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 미술평론가

그날의 광장, 그 뜨거웠던 함성의 기억들

유월의 거리는 뜨거웠다. 1987년 유월의 거리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흰 물결로 뒤덮였다. 2002년 유월의 거리는 해방의 욕망으로 붉게 물들었다. 예술가들은 이렇듯 뜨겁게 분출한 유월의 광장을 다뤘다. 최병수는 연세대 도서관에 내걸린 거대한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에 민주화 운동의 정점에 선 대중의 분노를 담았다. 조습은 월드컵 거리응원의 열광에 대한 블랙유머 코드의 패러디 사진을 남겼다. 박영균은 거리를 가득 메운 1987년 서울시청 앞의 하얀 물결과 2002년의 붉은 거리, 그리고 2008년의 어두움을 밝힌 촛불의 의미를 성찰했다.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 1997.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내라’, 1997.

■ 최병수, 1987년의 민주화 항쟁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분노와 절규

최병수는 1980년대라는 독특한 시공간이 만들어낸 예술가, 자타가 공인하는 현장미술가다. 그를 예술가로 만든 건 그 유명한 1986년 정릉벽화사건이다. 노동자로 살던 그는 벽화를 그리던 친구 류연복의 요청으로 사다리를 만들어 주러 갔다가 경찰에 붙잡혀 조사받던 중 타의로 자신의 직업을 화가로 적어 넣은 이후 실제 현장미술가로 활동했다. 현장미술은 전시장 바깥의 공간에서 장소와 상황의 맥락 속에서 생산과 향유를 한몸에 담고 있는 미술이다. 그는 전시장 미술의 세례를 거칠 방법도 이유도 없었다. 6월항쟁의 생생한 시공간이 곧 그의 무대였다.

1987년 6월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벌어진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을 담은 로이터통신 정태원 기자의 사진 한 장은 대한민국과 전 세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학생의 모습을 본 국민들의 분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시민과 학생들의 구호와 만나 한 시대를 바꿨다. 최병수는 이 사진을 이용해 대중의 마음을 뒤흔드는 그림을 만들었다. 그는 먼저 판화를 찍었다. 사진을 토대로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고 그 아래 ‘한열이를 살려내라’라는 문구를 새긴 전형적인 프로파간다 이미지는 대중의 간절한 마음과 만나 공감의 서사를 증폭시켰다.

사람들은 검은 리본과 최병수의 판화를 가슴에 붙이고 거리로 나섰다. 긴박한 쟁점의 시간에 최병수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만화사랑’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이 판화를 10×7.5m의 천에 옮겨 그렸다. 학생회관 건물 외벽에 내걸린 대형 걸개그림은 6월항쟁의 한가운데서 분노와 절규와 함성을 쏟아냈다. 이후 이한열 장례식 행렬의 현장미술에 참여한 최병수는 대학가와 노동현장의 이슈를 담아내던 1980년대를 거쳐, 생태적 가치가 집결하는 현장에 뛰어들며 저 팍팍한 1990년대를 헤쳐 나왔다. 2000년대 이후에는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예술행동을 통해 행동주의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조습의 ‘조습이를 살려내라’, 2002.

조습의 ‘조습이를 살려내라’, 2002.

