음·환생으로 어두워져

“힘든 현실 부정하고픈 욕구 우리 사회가 귀 기울여야”

판타지 소설 마니아 박선희씨(29·가명)는 장르소설 사이트 조아라닷컴을 방문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1990년대 PC통신 시절부터 장르문학을 즐겨 읽고 2005년부터 이 사이트에서 활동하는 박씨는 “이렇게 어둡고 우울한 작품만 올라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학교폭력을 당해 집에서 목을 맨 뒤 이계에서 환생’, ‘수능을 망쳐 한강에서 뛰어든 뒤 마계에서 환생’, ‘자살하러 트럭에 뛰어들다 무협세계로 차원이동’을 다룬 이야기가 많다. 학교폭력, 성적비관 등의 문제로 자살한 주인공이 마법세계 등에 환생해 새 삶을 살아가는 게 주된 줄거리다.

‘이고깽’물에 ‘자살과 환생·빙의를 통한 차원이동’이라는 경향이 추가된 것이다. 이전 <사이케델리아>와 <묵향>을 모델로 한 2000년대 초·중반 판타지소설을 풀어내는 열쇠말은 ‘고교생주인공’ ‘차원이동’ ‘모험’이었다. 최근 수년간 소재와 줄거리가 어두워졌다. 국내 양대 장르소설 사이트 ‘조아라’와 ‘문피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청소년들로부터 인기가 높은 <은빛마계왕>은 수능에서 답안을 밀려 써 한강에서 자살하려던 주인공이 마계로 진입한다. <절대자의 귀환>은 학교폭력으로 고통받던 주인공이 자살한 뒤 절대자로 부활해 복수극을 벌인다. 조아라와 문피아에 청소년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2차 창작물(원작의 등장인물과 설정을 빌려 패러디한 작품)의 90%가 이런 줄거리다.

<사카이아의 사형수>를 쓴 작가 강다임씨는 현실의 청년이 겪는 고통과 연관된 경향이라고 본다. 강씨는 “최근 작품들에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잔혹하다. 왕따를 당하는데 친구도, 교사도, 부모님도 못 본 척한다는 절망감 같은 것을 생생하게 묘사한다”고 말했다. 이런 소설은 환생 이후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요소는 싹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강씨는 “어쩌면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판타지’처럼 느껴져 선택한 서술장치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는 “학교폭력, 왕따 문제가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문제로 확산된 현실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며 “고통을 리얼리즘으로 살리는 것이 아니라 없애버리는 구조를 선택한 게 눈여겨볼 지점”이라고 말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판타지소설에서 자살은 새로운 환생을 위한 과정으로서 청소년들이 갖는 욕망을 상징한다”며 “치밀한 서사가 아니라도 우리 사회가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 이계(異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된 세계. 신화 속 세계·가상의 대륙 등 모두 포함.

▲ 마계(魔界)
마왕이 지배하고 마족, 악마 등이 사는 가상의 세계. 판타지소설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함.

▲ 이고깽
‘이계에서 고교생이 깽판 친다’는 말로 주인공이 판타지의 세계에서 모험을 펼친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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