■ 조습, 2002년 월드컵 이후
붉은 악마 신드롬에 블랙유머 패러디

월드컵이 본격적인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은 건 2002년의 일이다. 붉은악마 신드롬으로 거리가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시민들은 붉은색과 광장 콤플렉스를 떨쳐냈다. 하지만 국가와 자본, 언론이 함께 직조해내는 글로벌 스포츠 마케팅은 우매한 소비대중을 생산해낸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월드컵의 일방주의를 성찰하는 기획전 ‘로컬컵’(쌈지스페이트, 2002)은 월드컵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다. 월드컵의 글로벌리즘이 야기한 현상에 대한 매스미디어와 대중, 광장의 문화정치, 국가와 자본 등 다양한 이슈들 속에 글로벌리즘과 로컬리즘에 관한 성찰이 녹아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한열을 패러디한 조습의 퍼포먼스 사진은 1980년대와 2000년대의 시대정신을 교차하는 세대 간의 논쟁을 유발했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 사회의 경직된 문화를 깬 일대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월드컵 현상은 축구게임 자체를 넘어 그것을 둘러싼 문화현상으로 증폭되어 사회적 통념과 고정관념을 깼다. 레드 콤플렉스를 일거에 무너뜨린 것 같은 붉은악마 신드롬은 대한민국 국민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빠르게 번져갔다. 거기에 덧붙은 태극기의 물결은 애국 코드를 타고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를 반복하며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쇼비니즘에 기댄 욕망 배설의 현장이 휩쓸고 간 후 남은 것은 열광과 냉소가 뒤섞인 혼돈이었다. 경찰의 가이드라인 안에서 펼쳐지는 온건한 광장의 문화가 창궐하는 동안 그해 지방선거는 처참하게 일그러졌고, 미군 장갑차에 압살당한 꽃다운 두 여중생, 서해교전을 통해 드러난 엄연한 냉전의 논리들, 국운융성 프로젝트 앞에 외면당한 민생과 생존권 투쟁 등의 암담한 뉴스가 이어졌다. 조습의 사진이 유의미한 것은 바로 이 대목, 그러니까 1980년대의 저항과 해방 코드가 21세기의 길목에서 만난 욕망의 정치와 충돌하는 지점을 한 컷의 퍼포먼스 사진에 담아냈기 때문이다. 민주화 열사의 최루탄 피습 장면을 패러디한 이 사진은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있는 21세기 욕망의 처소와 해방의 향배를 가늠하게해주었다. 그것은 ‘의사 해방을 직조하는 욕망의 문화정치’를 비판하는 블랙유머다.

박영균의 광장의 풍경 연작.  1987년 친구가 보이는 풍경(광장에서), 2012.2002년 광장의 기억(노랑 건물이 보이는 풍경), 2002~2012.2008년 6월 10일 스파이더맨이 보이는 풍경, 2008. (위쪽부터)

박영균의 광장의 풍경 연작. 1987년 친구가 보이는 풍경(광장에서), 2012.2002년 광장의 기억(노랑 건물이 보이는 풍경), 2002~2012.2008년 6월 10일 스파이더맨이 보이는 풍경, 2008. (위쪽부터)

■ 박영균, 1980년대서 2008년 촛불의 군중까지
386세대 눈으로 본 광장의 풍경 성찰

조습은 1990년대 학번의 눈으로 2002년 월드컵 현상을 바라본 반면, 박영균은 386세대의 눈으로 붉은 물결을 바라보았다. 그는 회화와 영상으로 거리와 광장이 만들어낸 거대한 사회적 퍼포먼스를 다뤘다. 1980년대 이후 사회적 변화를 구조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 접근함으로써 일상성의 문제를 다뤄온 박영균은 광장의 군중을 조망하는 386세대의 관점을 드러낸다. 광장의 정치에 주목한 박영균은 1987년의 민주화운동과 2002년의 월드컵 거리응원, 그리고 2008년 촛불의 에너지를 다뤘다. 각각의 사건을 다룬 회화 작품과 더불어 1987년과 2002년의 거리와 광장을 담은 영상을 교차 편집해 한국현대사에 있어 역동적인 광장의 에너지를 보여줬다.

‘1987년 친구가 보이는 풍경(광장에서)’은 이한열 장례식이 열린 서울시청 앞 풍경이다. 격동하는 한 시대의 사회 변혁 에너지가 집결한 장소에 대한 그의 기억은 흰 물결 위에 새겨진 보랏빛 그림자다. 1980년대에 20대 청춘을 보낸 예술가 박영균은 거리와 광장에 관한 나름의 성찰이 있다. 그것은 삶의 희망과 상처 사이를 오가는 골 깊은 기억이다. ‘2002년 광장의 기억(노랑 건물이 보이는 풍경)’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바로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군중을 내려다보는 ‘86학번 김대리’는 군중 속의 고독 이상의 혼돈에 빠진 386세대의 자화상이다.

‘2008년 6월10일 스파이더맨이 보이는 풍경’은 당시 쇠고기 수입 문제로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촛불시위의 현장을 담고 있는데,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의 군중을 내려다보는 주체는 김대리가 아니라 스파이더맨이다. 전 지구에 걸쳐 선풍을 일으킨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인공으로 대체된 관찰자 시점은 이미 전 지구화가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 영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뻗어 있는 한국 사회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박영균의 풍경 연작은 우리가 겪어온 현대사의 장면일 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이 어떻게 에너지를 결집하고 그것을 구조적 변혁으로 이끌어 왔는가도 보여준다. 그 속에는 사회의 구조를 뒤흔드는 행위자로서의 개인 또는 그 집합으로서의 군중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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